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 *
지하 감옥에서 제5기사단과 포카를 꺼내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명령한 일은 사피엔을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왕을 잡아야 체스가 끝나듯이, 그래야 보호할 대상을 잃은 황실 기사들이 더 빠르게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사피엔을 잡아 포박한 뒤에는 물리적으로 위협이 되는 황실 기사들을 제압해 지하 감옥에 가뒀고, 그 이후에는 사용인과 같은 일반인들을 모두 잡아들여서 창문을 전부 가린 별궁에 임시로 가뒀다.
나를 황후궁에 감금한 이후, 사피엔이 귀족들의 황궁 출입을 막았기 때문에 다행히 귀족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이 일련의 일들은 모두 내전으로 인한 황위 교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이 어수선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수선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 봐도, 나는 결국 참지 못했을 것 같다.
좋아하지 않는, 오히려 싫어하는 자가 강제한 신체적 접촉은.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당장 내 수중에 이걸 타파할 힘이 있는데, 이 끔찍함을 그냥 참고 넘어갈 만큼 나는 관대하지 못했다.
‘뭐, 에스로타를 기다리던 장소가 하필 정전인 건 그냥 내 사심이었지만.’
사피엔이 황제라고 유세 떨면서 내 사람들을 지하 감옥에 가둔 게 너무 아니꼬워서, 나도 황좌에 한번 앉아 보고 싶었다.
이럴 때 아니면 내가 또 언제 황좌에 앉아 보겠냐고.
“지금…… 이게, 무슨……?”
황좌에 당당히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내 앞에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사피엔을 한 번, 내 주위를 지키고 선 드레인 기사들을 한 번 쳐다본 에스로타가 다시 나를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생긋 웃으면서 에스로타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저도 별로 참고 싶지 않아서요.”
“……?”
에스로타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이 한층 짙어졌다.
피식 웃은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우선, 무례한 부탁임에도 들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나의 감사 인사에, 한동안 얼이 빠져 있던 에스로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리카, 강제로 억류당하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보시다시피. 전 괜찮답니다.”
에스로타의 걱정 어린 질문에 가볍게 답하던 순간, 여기서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 들었다.
“―거짓말.”
순간, 머릿속에서 ‘환청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국경에서 아이테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을 그가, 왜 여기에―?
하지만 그것이 환청이 아님을 일깨워 주듯, 정전 곳곳에 서 있던 드레인의 기사들이 일시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세이룬?”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이미 그리운 품에 안겨 있었다.
나를 와락 끌어안은 세이룬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응?”
“에리카는 항상,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를 안고 있는 팔도 목소리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어서,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지금은 정말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것들 모두 제거한 뒤거든.”
세이룬을 슬쩍 놓은 나는 내 뒤쪽에 포박당한 채 무릎 꿇고 있는 사피엔을 눈짓했다.
사피엔을 발견한 세이룬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서 위험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세이룬의 신경을 돌렸다.
“아, 근데 세이룬은 혼자서 올라온 거야?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네?”
다행히 세이룬은 바뀐 내 화제에 따라와 주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체사 편으로 전달해 주신 말씀을 듣고 저 혼자 비밀리에 왔습니다. 기사단을 모두 이끌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를 부르려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군을 이끌고 온 건 아니라 다행이야…….”
나직이 중얼거린 나는 몸을 돌려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에스로타, 궁금하신 게 많을 텐데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여기는 듣는 귀가 있어서.”
사피엔을 눈짓하며 말하자, 혼란이 가득하던 눈빛을 애써 맑게 한 에스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이룬, 에스로타와 함께 정전 옆의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에스로타에게 이번 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드레인 가문에 고대 용의 피가 흐른다는 소문만 알고 있었던 에스로타는 그 가문 사람들이 실제 용족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정말로, 용족이라고요? 기사들은 다 수인족들이었고요? 세상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래서 그렇게 쉽게 황궁을―….”
한동안 횡설수설하던 에스로타는 이내 조금씩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는 에스로타가 완전히 이성을 되찾기를 기다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에스로타, 예상하셨겠지만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누설되면 곤란한 거라.”
“……확실히,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에 배타적이긴 하죠. 방금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예민한 정보임에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에스로타가 감사의 뜻을 담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병력까지 지원해 주셨는데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그래서 말인데, 외부에는 베이센 공작가의 병력으로 제가 구출될 수 있었다고 알리고 싶어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어차피 그럴 생각이기도 했으니 문제없어요.”
에스로타는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역시, 사람 보는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고마워요. 에스로타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어요.”
* * *
이렌텔의 새 황제가 아이테와의 전쟁을 틈타서 드레인 대공비를 황궁에 억류했다는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수도에 퍼졌다.
가련한 대공비는 용맹한 베이센 공작의 도움으로 황제의 마수에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고, 드레인의 지대한 공헌으로 황위에 올랐던 황제는 세간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렌텔을 수호하는 가문의 안주인을 황궁에 억류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전쟁이 발발한 와중에!”
“드레인 대공 부부의 금슬이 어지간히 좋은 게 아니던데, 이러다 분노한 드레인 대공이 칼날을 이쪽으로 돌리면 어떡합니까?”
“일등 공신이라도 저렇게 수모를 겪는데, 저희 같은 변변찮은 귀족들은 오죽할까요. 이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다음 타깃은 저희가 될지도 모릅니다.”
평소 대공비에 우호적인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들도 구교파 신교파 할 것 없이 대공비 쪽으로 힘을 실었다.
“황제께서는 백성의 안녕을 위해 하사받은 권세를 사사로이 남용하여 공신을 협박하고 억류하였습니다. 이렌텔의 충신으로서 어찌 이를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귀족들은 이미 지난 내전 때 황제의 권력 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바 있었다.
그들은 다시금 발생한 황권 남용에 치를 떨었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황제를 재판에 회부했다.
황제는 며칠에 걸친 재판에서 유죄를 입증받아 유폐형을 선고받았다.
황권을 사사로이 이용하여 공신을 황궁에 감금하는 등의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가장 표면상으로 드러난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드레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란 이유가 가장 컸다.
지금 한창 타국과 전쟁 중인데, 빡친 드레인 대공이 너 죽고 나 죽자며 회군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게다가, 기회가 될 때 이를 강력히 처벌하여 판례를 만들어 놔야 황제가 더는 귀족들을 건들지 못할 터였다. 황제의 유폐형은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황제가 유폐형에 처하면 국정은 누가 돌봅니까?”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대공비는 새로운 정치 기구를 제안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테 공화국은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이 곧 왕과 같은 역할을 한다지요. 대통령은 의회와 안건을 조율하여 합의하고, 그렇게 합의된 내용만이 국가 시책으로 최종 선정됩니다.”
대공비는 의회를 도입하여 이번 대 황제의 빈자리를 메우고, 이후 다음 대 황제부터는 황제와 의회가 조율하여 국정을 이끄는 체제로 가는 것을 제안했다.
귀족권 강화에 늘 목이 말라 있던 귀족들은 이 제안을 흥미롭게 받아들였고, 결국 통과되어 이렌텔 식 의회의 탄생을 앞두고 있었다.
의회는 법적, 실질적으로 황권을 견제할 수 있는 기구였다.
이는 즉, 황제는 명목상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 권력자이기는 하나, 통치에 필요한 결정적 사항을 의회와 조율하여 합의해야지만 최종 안건으로 통과될 수 있도록 정치 체제가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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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그냥 상식적으로만 행동했어도 평범한 황제가 될 수 있었잖아. 내가 왜 내 손으로 세운 황제를 끌어내게 만들어.”
사피엔이 임시로 갇혀 있는 황제궁의 침실.
그가 황궁의 세멘티아 탑에 유폐되기 전에, 나는 세이룬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보러 왔다.
참고로,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1주일에서 1년으로 합의 봤다) 세이룬은 검은 클록을 두른 채 호위 기사 신분으로 나와 동행했다.
고급스러운 자수가 잔뜩 수놓아진 폭신한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던 사피엔이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에리카.”
“……웃음이 나와, 지금? 한순간의 머저리 같은 선택으로 평생 동안 탑에 갇히게 됐는데?”
사피엔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순간의 머저리 같은 선택? 그럴 리가. 그 선택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신중하게 고른 선택이에요. 한순간에 내린 것도 아니고, 머저리 같지도 않아요.”
“뭐?”
“내가 말했잖아요.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내 계산에 실수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선택을 돌이키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가 금안을 곱게 접으며 덧붙였다.
“당신을 내 손 안에 두었던 지난 이틀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순간, 내 옆에 있던 세이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피엔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펄럭이는 후드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금빛 은빛 눈동자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