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 *
밤을 새워 도착한 국경에서는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수인족들로만 구성된 인원이기에 가능한 도착이었다.
“대공 전하.”
국경에 세운 성곽의 성루에 오르자,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제1기사단장, 퓨렌이 예를 올렸다.
세이룬은 무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상황은?”
“제3기사단은 대공성에서 아이테 세력을 제거하는 중이고, 제1기사단과 제2기사단이 이곳 아프로스 지대에서 국경을 방비하며 아이테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상태이며, 적군의 피해 역시 아직까지는 크지 않습니다. 적군의 병력은 대략 1만인데, 오늘 중으로 5만이 추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퓨렌이 보고했다.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세이룬이 무심하게 물었다.
“전투는 지금껏 그래 왔듯 시간을 끌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잠깐의 계산을 마친 세이룬이 곧장 명령을 내렸다.
“이번 전투는 가능한 빨리 끝내도록 한다. 일주일 내로 전쟁을 종결하도록.”
“……일주일, 말씀이십니까?”
옆에서 갑옷을 장착하며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세상에 7일 만에 종식되는, 그것도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국가 간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퓨렌 역시 같은 심정으로 세이룬이 말을 번복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세이룬은 도리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가서 일 안 하나?”
“……전하, 아무리 그래도 7일은 너무…….”
“명분이 걸리는 거라면 그냥 아이테 군이 너무 오합지졸이었다고 해. 패배한 자는 말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원래라면 최소한 1년 정도는 끌어야 할 전쟁을 일주일 만에 승리로 끝내라니. 한숨을 삼킨 퓨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군께서 사랑에 빠지시더니, 제멋대로 하시는 행동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닌가. 원래 컸던가…….’
과거를 되짚던 퓨렌은 이내 눈을 흐리게 뜨며 성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당신의 안위를 제멋대로 걸지 않으시니, 오히려 이게 나아진 것일지도 몰랐다.
퓨렌이 침울하게 지휘를 계속하는 동안, 세이룬은 성루의 한 곳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출전 준비를 마친 라인은 제4, 6기사단장과 함께 출정 보고를 하기 위해 세이룬에게 다가갔다.
“전하, 중앙 기사단과 제4, 6기사단이 출정 보고를 올립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인 라인과 제4, 6기사단장이 성루 아래로 내려가 본인 휘하의 기사단원과 합류했다.
녹셰에서 누군가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대공 전하.”
제비 한 마리가 성루에 내려앉자마자 인간의 모습으로 화했다.
세이룬의 시선이 그자에게로 향했다.
체사의 제1보좌관인 스웰로였다.
“네가 무슨 일이지?”
세이룬이 물음에, 스웰로가 답했다.
“대공비 전하의 요청으로, 체사 님께서 전하께 전달하라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에리카의 요청?”
뭔가 짐작한 듯, 세이룬의 얼굴이 굳었다.
고개를 끄덕인 스웰로가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만찬이 끝난 이후, 황제가 비전하를 황후궁에 감금했습니다. 현재 베이센 공작에게 도움을 청한 상황이며,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5기사단은?”
“황제의 명으로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전하의 뜻에 따라 별도의 움직임 없이 수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세이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를 중심으로 짙은 살기가 퍼져나갔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궁에서 드레인 가문과 황가의 충돌은 반드시 정국의 혼란을 가져올 터였다.
사피엔은 분명 이를 빌미로 에리카를 잡아 둔 거겠지.
나라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에리카의 마음을 악용해서.
“전하?”
세이룬의 살기를 느낀 퓨렌이 다급히 세이룬에게 다가갔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세이룬이 퓨렌에게 나직이 물었다.
“아이테 측 총사령관이 누구지?”
“첩보원의 정보에 의하면, 메스 아쉴 대령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세이룬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린 순간이었다.
찰나 성루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일순 당황한 퓨렌은 서둘러 세이룬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전하!”
다급히 세이룬을 쫓아간 곳에는 예상했던 대로 메스 아쉴이 있었다.
물론 온전하게 있지는 못했다.
세이룬이 아쉴 대령의 목을 잡고 그대로 땅에 내리꽂은 탓에, 그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모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각하―!”
“대령 각하!”
근처에서 후방을 엄호하던 아이테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세이룬과 퓨렌을 빙 둘러싸며 칼을 겨눴다.
“쿨럭, 쿨럭…….”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쉴 대령이 피 섞인 잔기침을 계속했다.
그런 그를 땅으로 더욱 깊이 처박은 세이룬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감히…… 사피엔 그 빌어먹을 개자식과 손을 잡고 내 부인님을 건드려?”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네까짓 버러지가 감히―”
“이, 이야압!”
그때, 세이룬과 퓨렌을 빙 둘러싸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칼을 치켜들고 세이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어 다수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퓨렌이 막 검을 치켜들었을 때쯤, 어마어마한 무형의 기운이 일시에 병사들을 땅으로 메다꽂았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땅으로 엎어진 병사들이 일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억누르고 있어 일어날 수 없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목격한 병사들의 눈에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몇은 심지어 전쟁 중임에도 검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커, 컥…….”
정적 가운데, 숨이 막혀서 세이룬의 손만 잡아 뜯고 있는 아쉴 대령만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몸부림을 칠수록 목에 가해지는 힘은 더욱 억세질 뿐이었다.
“네가 감히, 내 부인님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나?”
결국 손아귀의 힘을 버티지 못한 목뼈가 단말마를 내며 부서졌다.
숨을 잃은 아쉴 대령의 몸이 축 늘어졌다.
목을 던지듯 놓은 세이룬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전하, 여기.”
퓨렌이 눈치 좋게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이룬에게 건넸다.
받아 든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은 세이룬이 아쉴 대령을 눈짓했다.
“저거, 들개의 먹이로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이자들은……?”
간결히 대답한 퓨렌이 주위의 아이테 병사들을 눈짓했다.
여전히 은은한 살기가 감도는 금빛 은빛 눈동자가 스윽 병사들을 훑었다.
“목격자가 있는 것은 좋지 않지. 부인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
“멸구하도록.”
그 명령을 끝으로, 세이룬은 곧장 자리를 떴다.
아마도 황궁으로 가시는 거겠지. 퓨렌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7일 만의 완승을 차후 어떻게 설명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지 고민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지만, 주군의 명이 우선이었다.
주군의 지시를 아군에게 전하기 위해 성곽으로 향하며, 퓨렌은 차마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먼저 가실 거라면, 전쟁 기간은 1년으로 늘려 주시면 안 되나…….”
* * *
치열한 접전이 진행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수도의 성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아무리 내전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개중 뛰어난 인력은 황궁으로 모두 차출되었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에스로타는 당황하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말고삐를 쥐고는 황궁을 향해 전진했다.
‘고작 수도를 넘은 것뿐이다. 방심해서는 안 돼.’
국본을 수호하는 황궁은 다를 테니.
그렇게 전투 태세를 갖추며 도착한 황궁에는, 오히려 황궁 앞을 지키는 경비병은커녕 성루를 지키는 병사마저 서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에스로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을 때였다.
끼이익.
굳건히 닫혀 있던 황궁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연 자들은 드레인의 기사들이었다. 에리카의 직속 하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지하 감옥에 있어야 할 자들이기도 했다.
“베이센 공작 각하.”
에스로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에스로타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던 하인이 아닌, 에리카의 다른 하인이 성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포카가 깊게 허리를 숙여 에스로타에게 인사했다.
“우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의문점이 많으실 텐데, 그건 제 주군께서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주군께로 모시겠습니다.”
다시 허리를 곧게 편 포카가 먼저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포카를 바라보던 에스로타는 일단 기사단을 끌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 안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적막 사이로 베이센 기사단의 말발굽 소리만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곁눈질로 황궁 곳곳을 확인하던 에스로타는 이내 제 휘하의 기사단장들을 불렀다.
“카리넨 경, 미리벨 경.”
“예, 공작 각하.”
제 주군의 부름에 베이센의 제1기사단장과 제2기사단장이 대답했다.
에스로타는 포카의 걸음 속도에 맞춰 느리게 말을 몰면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카리넨 경, 그대는 제1기사단을 이끌고 황궁의 우편을 살핀 뒤 내게 보고하라. 미리벨 경, 그대는 제2기사단을 이끌고 황궁의 좌편을 살핀 후 내게 보고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동시에 대답한 두 사람은 각자의 기사단을 이끌고 황궁의 우편과 좌편으로 향했다.
포카가 에스로타와 그 뒤를 따르는 베이센의 제3기사단을 데려간 곳은 카델리아 정궁이었다.
카델리아 정궁은 평소 큰 예식을 거행하거나 국사에 관한 안건 회의를 하는 등 공적인 일을 할 때 주로 사용되는 궁으로, 황궁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포카는 그중에서도 카델리아 정궁의 중심인 정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에리카께서 정전에 계시다고……?’
말에서 내린 에스로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포카를 따라갔다.
내전 수습과 아이테와의 전쟁으로 인해 바빠야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황궁, 황궁의 정문을 열어 준 드레인 가문의 기사들, 그리고 정전에 있다는 에리카까지.
내면에서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던 의문은, 정전의 문이 열리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 에스로타.”
장엄한 정전 안, 가장 상석에 위치한 황좌에 에리카가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그녀가 에스로타와 눈이 마주치고 화사하게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