130화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손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고개를 들자, 바네사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바네사.”
“신아란 분과 연관이 있든 없든, 지금 전 에리카의 친구잖아요.”
배시시 웃은 바네사가 고개를 돌려 피아노를 눈짓했다.
“피아노, 쳐 주지 않으실 건가요? 저 오늘 드디어 에리카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엄청 기대했는데.”
그 말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가지런히 손가락을 건반에 올려놓고, 느릿하게 눌러 보았다.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음색이 그대로 귓가에서 재현됐다.
“……제가.”
목소리가 목에 걸린 듯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후에 이어 말했다.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했었잖아요.”
“네, 기억하고 있어요. 직접 만든 노래라고 하셨잖아요.”
바네사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지금 들려드리고 싶은데.”
“저는 완전 좋아요!”
바네사의 은빛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반주를 치기 시작했다.
발랄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가락이 고요한 오두막집에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봄비 머금은 강가는, 푸른빛이 참 고와요…….”
그곳에서 나는 나는, 슬픈 노래 불러요.
나는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김해수 너 딱 기다리고 있어, 교수님과 상담 빨리 끝내 버리고 바로 튀어 와서 들을 거니까.”
내 숨이 끊어진 바로 그날, 신아에게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노래였다.
끝내 들려주지 못했던.
바네사는 내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윽고 노래가 모두 끝났을 때, 바네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네사?”
놀라서 그녀를 부르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바네사가 내게로 다가왔다.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왜 우는지. 그냥…….”
그녀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따뜻한 두 팔이 나를 폭 감싸 안았다.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파서.”
바네사가 나를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
“많이 힘들었지? 이젠 괜찮아. 편히 쉬어. 그래도 돼.”
“…….”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불현듯,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지금 저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바네사인데도, 왠지 신아한테 듣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고마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바네사를 마주 안았다.
역시, 체사에게 물어봐야겠다.
바네사와 신아의 관계에 대해.
9. 몰랐던 진실과 잊고 있었던 기억
신교의 성전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체사를 찾았다.
녹셰에 있던 체사는 내 부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제수씨, 무슨 일이신가요? 이렇게나 다급하게 찾고.”
체사가 바람에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한시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체사 씨, 저번에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죠. 뭐든지 알고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달라고.”
“네, 그랬죠.”
“그럼 알려 주세요. 바네사와 신아는 무슨 관계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던 체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잠시 나를 그렇게 바라보던 체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알고 싶으신가요?”
“알고 계시는군요.”
혹시나 했지만, 정말 알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워서, 나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잠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체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세인트 바네사는 이신아 씨가 설정한 여주인공이지요. 소설 《新 로미오와 줄리엣》의 등장인물이고요.”
“…….”
“이신아 씨는 세인트 바네사를 구상할 때 본인을 투영했습니다. 음, 세인트 바네사의 영혼 중 일부가 이신아 씨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체사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바네사의 영혼 중 일부가 신아와 똑같다고……?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나요?”
“당신을 보면 어쩐지…… 그립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바네사가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던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떨어졌다. 가슴이 미어지듯 먹먹해져 와서, 숨쉬기가 조금 힘들었다.
“……여기는, 정말 신아의 소설 속이었구나.”
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잠시 침묵하던 체사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이곳은 이신아 씨의 소설 속 세계가 아니에요. 원래부터 실존하고 있던 현실 세계죠.”
“……뭐?”
나는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이 세계가 신아의 설정과 그렇게 닮아 있지?’
머릿속에서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나는 가장 묻고 싶은 것을 입에 담았다.
“……방금 여기는 실존 세계라고 했잖아요. 근데 어떻게 사람을 ‘구상’할 수가 있어요?”
“음, 어떻게 설명해 드리면 좋을까요.”
잠시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던 체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려 제국에는 다양한 수인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두머리 격인 수인족이 셋 있는데, 영혼으로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용,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는 봉황,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간섭이 가능한 기린이 그들이죠.”
그럼 체사는 봉황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내 귀로, 체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기린 중 한 명이 본인의 고유 능력을 사용해서 이신아 씨가 구상하신 소설 설정을 이곳에 반영했어요.”
물론 용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지만요. 체사가 덧붙였다.
“……왜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묻자,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어느 정의로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한 사람을 너무나 그리워하다가, 결국에는 목숨을 걸고자 한 누군가를 막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사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자, 제 답변은 여기까지입니다! 자세한 건 제수씨 남편이 알려 드리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당사자는 저쪽이라서요.”
한쪽 눈을 찡긋한 체사가 한 곳을 눈짓했다.
언제 온 건지, 그가 눈짓한 곳에는 세이룬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럼 전 이만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발랄하게 외친 체사가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흡사 짐을 떠맡기려는 모양새였다.
문이 닫히고, 응접실 안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
“……네, 에리카.”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세이룬의 금빛 은빛 눈동자가 파문이 일듯 흔들렸다.
그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내 맞은편에 얌전히 앉았다.
포카와 레비나가 조심스럽게 캐모마일 냉차를 세팅하고 나갔다.
나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들고 세이룬을 마주 봤다.
“체사 씨에게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네.”
“이곳이 실존 세계인데, 기린 중 한 분이 신아가 구상한 소설 설정을…… 이곳에 반영했다고.”
“맞습니다.”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는 캐모마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세이룬도, 체사도, 신아도, 어쩌면 수인족들 전부 다.
나만, 모르고 있었어.
“……알려 줘.”
“…….”
“나만 모르고 있는 거, 전부 다.”
내 요구에, 세이룬이 스륵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체사 그 녀석의 말대로입니다. 이곳은 원래 실존하던 세계였고, 기린족의 현자 이한 님께서 이신아 씨가 구상하신 설정을 이곳에 반영했어요.”
“……신아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갈수록 영문 모를 말에, 나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머리가 어지럽게 꼬여 갔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신아를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신아와 만나서 ‘신.로.줄’의 설정을 이곳으로 옮겨 온 거야?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신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혹시, 신아가 일부러 이것 때문에 ‘신.로.줄’의 설정을 짰을 가능성은?
……하지만 신아는, 유럽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로.줄’의 설정을 짰었는데?
온갖 종류의 의문이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에리카가 해수가 아니었더라면, 제가 에리카의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세이룬이 샤샤라는 걸 알게 된 다음 날,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세뤼아가 준 어마어마한 선물도 떠올랐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느릿하게 말문을 떼자, 세이룬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찻잔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김해수를.”
“…….”
“너, 알고 있었어?”
이들이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것이 똑 맞아떨어졌다.
내 물음에, 주저하듯 머뭇거리던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이없는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들 아는 걸 나만 몰랐다는 배신감에 나온 한숨이기도 했다.
한동안 적막한 침묵이 응접실을 맴돌았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물었다.
“……왜 숨겼어?”
이번에도 미움받기 싫어서였다고 대답할까.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이룬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대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반응을 본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어쩐지 우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대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제가 그대의 곁에 있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
“그대는 분명, 혼란스러우실 테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르시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어요.
세이룬이 느릿하게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