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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39)

122화

카리에 다음으로 칼릭스가 처형되었고, 그다음으로는 폐후 세멜라의 목이 떨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폐제 샤를로스의 목이 떨어질 차례였다.

데구르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반란자들의 수괴인 샤를로스의 목이 굴러떨어졌다.

처형에 필요한 모든 소음이 멎고,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 침묵을 뚫고, 황좌에서 내려온 사피엔이 샤를로스의 머리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금색 눈동자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둔 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제 아버지의 머리를 응시하던 사피엔은 이내 머리를 높게 치켜들고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이것이 반역자의 머리다!”

적요한 공기를 가르고, 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반역자를 징벌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폐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며 내 말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폐하!”

귀족들의 인사가 화이트 홀을 뒤흔들었다.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인 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던 새 황제가 이내 활짝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내가 세운 황제였다. 나는 짧은 목례로 그 웃음에 답했다.

우상은 파괴되었다.

8. 이대로 해피엔딩인 줄 알았는데

처형식에 이어 구교의 교황을 비롯한 구교파 인사들의 처벌까지 모두 끝났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귀족들이 하나둘씩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퇴궁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세이룬과 함께 대공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두 분 전하.”

“세네카 소공작!”

나는 활짝 웃으며 킬리언을 반겼다.

“소공작 덕분에 일 처리가 정말 깔끔해졌어요. 그 누구도 이 처형에 트집을 잡지 못할 거예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킬리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 겸손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소공작께서는 하루 종일 신교의 성전에 계셨다죠. 바네사는 잘 있나요?”

“예. 하지만 아무래도 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바네사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어제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요.”

“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여주와 남주가 드디어 어제 겨우 만나서 밤새도록 일만 했다는 거지……?

‘바네사는 신교 관련 업무를 보고, 킬리언은 오늘 재판을 대비한 법전과 판례를 살펴보고…….’

아아, 안구에 습기가 차려고 해.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큼, 바쁜 친구를 방해할 수야 없죠. 성전에 방문하는 건 잠시 미뤄야겠네요.”

“아닙니다. 비전하께서 방문해 주신다면 바네사는 분명 더 힘이 날 겁니다.”

킬리언이 다소 단정적으로 말했다.

불만스럽다는 듯 볼을 부풀린 세이룬이 내 손을 꽉 쥐었지만, 나는 세이룬의 볼을 두어 번 쓰다듬어 준 후 킬리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네사에게 제가 저택에 들렀다가 곧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 좋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비전하.”

생긋 웃은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황제의 정복을 차려입은 사피엔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까는 그저 불퉁할 뿐이었던 세이룬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세이룬이 그저 가만히 서서 사피엔을 노려보고 있는 동안, 킬리언과 나는 지척으로 다가온 사피엔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드레인 대공비, 에리카 르 드레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세네카 소공작, 킬리언 르 세네카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네, 반가워요.”

마주 인사한 사피엔이 먼저 킬리언에게 말했다.

“오늘 재판장에서 본 소공작의 활약, 정말 인상 깊었어요.”

“과찬이십니다, 폐하.”

“소공작의 공은 높이 사지만, 오늘 대공비는 저와 논의할 것이 있어서요. 교황 성하께 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은데.”

“폐하, 저는 금시초문입니다만.”

나는 단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사피엔의 말을 부정했다.

사피엔의 푸른색 눈썹이 서운한 듯 축 내려갔다.

“저는 이제 막 황제가 된 새내기잖아요. 앞으로 제국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대공과 대공비와 함께 나누고 싶은데, 안 될까요?”

나는 단호하게 얼굴을 굳히고 사피엔을 마주 봤다.

나만이 아닌 세이룬도 함께라는 점에서 사피엔의 진정성은 확인했다지만, 이런 말에 한두 번 넘어가 주다 보면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나나 세이룬을 호출할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 황궁에 볼일이 없게 된 지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진절머리 나는 황궁과 평생토록 손절할 계획이었다.

“그건 안 되겠는―…”

“대공비가 세운 황제잖아요, 저.”

사피엔이 내 거절을 다급하게 끊어 냈다.

“계속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요. 그냥 앞으로 제국을 어떤 방식으로 경영하면 좋을지 의견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저를 황위에 앉힌 건 대공비니, 그대의 의견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싶어서…….”

사피엔이 강아지처럼 금색 눈을 울멍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능구렁이 같은 사피엔이라 뭔가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내 편의를 위해서 그를 황위에 앉힌 거라 이대로 무시해 버리기에는 조금 양심이 찔렸다.

그리고 계속 귀찮게 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지 않았는가.

“……세이룬.”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세이룬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받은 세이룬은 언제 사피엔을 살벌하게 노려봤었냐는 듯 빙긋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저는 에리카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특별히 오늘만 논의해 드릴게요.”

나는 한숨과 함께 사피엔의 청을 승낙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공령으로 내려갈 거니, 이번 한 번쯤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수락에, 사피엔이 눈부시도록 환하게 웃었다.

“정말 감사해요, 대공비! 지금 시간이 저녁때니까, 만찬을 가지면서 대화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흠잡을 때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웃음이었지만, 여전히 묘한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전하.”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라인이 나와 세이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보고했다.

“대공령 내에 있던 아이테 병력이 갑자기 일시에 대공성을 습격했습니다. 동시에 아이테 내에서 치안을 다스리고 있던 주 병력도 국경 아프로스 지대로 집결하고 있고요.”

그 보고를 들은 즉시, 나는 곧장 주변을 살폈다.

호기심 어린 귀족들의 시선이 간간이 이쪽을 흘끗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라인의 보고 내용을 들은 건 아닌 듯했다.

들었다면 분명, 저렇게 태평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굳이 세이룬이 참전할 필요는 없어.’

아이테의 병력은 세이룬이 직접 지휘하지 않더라도 대공가의 기사단과 그 휘하의 병력만으로 충분히 진압 가능했다. 킬리언과 사피엔이라면 전쟁 발발 소식에도 동요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터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세이룬이 곧장 라인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폐하―!”

누군가가 쩌렁쩌렁하게 사피엔을 부르며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센, 무슨 일이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사피엔이 새로 임명된 본인의 시종장을 불렀다.

“허억, 허억…… 폐하…… 큰일, 큰일이 났습니다……!”

사피엔의 지척으로 다가온 시종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종장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일순 싸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피엔은 황자 시절에…… 수족처럼 부리던 하인이 하나 있다고 했었지.’

그리고 사피엔은 황제가 되면서 본인의 시종장 자리에 그 하인을 앉혔다.

그 순간, 마치 벼락이 꽂히듯 나는 사피엔이 파 놓은 함정을 깨달았다.

당황한 내가 얼른 입을 열었을 때였다.

“잠―”

“아이테가―! 이렌텔에 쳐들어왔습니다―!”

내가 미처 단어를 완성시키기도 전에, 제센이 있는 힘껏 크게 외쳤다.

“뭐……?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아이테가 쳐들어왔다고? 설마 지금 전쟁이……?”

예상했던 대로, 시종장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다.

안 그래도 한 차례 내전을 겪으며 불안에 떨었던 그들은, 연달아 이어진 전쟁에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때마침 제센이 한 번 더 크게 소리쳤다.

“아이테 병력의 일부는 이미 대공령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얼굴은 아예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뭐……? 대공령에? 대체 언제?”

“설마, 내전 때문에 대공가의 병력이 수도에 있어서 그런가?”

“그 약은 놈들, 이 틈을 타서 이렌텔을 침략하다니……!”

귀족들의 동요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으득, 입술을 깨문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사피엔을 노려봤다.

“……폐하.”

지금, 사피엔은 아이테의 침략을 이용하여 세이룬을 강제로 전쟁터에 보내려 하고 있었다.

시종장에게 침략 소식을 큰 소리로 알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테니, 적어도 사피엔은 이 침략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

살기 어린 내 목소리에도, 사피엔은 그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이럴, 이럴 생각으로 사절단은 제 건의를 수락한 것이군요. 결국 대공령을 빼앗겠다는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절단을 곱게 돌려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사피엔은 충격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횡설수설했지만, 이미 그의 속셈을 깨달아 버린 나는 그 모습이 그저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다.

귀족들은 이제 대공께서 한시라도 빨리 참전하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사피엔의 의도를 간파한 세이룬이 어마어마한 살기가 담긴 눈으로 사피엔을 노려보다가,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카.”

“……나도, 갈까?”

내가 속삭였다.

물론, 대공령도 침략당한 지금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대공비는 안전한 수도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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