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감히, 네까짓 게―”
“사피엔.”
얼굴을 차갑게 굳힌 나는 팔짱을 낀 채 세이룬과 사피엔 곁으로 걸어갔다.
“내가 말했지. 네 그 행복은 남의 행복을 갉아먹으면서 만들어졌다고.”
“…….”
“그건 절대로 정상적인 행복이 아니야.”
사피엔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그런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게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는 뜻이고, 잘못을 모르면 고칠 수 없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와 함께할 수 있을까.
사피엔이 말없이 그대로 굳어 버리자, 세이룬은 천천히 그의 멱살을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피엔은 여전히 옷깃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런 그를 흘끗 쳐다본 나는 이내 세이룬을 돌아봤다.
“그만 가자.”
“……네, 에리카.”
사피엔을 끝까지 노려보며, 세이룬이 대답했다.
내가 세이룬과 함께 막 침실을 나서기 전, 그때까지 미동 없이 가만히 있던 사피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에리카, 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순간, 세이룬의 눈동자에 다시금 살기가 어렸다.
나는 빙글 몸을 돌린 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피엔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공과 제가 뭐가 다른가요?”
“뭐?”
“뭐가 달라서…… 당신은 제가 아닌 대공을 선택했나요?”
“……허.”
하도 어이없는 질문을 받아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입꼬리가 한껏 뒤틀렸다.
“세이룬과 당신이 뭐가 다르냐고? 하하, 이거 꽤 웃긴 질문인데.”
나는 몸을 돌려서 사피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의 멱살을 잡고 짓씹듯 말했다.
“황제님아, 세이룬은 내 날개야. 내가 원하면 나를 데리고 훨훨 하늘을 날아 주는. 그런데 당신은 뭐야?”
“…….”
“날개는커녕 사지를 부러뜨리는 새장이잖아. 그런 당신을 어떻게 좋아해? 제정신인가?”
멱살 쥔 손에 힘을 주며 한껏 빈정거리자, 사피엔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던지듯 멱살을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룬과 함께 황제궁을 나섰다.
내가 본 사피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근 한 달 동안 무척 바빴다.
기존의 정치 체제에 새로운 변혁을 불러오는 건데, 바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똥 덜 치우려고 그 생고생을 다 했는데, 결국 사피엔이 트롤 짓하면서 망해 버렸네……?”
대공저에서 서류상 전쟁에 나간 세이룬 몫까지 사무 보랴, 그동안 밀린 해수 업무까지 몰아서 보랴, 황궁에서 드레인의 대표 신분으로 의회 도입 및 구성에 대해 회의하랴, 나는 진짜 뻥 안 치고 몸이 2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왜 2개여도 부족하다고 했냐면, 세이룬한테 아예 대공비 인장을 맡기고 그와 함께 대공저 관련 사무를 나눠서 봐도 미치도록 바빴으니까.
“내가 이 짓을 안 하려고 그 고생을 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싹 다 갈아엎을 걸 그랬네?”
물론 그 루트는 지금보다 더 고단한 루트긴 했다.
지금은 귀족들이 협조라도 해 주는데, 그냥 갈아엎는 것은 협조 여부부터 불투명할 테니.
아무튼, 요 한 달을 빡세게 갈아 넣고 나니 이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물론 숙제 검사하듯 가끔 내게 의회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몇몇 귀족들 때문에 완전히 한가해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현재 나는 겨우 찾아온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에리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네사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폐제의 처형식 이후로 거의 한 달 만에 방문하는 신교의 성전이었다.
“에리카, 괜찮나요? 황궁에 감금됐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한테 왜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에리카를 도와드릴 수 있었는데!”
바네사가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바네사는 교황이니까, 정치적인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긴, 신교에는 성기사 수가 턱없이 부족하긴 해요…….”
“아, 하하…….”
들켰다.
슬쩍 시선을 피하자, 한숨을 폭 내쉰 바네사가 내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신교의 성기사 인원 늘릴 테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바로 달려갈게요.”
“음, 하지만 전 바네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은걸요…….”
“괜찮아요. 구교가 패망하고 나서 신교의 세력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에, 어차피 성기사를 늘려야 되긴 했어요. 전혀 부담되지 않아요.”
붙잡힌 손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세졌다.
‘네’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바네사.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바네사를 부를게요.”
그냥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내 선에서 치워 버려야지.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바네사가 약속한 거라며 해맑게 웃다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짝 손뼉을 쳤다.
“맞아, 에리카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잊을 뻔했네요. 저 선물 준비했는데!”
“선물이요?”
“네, 제가 저번에 예배당에서 말씀드렸잖아요.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다고.”
바네사가 즐겁게 웃으며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지금 보여 드릴게요.”
가는 길로 보건대, 예배당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해 보고 있는데, 바네사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의회를 도입하셨다고 들었어요. 황제 대신 국정을 총괄할 재상으로는 베이센 공작으로 정했다고.”
“맞아요. 저만 구출하고 바로 공작령으로 내려가려는 에스로타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나는 과거를 떠올리듯 눈을 아련하게 떴다.
재상 자리에는 사교계의 별인 에스로타가 가장 적임자라고 얼마나 설득했는지, 결국 적어도 2년에 한 번씩 베이센 공작의 티파티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알겠다고 해 줬다.
“음, 조금 질투 나려고 하는데요.”
“질투?”
바네사의 의미심장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바네사가 피식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에리카가 저보다 공작과 더 친하신 것 같아서요.”
“네에?”
“에리카와 가장 친한 건 저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바네사가 입술을 불퉁하게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툴툴대는 신아와 꼭 닮아 보여서,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영광이에요, 바네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도착한 곳은 성전의 정원 중 하나인 아이리스 정원 한가운데 있는 하얗고 조그마한 오두막집이었다.
‘성전에 이런 곳이 있었나?’
처음 보는 곳인 것 같은데.
의아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네사를 돌아보자, 자신만만하게 웃은 바네사가 몸소 문을 열었다.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 안 가득 넘실거리는 하얀 햇살이었다.
햇살과 함께 들어온 바람이 흰 커튼을 살랑이며 흔들었다.
그 아래 자리한 새하얀 피아노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피아노?”
피아노. 틀림없이 피아노였다.
머릿속이 한없이 멍해졌다. 나는 홀린 듯이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눌러 보았다.
딩, 하는 피아노 특유의 맑은 음색이 오두막 가득 퍼져 나갔다.
정말로 이 악기가 피아노임을 확인한 내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이게 여기 있어요?”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원래라면, 피아노는 여기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피아노에 대해 말한 사람은 아직 세이룬밖에 없었으니까.
바네사는 피아노가 뭔지 몰랐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게 여기 있어?”
나는 휙 고개를 돌려서 바네사를 쳐다봤다.
동요하는 나를 만족스럽게 바라본 바네사가 생긋 웃었다.
“에리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주문을 넣어 봤어요.”
“……좋아할 것 같았다고?”
그걸 어떻게 알고서?
눈빛으로 내 의문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바네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진지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바네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에리카를 보자마자 알았어요.”
“보자마자……?”
“좋아할 것 같았어요. 음악도, 작곡도, 피아노도. 보자마자 알았어요. 마치 에리카를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처럼, 오랜 친구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주먹이 조금씩 떨려 왔다.
속에서 갖은 의문이 얽히고설켜 회오리쳤다.
어떻게 처음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왜 나를 보자마자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당신을 보면 어쩐지…… 그립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요.”
나를 보면 그립고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고 했었지.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그리운 느낌이 들 수가 있어?
―너, 혹시 신아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네사는 ‘이신아’가 누군지 몰랐다. ‘김해수’도 누군지 몰랐다.
그러니, 신아일 리가 없는데.
문득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려고 해서,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바네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신아란 분과 많이 닮았나요?”
“…….”
“저와 이신아란 분이 연관 있을까요?”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바네사는 신아가 설정을 짠 소설의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연관성은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불현듯 체사가 떠올랐다.
“저는 뭐든지 알고 있어요. 제수씨한테는 특별히 비밀 유지용 요금이나 정보 이용료 같은 건 받지 않을 테니, 혹시 궁금하거나 필요한 요청 사항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혹시, 체사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는 체사라면, 내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