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하지만 세이룬은 고개를 저었다.
“제5기사단에게 에리카의 호위를 명하겠습니다.”
나직이 속삭인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 나를 한 번 휘감다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마도 해인이겠지.
“용의 결계입니다. 그대에게 해를 가하는 어떠한 위협도 모두 반사할 겁니다. 효력은 일주일 동안 지속될 거예요.”
담담히 설명한 그가 덧붙였다.
“그 안에 다녀오겠습니다.”
“……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끝으로, 세이룬은 곧장 몸을 돌려 황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라인과 함께 그대로 황궁을 벗어났다.
나는 점점 작아져 가는 세이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킬리언이 내게 물었다.
이제 귀족들은 대공께서 출정하셨으니 한시름 덜었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뇨.”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때, 귀족들 틈에서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던 라리엘이 내게로 걸어왔다.
“비전하.”
“안녕하세요, 라리엘.”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라리엘을 향해 인사했다.
라리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비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비전하를 저희 저택에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미안하지만, 에센테르 후작. 대공비는 짐과 선약이 있어서요.”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굳은 얼굴을 애써 펴 보이려는 것처럼 표정을 꾸며 낸 사피엔이 은근슬쩍 나와 라리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대공 부부와 제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거든요. 물론, 대공은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습니까, 폐하.”
황제가 그렇다는데, 감히 일개 후작이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라리엘은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사피엔의 등 뒤에서 옆으로 비켜서며 라리엘에게 말했다.
“라리엘의 제의는 고맙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번 초대는 꼭 응하도록 할게요.”
“그럼 저는 다음 기회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라리엘이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와 라리엘의 대화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피엔이 나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대공비, 우리는 이만 안으로 들어갈까요?”
“……네, 폐하.”
나는 내키지 않은 손을 움직여 사피엔의 손 위에 얹었다.
내전이 끝난 바로 다음 날,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드레인 가문과 황제의 불화를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만찬은 분명, 대공비의 입맛에 맞을 거예요.”
웃으며 그렇게 말한 사피엔이 가볍게 내 손을 쥐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 * *
만찬 장소는 황제궁에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나는 사피엔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비어 버린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사피엔이 고개를 들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와 손잡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제 남편이 제게 드레인의 제5기사단을 호위로 남겼습니다.”
나는 사피엔의 개소리를 무시한 채 곧장 내 용건을 꺼냈다.
“전쟁 때문에 제가 많이 두렵고 불안하니, 무장한 그들을 제 시야에 두고 만찬을 즐겼으면 합니다.”
내 요구에, 의중을 알 수 없는 금안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황궁 내, 그것도 황제가 기거하는 황제궁에 무장 병력을 들이는 것은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자 법령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가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어책이야.’
사피엔이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나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이유로 곧장 퇴궁하면 되고, 수락한다면 제5기사단을 내 시야에 닿는 곳에 두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사피엔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대공비. 그걸로 대공비의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요.”
“……배려에 감사를.”
저 순순한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짧게 인사한 나는 내 사용인 자격으로 입궁한 포카를 불러 제5기사단을 이곳으로 불러오라 지시했다.
포카가 떠난 후, 나는 사피엔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처음부터 두 사람 몫의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쥔 나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제5기사단은 메인 음식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도착했다.
무장 기사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하는 식사가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도, 사피엔은 연신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사피엔이 걸어오는 말의 내용은, 일전에 말했던 대로 국정에 관한 논의가 전부였다.
메인 식사를 마치고, 나는 디저트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반대편에 앉은 사피엔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이길래 저렇게 태평한 건지.
‘정말 세이룬의 말대로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나…….’
섬뜩한 생각을 하며 사피엔의 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사피엔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생긋 웃음 지었다.
“음식은 입맛에 맞았나요, 대공비?”
“……맛있었습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다행이에요. 대공비와의 논의가 저한테 큰 도움이 돼서, 대공비도 제가 대접한 음식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말한 사피엔이 오른손을 살짝 까딱였다.
그 신호를 확인한 시종장이 바깥을 향해 큰 소리로 들어오라 외쳤다.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더니, 무장한 황실 기사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제5기사단을 향해 검을 겨눴다.
황실 기사들의 위협에 대응한 제5기사단도 그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살벌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찻잔을 내려놓은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폐하.”
“이렌텔 제국을 드릴게요. 드레인 대공보다 제가 더 귀여워질게요.”
그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에 나는 왈칵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뭐?”
“그러니 저와 재혼해 주세요.”
내 뒤편에 가만히 서 있던 포카와 레비나마저 품속에서 슬쩍 단검을 꺼내 들었다.
부서져라 찻잔을 움켜쥔 나는 사피엔의 두 눈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읊조렸다.
“X발, 지랄하지 마.”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자의로 와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가두는 수밖에.”
상체를 기울여 식탁 위로 팔을 올린 사피엔이 슬쩍 턱을 괴며 제5기사단의 기사들을 눈짓했다.
“괜한 데 힘 빼지 마요. 어차피 에리카는 저를 죽이지 못하잖아요.”
“…….”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 죽였겠죠. 하지만 이렇게 살려 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너,”
“에리카, 잘 생각해야죠. 대관식 날 황궁에서 황가와 드레인 가문이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고 하면 백성들의 동요가 커지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내전 때문에 혼란해 죽겠는데.”
나는 이를 으득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5기사단에게 저 개자식의 목을 베서 나한테 바치라 명령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달아오른 머리를 차게 식히며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사피엔의 말은 틀리지 않아. 지금 당장 여기서 드레인과 황가가 충돌하면 곤란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선택지는 가장 최후로 남겨 둬야 했다.
당장 시간이 없는 게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사피엔의 말에 최대한 따라 주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검, 내려.”
내가 명령했다.
제5기사단과 포카, 레비나는 끝까지 상대를 노려보면서도, 내 명에 따라 검을 집어넣었다.
그들이 검을 내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사하게 웃은 사피엔이 황실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황제의 면전에 대고 검을 빼든 자들이다. 당장 지하 감옥에 처넣어.”
“예, 폐하.”
존명의 예를 표한 기사들이 제5기사단과 포카, 레비나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무장 해제시킨 다음 포박했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는 내 사람들을 등진 채, 나는 치밀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포카와 레비나는 제 직속 하인입니다, 폐하. 전 그들의 시중을 받고 싶어요.”
“하지만 에리카, 저들은 제게 검을 겨눈 자들이에요. 감히 황제에게 검을 겨누는 몰상식한 자들을 에리카의 곁에 둘 수 없어요.”
“고양이는 쥐를 사냥할 때 궁지로 몰지 않죠.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사피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이 경고했다.
사피엔은 재밌다는 듯 금안을 곱게 접더니, 나긋하게 답했다.
“저도 쥐를 궁지에 몰고 싶지는 않은데, 어쩐지 이번엔 이상하게도 궁지에 몰지 않으면 제 목에 칼이 들어올 것 같아서요.”
“…….”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어차피 한 차례 내전도 발발한 마당에, 이참에 이렌텔을 아이테처럼 공화국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교양 시간에 배웠던 프랑스 혁명을 천천히 되짚어 보고 있을 때, 사피엔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그래도 역시 궁지에 모는 건 좋지 않으니까, 다른 퇴로를 열어 드릴까 해요.”
내 살벌한 시선이 다시 사피엔을 향했다.
나와 눈을 맞춘 그가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드레인 대공이 사망하기 전에는 에리카를 건드리지 않을게요.”
“……뭐?”
“에리카도 직속 하인들 앞에서 저와 키스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나는 꽉 쥐고 있던 찻잔을 사피엔을 향해 내던졌다.
정확히 사피엔의 머리를 향해 가던 찻잔은, 근처에 있던 황실 기사의 검에 맞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챙그랑,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지금 이 행동, 반드시 후회할 거야.”
내가 씹어뱉듯 말했다.
하지만 사피엔은 하나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황금빛 눈동자를 곱게 접어 웃었다.
“아니, 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전 태어난 이래 가장 자유로운 상태거든요.”
그가 노래하듯 덧붙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