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비교적 도망치기 쉬운 창가 쪽으로 몇 걸음 옮긴 나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피엔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제 느꼈던 오싹한 불쾌감 때문에 본능적으로 취한 태도였다.
“잘 잤어요, 에리카?”
사피엔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웃음에서는 어제 느꼈던 묘한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반쯤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생긋 웃었다.
“잘 잤으면 이상하지.”
실제로, 나는 어제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저런, 아무래도 낯선 잠자리라 그랬나 봐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괜찮아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피엔이 환한 낯짝으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이 있던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지금 처음 깨달았다.
내 주먹이 부르르 떨며 우는 사이, 사피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리카, 저랑 꽃구경할래요? 리사벨 정원에 수국이 예쁘게 피었는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자, 그가 다시금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잘 자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싫다면?”
나는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피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잖아요. 이 정도면 꽤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
대놓고 나를 감금하고 있다는 저 뻔뻔한 말에, 내 주먹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냥 정원까지는 나가게 해 줘. 정원도 황후궁이잖아.”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나가게 해 드릴게요. 그때까지만 조금 참아요.”
사피엔이 해사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말했다.
마치 전쟁만 끝나면 나는 영영 세이룬을 만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듯한 저 말에, 문득 심기가 상해서 입꼬리가 비틀렸다.
“자신만만하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지?”
“저한텐 명분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있잖아요.”
사피엔이 당연한 것을 말하듯 속삭였다.
전쟁에 져서 목숨을 잃게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기고 와도 온갖 더러운 술수를 동원해서 세이룬을 제거할 속셈임이 훤히 읽혔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대는 지쳐 있을 테니, 여기에 날조한 명분만 첨가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 같은데.’
뭔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수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말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서 한심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표정을 가렸다. 아직 사피엔의 경계를 사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당신,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거 아니야? 내전이 끝나자마자 전쟁이 터졌잖아.”
“에리카가 황후궁에 있는데 내가 잠이 올 리 없잖아요. 그래서 밤새도록 집무를 봤는데, 그 덕분에 지금 잠깐 짬이 났어요.”
에리카랑 같이 꽃구경할 짬. 그가 즐겁게 덧붙였다.
“안 가겠다고 하면, 계속 여기 있을 거지?”
“네.”
“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뒤, 사피엔을 노려보았다.
“안 나가고 뭐 해? 앞장서야 할 거 아니야.”
활짝 웃은 사피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피엔의 뒤를 따르며, 오늘만 1,100번가량 떠올렸던 공화국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 * *
사피엔의 말대로, 황후궁의 리사벨 정원에는 각양각색의 수국이 휘황하게 피어 있었다.
수국은 정말 예뻤지만, 옆에 있는 미친놈 때문에 기분 전환은커녕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만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사피엔은 정원 한가운데 있는 새하얀 돔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여기가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에요. 여름의 햇볕은 따가우니 그늘에서 구경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래…….”
나는 흐린 시선을 저 멀리 던지며 중얼거렸다.
황후궁 침실 창문도 명당이었어, 미친놈아.
“에리카, 그거 알아요?”
어디선가 불어온 여름 바람에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다듬던 사피엔이 문득 물어왔다.
“아니.”
안 궁금하지만 애써 시선을 던져 주자, 내 시선을 받고 좋다고 활짝 웃은 사피엔이 이어 말했다.
“원래 수국은 향이 없어요.”
“아, 그렇구나.”
몰랐던 사실이지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면 사피엔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듯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폐황후는 황후가 된 첫날 리사벨 정원에 수국을 심었대요. 수국의 꽃이 크고 화려하니 자신의 우아함을 나타내는 데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런데 막상 꽃이 개화하고 보니 향기가 없는 거예요.”
“…….”
“향기 없는 꽃이라니, 상징을 좋아하는 그네들에게는 완전 망신이잖아요. 하지만 정원을 다시 갈아엎는 건 폐황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저렇게 길 따라 높은 대를 세워서 향수국을 올려놓은 것으로 수습했대요. 제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예요.”
어머니?
사피엔의 입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사피엔을 쳐다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사피엔이 눈을 휘어 웃었다.
“제 어머니는 황후궁의 하인이었거든요. 정원사였어요.”
“아…….”
신아는 나한테 평민 출신의 하인이라고만 말해 줬었는데, 황후궁 정원사였구나.
갑자기 부모 얘기가 나오자 뭔가 어색해졌다. 내가 주춤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어색한 내 기색을 눈치챈 사피엔이 능숙하게 화제를 바꿨다.
“저 조그만 향수국의 이름은 ‘스위치 오필리아’라고 해요. ‘수국’ 정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폐황후가 억만금을 사용하여 품종 개량을 한 끝에 탄생한 목수국이죠.”
그것을 시작으로, 사피엔은 정원에 있는 수국의 품종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무료하게 그것을 듣고 있으려니, 어느덧 설명을 모두 마친 사피엔이 낯간지러운 듯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저는 꽃을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도 꽃을 한가득 안고 있더니, 저렇게 꽃에 대해 줄줄 꿰고 있을 줄이야. 꽃을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사피엔이 입을 열었다.
“에리카는 뭘 좋아해요?”
그 질문에, 반사적으로 ‘세이룬’이 나올 뻔했다.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안 돼, 이렇게 대놓고 저놈의 심기를 긁을 수는 없어.’
에스로타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변수는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나는 세이룬 말고 다른 좋아하는 것을 떠올렸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음악’인데, 저 미친놈에게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약점을 쥐여 주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대충 거짓말은 아니면서, 사피엔은 알아듣지 못하는 걸 입에 담았다.
“인터넷.”
“네?”
예상대로 사피엔은 그게 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어제부터 계속 저 궁에 갇혀 있었잖아. 너무너무 심심한데 할 게 없으니까, 문득 인터넷 생각이 나더라고. 할 일 없을 때 보는 고양이 영상이 최고거든.”
갑자기 너튜브의 마성의 알고리즘이 진심으로 그리워졌다.
나는 그것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나 내 최애도 좋아해. 직업은 배우인데,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연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고, 울기도 잘 울고, 토끼 같아서 엄청 좋아했어.”
추억을 회상하듯, 나는 아련하게 눈을 떴다.
“팬 사인회 한다고 하면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고. 드라마에 나온다고 하면 길게 볼 수 있다고 기뻐했고. 영화가 개봉하면 신아랑 같이 영화도 보러 갔는데.”
말하다 보니 추억 돋는다.
잠시 그리운 그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는데, 어쩐지 얼굴이 굳은 사피엔이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 말, 대공에게도 했어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가 최애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한참 동안 시무룩했던 샤샤가 떠올랐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했어.”
“대공이 가만히 두고 보던가요?”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지.”
나는 눈을 흐리게 떴다.
축 처진 채 어찌나 침울해하던지, 우리 질투쟁이 샤샤를 달래 주느라 한동안 곤욕을 치렀더랬다.
내 대답에, 어쩐지 얼굴을 한층 누그러뜨린 사피엔이 이내 스르륵 쓰러지듯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뉘었다.
어제 사피엔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출 때 느낀 적 있는, 오싹하면서도 불쾌한 소름이 온몸에 끼쳐 왔다.
기겁을 하며 당장 떨쳐 내려는데, 순간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 지금 정말 행복해요.”
“…….”
“내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나는 곧장 사피엔을 거칠게 밀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피엔은 아무 저항도 없이 밀리는 대로 밀려났다.
눈 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쓸어넘기며,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말했다.
“근데 이건 알아 둬. 당신 행복은 남의 행복을 갉아먹으면서 만들어졌다는 걸.”
그건 결코, 정상적인 행복이 아니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사피엔의 머리가 닿았던 다리에서부터 마치 벌레가 기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오한이 번져 갔다. 나는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나는 사피엔의 무례한 감금에도 애써 인내하며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사피엔이 나를 자극한 걸 관대하게 참고 넘어가 줬다.
그런데 방금, 사피엔은 또 나를 자극했다.
―내가 이 이상으로 참아 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비전하,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어제 심부름으로 대공저의 모습을 그려왔던 사용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손을 저어 사용인을 쫓아낸 뒤, 어제 레비나가 들어왔던 창가로 걸어갔다.
레비나가 올 때까지 창가에 서서 기다리려는 심산이었는데, 공작령이 생각보다 가까웠던 것인지 이미 도착해 있던 토끼 상태의 레비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문을 열자, 레비나가 잽싸게 벽을 타고 올라와 창틀에 앉았다.
나는 손을 뻗어 레비나의 옅은 분홍빛 털을 쓰다듬었다.
“베이센 공작은?”
“오늘 저녁 9시쯤에, 병력과 함께 도착할 예정이에요……!”
레비나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9시면 늦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레비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지하 감옥으로 가서 제5기사단과 포카에게 전해. 감옥에서 나와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네, 비전하……!”
고개를 끄덕인 레비나가 창틀에서 뛰어내려 풀숲에 착지한 뒤 깡총깡총 뛰어갔다.
멀어져 가는 분홍빛 털 뭉치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느른하게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에스로타는 분명 이해해 줄 거야. 그렇지?”
나를 위해 스스로 구교를 떠나 영지에 은거하기를 결정했던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