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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39)

125화

“네, 비전하. 맡겨만 주세요……!”

레비나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는 이것으로 족했다. 이대로 레비나를 보내려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지시를 덧붙였다.

“참, 앞선 두 가지 지시를 모두 마치면 사피엔에게 붙였던 비밀 호위와도 접촉해 봐. 보고를 못 받은 지가 꽤 오래됐네.”

“네, 비전하……!”

힘껏 고개를 끄덕인 레비나가 작은 토끼로 변한 뒤 곧장 창틀 위로 올라섰다.

뛰어내릴 듯 말 듯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비전하께서는 계속 이곳에 머무르실 건가요……? 이곳이 싫으시면, 제가 황궁 밖으로 데려가 드릴 수 있는데…….”

너무나도 혹하는 제의였지만,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곳에 있을게.”

최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려면, 나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내 거절이 시무룩한 듯 토끼 귀를 축 늘어뜨린 레비나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토도독, 작은 토끼가 전광석화처럼 수풀 사이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나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곧장 몸을 돌려서 욕실로 들어갔다.

사람의 죽음에 머뭇거리는 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이어도 충분했다.

재빨리 샤워를 마친 나는 새로운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아까 입고 있던 드레스에 기사의 피를 묻혔다. 그러고는 피 묻은 드레스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대충 버린 뒤 설렁줄을 당겼다.

신경질적으로 설렁줄을 당기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 한 명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비전하!”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기며 방 한쪽에 있는 기사의 시신을 가리켰다.

“이거, 치워.”

“네, 네……?”

“치우라고. 다시 말해야 해?”

싸늘하게 일갈하자, 왠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호위 기사가 흠칫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네, 넵! 바로 치우겠습니― 히익!”

그제야 시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 그는 주춤거리며 그것을 끌고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 몇 명이 달려와서 방에 묻은 핏자국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 가만히 서서 핏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후궁 침실에서 시신을 치웠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 분명한 사피엔이 황후궁으로 쳐들어왔다.

“에리카―”

황제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막 청소를 끝낸 사용인들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침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던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기분 나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사피엔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속히 꺼져 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요, 황제님아?”

“……기사가, 죽었다고 해서요.”

어쩐지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한 사피엔이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동자가 방금까지 사용인들이 청소했던 곳에 닿았다가, 그 옆에 떨어져 있는 피 묻은 장검에 닿았다가, 피가 묻은 채 바닥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실내용 드레스에 닿았다가, 곧 내 시중을 들던 사용인 넷이 방 안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대략 사태를 파악한 듯한 사피엔이 다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죽은 저 기사, 제가 에리카에게 호위로 붙여 놓은 자인 것 같은데.”

“…….”

“에리카가 죽였나요?”

정말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죽였나요?”

웃음을 머금은 사피엔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마 자신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자가 감히 나를 천민 아비를 가진 구박데기라며 비웃잖아. 너무 화가 나서 죽여 버렸어.”

“저자가 감히 그랬나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나는 사피엔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마찬가지로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피엔이 이내 다시금 사르르 웃었다.

“감히 에리카를 모욕한 저자는 목을 잘라 황구 앞 광장에 효수해야겠네요.”

나를 떠보는 말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동요한다면, 분명 사피엔은 내 말을 거짓이라 생각하겠지.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그런 요란한 처형을 집행한다고?”

“하지만, 감히 에리카를 모욕했잖아요.”

“지금은 아이테와 전쟁 중이야. 황궁에서 시체 하나 나오는 건 별거 아니라 치부되지만, 요란한 처형이면 또 말이 다르지. 댁은 그냥 내가 친 사고의 뒷수습이나 잘해. 그러라고 황위에 앉힌 거니까.”

알겠으면 빨리 꺼져 주고. 대충 덧붙인 내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걸음을 옮기려는 내 팔을 사피엔이 붙잡았다.

“미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곧장 사피엔의 손을 뿌리쳤다.

다행히도 힘을 주지는 않았는지,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사납게 사피엔을 노려봤다.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피엔이 천천히 나에게로 시선을 맞추며 슬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묘한 이질감이 드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왠지 소름이 돋아서 한 걸음 뒷걸음질 치는데, 정확히 그만큼 내게로 다가온 사피엔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 한 줌을 손에 쥐었다.

“모욕한 자를 죽인 건 잘하셨어요.”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순간 불쾌감에 소름이 오싹 돋은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탁 하고 쳐냈지만, 오히려 손이 붙잡히고 말았다.

힘을 줘서 뼈마디가 불거진 내 손등 위로 입을 맞춘 사피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감히 에리카를 욕보인 저자를 죽인 것은 잘했는데.”

“…….”

“저를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젖었잖아요, 머리칼. 그렇게 속삭이듯 덧붙인 사피엔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너야말로, 나를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아.”

나는 아무도 없는 문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사피엔의 입술이 닿은 손등을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

빨간 핏방울이 맺힐 때까지.

* * *

“뭐? 세이룬이 출전한 틈을 타서 새 황제가 제수씨를 황궁에 감금했다고?”

소파에 누워서 서류를 팔락거리던 체사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레비나를 돌아봤다.

레비나는 살얼음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망할 잡것이 감히 우리 사랑스러운 대공비 전하를 황후궁에 억류하고 있어요. 그와 관련하여 비전하께서 체사 님께 요청드릴 것이 있어,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이어 레비나가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진지한 얼굴로 레비나의 말을 듣던 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로 세이룬에게 전달하도록 할게. 너는 빨리 베이센 공작령으로 가 봐.”

“알겠습니다, 체사 님.”

용건을 마친 레비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밤중이었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꽃사슴 같은 대공비 전하께서 쳐 죽여도 모자를 잡것의 손아귀 아래 스트레스받고 계실 것만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곧장 녹셰를 나온 레비나는 밤새도록 달려서 베이센 공작령에 도착했다.

레비나가 공작성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는, 동이 막 터올 즈음이었다.

에스로타는 본인의 침실에서 막 조식을 끝낸 참이었다. 하인이 식기를 모두 정리한 후 밖으로 나가자마자, 레비나는 창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 각하.”

레비나는 곧장 에스로타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놀란 에스로타는 곧장 손을 뻗어 설렁줄을 움켜쥐었다가, 곧 레비나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넌…… 에리카의 직속 하인이 아니냐?”

“맞습니다, 각하. 비전하의 명으로 급하게 요청드릴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차후 제게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을 테니, 지금은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레비나가 간절히 말했다.

입술을 깨문 에스로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 말해 보거라. 에리카께서 내게 어떤 요청을 하신다는 거지? 내전은 이미 끝났으니, 아이테와의 전쟁 건인가?”

레비나가 고개를 저었다.

“현재 비전하께서는 황제의 계략으로 인해 황후궁에 갇혀 계십니다.”

“……뭐?”

에스로타의 얼굴이 굳었다.

레비나는 이어 에스로타에게 에리카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레비나의 말을 듣고 있던 에스로타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께서 내게 요청하는 것은, 황궁을 칠 병력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밀다!”

에스로타의 외침에, 밖에서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에스로타는 곧장 밀다라는 이름의 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당장 가서 세레스를 데려와. 최대한 빨리.”

“예, 공작 각하.”

하인이 재빨리 사라졌다.

에스로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사피엔 황제…… 드레인이 없었으면 황위에도 앉지 못했을 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아?’

자신은 뵐 낯이 없어서 감히 찾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분을, 감히 가둬 놓다니―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게 타올라서, 에스로타는 에리카의 하인이 어떻게 공작성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공작의 침실에 잠입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레스가 도착했고, 그와 의논을 나눈 결과 병력은 당일 정오에 출병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정오에 출병한다면, 기사단의 이동 속도를 계산했을 때 황궁에 도착할 시간은 대략 9시간 후인 오후 9시 즈음일 겁니다.”

세레스가 말했다.

그 말을 기억한 레비나는 에스로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수도로 출발했다.

* * *

내가 황후궁에 감금된 지 2일 차 되는 날, 늦은 오전.

아침을 먹은 다음, 어제 심부름으로 사 오라 했던 세사르의 세작으로 냉 녹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비전하,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통보와 함께 내 허락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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