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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139)

124화

사피엔이 나를 데려간 곳은 황후궁이었다.

어제 밤새도록 청소하고 실내 장식을 새로 했는지, 황후궁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앞으로 에리카는 여기에서 지내면 돼요.”

활짝 웃은 사피엔이 내게 황후궁의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빈정거렸다.

“내가 즉위시킨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배려심이 있으시군요. 나더러 지금, 나한테 레틸기스 즙을 먹인 자가 지냈던 궁에서 지내라고 하는 건가?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나네?”

“하지만…… 에리카는 저와 같은 침실을 사용하는 건 더 싫어할 거잖아요…….”

사피엔이 시무룩한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 가엾은 연기를 보자, 나는 순간 살심이 울컥 치밀어 올라 주먹을 쥐었다.

이성적으로는 저 거지 같은 장단에 맞춰 주는 게 장기적으로 이롭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당장 저 새끼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생각보다 나는 꽤 감정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지.

나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쌍욕을 되삼킨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맞아, 정확히 봤네. 그딴 곳보다야 차라리 이곳이 천 배는 낫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득키득 웃은 사피엔이 이어 복도 한쪽에 일자로 서 있는 사용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내전이 일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시녀와 시종은 선발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당분간 에리카의 시중을 들 임시 사용인들이에요. 호위 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인 출신이지만,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그래, 알겠으니 이만 꺼져 줄래?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은데.”

대충 손을 휘휘 저은 나는 빙글 몸을 돌려서 침실 문을 열었다.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뒤에서, 문득 사피엔이 뻔뻔하게 물어왔다.

“저, 귀엽다고는 안 해 주시나요?”

“…….”

오늘 저 개자식은 나를 고혈압으로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눈을 깊게 감았다 뜬 나는 천천히 사피엔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따위 사회생활용 빈말은 이제 안 하기로 다짐해서 말이야. 사회생활용 빈말에 의미 부여하는 미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더라고.”

“…….”

“대답도 들었으니까 이만 조속히 꺼져 주길 바라. 내 안에 있는 혁명의 피가 지금 용솟음치고 있어서, 댁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 사피엔은 내 말이 웃긴지 다시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의 손에 죽지 않으려면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그럼 에리카, 잘 자고 내일 봐요.”

“댁은 악몽 꾸고.”

답하듯 사르르 웃은 사피엔이 이내 몸을 돌려 황후궁을 나섰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나는, 사피엔이 완전히 궁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친 뒤, 나는 대충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곧 테이블 위로 간단한 다과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앞에 놓인 꿀 냉차를 들어 올린 나는 근처에 시립해 있던 사용인 4명과 한 명의 호위 기사 중에서 사용인 한 명을 지목했다.

“거기 너.”

“네, 비전하.”

주근깨가 있는 사용인이 내 부름에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나 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죄송하지만, 불가능하십니다.”

사용인이 대답했다.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나는 크림이 들어간 에클레어를 집어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나갈 수 있어?”

“가능은, 합니다만…….”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클레어 하나를 먹어 치웠다.

“그럼 됐어. 너 지금 궁 밖으로 나가서 내 집 모습 그려 와.”

“네, 네……?”

“귀먹었어? 나 지금 피곤해 죽겠는데, 굳이 한 번 더 말해야겠니?”

에클레어를 하나 더 집어 들던 내가 미간을 구기며 사용인을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하면서도, 사용인은 이내 명령을 받들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 나는 남은 3명의 사용인 중 곱슬머리 사용인을 지목했다.

“너, 이리 와 봐.”

“네, 비전하.”

이번에 지목당한 사용인은 조금 긴장한 모양새였다. 이 성질 나빠 보이는 대공비가 대체 무슨 명령을 내릴까 걱정하는 모양이지.

나는 에클레어를 하나 더 먹으면서 명령했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 하나씩 가져와. 펜도.”

“네, 비전하.”

아까 그 사용인처럼 자신도 궁 밖으로 나가야 하는 줄 알았던 사용인이 눈에 띄게 안도하며 내가 가져오라 한 것들을 가져왔다.

나는 그녀에게서 펜을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다들 뒤 돌아.”

“네, 비전하.”

정중히 답한 사용인들과 호위 기사가 모두 뒤를 돌았다.

그 틈에 나는 펜으로 편지지에 “절대로 알려 주지 마”라고 적은 다음, 편지지를 잘 접어 편지 봉투에 넣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봐도 돼.”

사용인들이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아까 내 심부름을 했던 곱슬머리 사용인에게 편지 봉투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건 네가 내 사용인임을 보증하는 증명서야. 지금 당장 켈타카 은행으로 가서 내 계좌 잔고와 계좌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해 오도록 해. 비전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 곧장 은행장한테 안내될 테니까 은행장한테 물어보면 돼. 아, 이 증명서 봉투는 절대로 열어 보지 말고.”

“……명령 받들겠습니다, 비전하.”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 사용인이 터덜터덜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나의 시선이 이제 두 명 남은 사용인에게 닿았다.

“거기, 너네 둘.”

“……네, 비전하.”

내게 지목당한 사용인들이 침울해지려는 표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나는 둘 중 왼쪽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는 아까 켈타카 은행으로 간 걔 뒤를 쫓아가. 걔를 잘 감시하고 있다가, 혹시 수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싶으면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

“네, 비전하.”

이번에는 오른쪽을 지목했다.

“너는 세사르로 가서 세작을 한 병 사 와. 지금 나는 돈이 없어서 못 주니까, 황제 시종장을 찾아가서 세사르의 세작 한 병 사 올 돈 달라고 하면 돼. 반드시 세사르에서 파는 세작을 사 와야 해. 다른 곳에서 사 오면 다시 사 오라고 할 거야.”

“네, 비전하.”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 사용인들이 울적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갔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나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호위 기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너.”

“죄송하지만 비전하. 황제 폐하께서 명하시길, 호위 기사는 언제나 비전하의 곁을 지키며 한시도 떨어져 있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호위 기사가 선수 쳐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구나,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뭐. 난 최선을 다했고, 너에게 유감은 없어.”

“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기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자, 옅은 분홍색 몸통을 가진 자그마한 토끼 한 마리가 초록색 수풀 사이에서 폴짝거리고 있었다. 지금쯤 되면 나를 찾아올 수 있을 거란 내 예상이 적중했다.

‘미리 준비해 두기를 잘했어.’

나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어차피 이 침실은 3층이라, 아무도 내가 창문으로 탈출할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여기서 뛰어내려 봤자 다리가 부러질 텐데, 그 꼴로 어떻게 도망갈 수 있을까.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토끼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토끼는 즉시 벽을 타고 올라와 내가 미리 열어 놓은 창문을 넘었다. 그와 동시에, 작고 앙증맞은 토끼의 몸집이 빛으로 뒤덮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형의 모습으로 변했다.

“무, 뭐…… 이게 뭔……?”

레비나의 변신(?)을 목격한 기사가 동공을 흔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발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검에 손을 대기도 전에 먼저 그 검을 뽑은 레비나에 의해 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검을 던진 레비나가 자신의 뺨에 튄 핏자국을 손등으로 대충 닦은 뒤 재빠르게 나를 돌아보았다.

“비전하…… 괜찮으신가요……?”

레비나가 붉은 눈동자 가득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레비나의 뺨에 번진 엷은 핏자국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응, 나는 괜찮아. 제5기사단과 포카는?”

“일단 지하 감옥에서 비전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요. 참, 레이븐만 따로 까마귀로 변해서 비전하 곁을 지키고 있구요……!”

“좋아. 혹시 대공저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

“황제가 여자 하나와 기사단 하나로 구성된 무리를 저택으로 보냈어요……. 아마 그들이 저택을 점령해서 비전하와 제5기사단 행세를 할 듯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족의 능력이 외부로 드러나는 일은 최대한 없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다.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곧장 레비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레비나, 일단 체사 씨에게 가서 세이룬에게 지금 이 상황을 전해 달라고 요청해. 전투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서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 다음에는 바로 베이센 공작을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세이룬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은 단순히 상황을 공유하는 것일 뿐, 도움을 청할 목적은 아니었다.

무슨 위화도 회군도 아니고, 전쟁이 발발한 와중에 수도로 군대를 돌리는 것은 그냥 반역 그 자체였으니까.

‘지금까지 똥 안 치우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똥을 대량 생산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에스로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비록 드레인 대공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베이센 공작 가문은 이렌텔의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폐 유통 규제 등과 같은 황가의 장난질에도 가장 영향을 받지 않을 가문이기도 했고, 영지가 수도 바로 옆이기도 했다.

‘신교파 가문은 사업 때문에 황가의 장난질로 발목 잡힐 수 있고, 바네사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는 신교의 성기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물론 에스로타가 내 요청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나에게 유독 친절했던 그간의 행적을 돌이켜 보면 요청을 외면할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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