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길을 걷던 도중, 문득 세이룬이 내게 물어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봤다.
“응? 뭐가?”
“에리카가 그토록 고대하던 복수인데, 빠르게 해치워 버리게 되었잖아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발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그들을 곱게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
“하지만, 지금까지 이 복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것들이 희생됐어. 최대한 덜 혼란하게 진행한다고는 했지만, 내전이 벌어진 건데 혼란스럽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런 상황에서 내 사적인 감정만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아.”
고집대로 해 봤자 즐겁지도 않고. 가볍게 덧붙인 내가 생긋 웃으며 세이룬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미 카리에와 셀루리아 후작 부부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상황일걸? 고귀하신 귀족 나리께서 한때 친했던 귀족들이 보는 가운데 목이 댕강 잘릴 예정이잖아. 무려 백성을 상대로 한 반역을 일으켰단 죄목으로 말이야.”
황제의 권위는 오로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국정을 돌보라는 의미로 부여받은 것이나, 황제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신교를 습격하였으므로 이는 곧 백성을 상대로 반역을 일으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킬리언이 그랬다.
황권은 신이 내린 불가침의 권력이라던 구교의 교리가 박살 난 지금, ‘백성을 위한다’는 명목은 황권 유지에 있어서 절대적인 명분이었으므로, 백성을 공격한 황제는 곧 반역을 저지른 셈이었다.
반역은 이렌텔의 형법에 명시된 죄악 중 가장 크고 악질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대중이 보는 가운데서 목을 자르고 그 목을 열흘 간 황궁 앞에 효시하는 형벌로만 다스린다. 자연히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가문과 이름은 그 명성과 긍지가 시궁창에 처박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터였다.
‘역사가 뒤집혀서 판결이 번복되지 않는 한 말이지.’
하지만 세이룬이 셀루리아가 복권되는 걸 그냥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으니, 그건 별로 걱정할 것이 못 됐다.
“절대 선이라 믿었던 그들의 정의는 경전을 번역해서 팩트 폭력으로 박살을 내 줬고, 그토록 지키려 애쓰던 귀족으로서의 존엄과 긍지도 반역죄로 짓밟아 버렸어. 그리고 죽음도 똑같이 되갚아 주니까, 난 그냥 이걸로 만족하려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동안 어느새 황실 지하 감옥의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감옥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잔뜩 군기가 든 채 나와 세이룬에게 예를 올렸다.
아무래도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더욱 긴장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세이룬과 함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감옥 내부는 지하 특성상 습기가 차 공기가 눅눅하고 서늘했다.
간간이 쥐나 여러 벌레도 기어 다니는 터라, 보통 귀족이라면 잠시라도 견디기 어려울 환경이었다.
‘물론 달동네 출신인 나한테는 별거 아니지만.’
황제를 비롯한 고귀하신 분들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려나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계단 더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벌레! 지금 벌레가 이곳으로 들어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지 않으냐! 거기 너! 어서 쫓아내지 못할까!”
“…….”
고문할 것도 없이 그냥 여기에 처박아 두기만 하면 알아서 자멸할 것 같네.
흐린 눈을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문득 옆에서 세이룬이 물어왔다.
“에리카, 시끄러우십니까?”
“응?”
“시끄럽다고 한마디만 해 주시면, 제가 더 이상 시끄럽지 않게 만들 수 있는데.”
그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 미인계에 홀려서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내일 공개 처형 때 모두가 다 볼 텐데 하자가 있으면 안 돼!”
“어차피 죄인이지 않습니까. 혀가 없는 것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내 비위가 신경 쓰인대…….”
나는 슬쩍 세이룬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거론되자 세이룬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가 불쾌하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혹시 모를 담합에 대비하기 위해, 황제를 비롯한 죄인들은 지하 감옥에서도 각자 다른 층, 다른 위치에 배정되었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게는 볼일이 없었던 나는 곧장 셀루리아 후작을 찾았다.
셀루리아 후작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췌한 모습으로 힘없이 이끼 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산발이 된 금발과 엉망이 된 옷차림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반대편만 응시하고 있던 후작은 제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이쪽을 바라봤다.
“……에리카?”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린 후작이 이내 픽 웃었다.
“왜, 내 비참한 꼴을 구경하려고 왔느냐?”
“뭐, 그런 이유도 있고. 물어볼 것도 있고. 겸사겸사.”
나는 팔짱을 낀 채 후작이 갇혀 있는 철장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복도에 걸린 횃불이 일렁이자, 후작에게로 드리운 내 그림자도 같이 일렁였다.
불현듯 어깨를 움츠리는 후작을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에리카’에게 미안하단 감정이 든 적은 없어?”
그렇게 물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 조카잖아.”
“하…… 조카? 어이가 없군.”
조롱하듯 코웃음을 친 후작이 에리카를 노려봤다.
“네가 아무리 헬리아의 딸이라 할지라도, 천민의 피가 섞여 있는 자는 결코 셀루리아로 인정할 수 없다.”
“…….”
“천한 것. 대공비가 되더니, 아주 본인이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고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지.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다니.”
순간적으로 살기를 주체하지 못한 세이룬이 곧장 철장으로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의 팔을 가로막으며 철장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아니, 당신 말은 틀렸어. 난 착각 같은 거 한 적도 없고, 내 주제를 몰랐던 적도 없거든.”
나는 폐인 몰골의 후작을 내려다보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날 때부터 고귀한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네가 뭔데 감히 나의 가치를 논해? 혈통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네까짓 게 감히 뭐라고.”
“뭐, 뭐……?!”
한평생 떠받듦만 받으며 살아오던 후작은 제게로 향한 노골적인 모욕 두 문장에 분노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 한심한 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당신의 생각은 잘 알았어. ……‘에리카’만 불쌍하게 됐네.”
나는 중앙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이룬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후작을 돌아봤지만, 다행히 유혈 사태 없이 나를 따라왔다.
“이, 이렇게 가는 거냐?”
중앙 복도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철장이 철컹이는 소리와 함께 불안정하게 떨리는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철장에 절박하게 매달린 후작이 녹이 슨 철장 사이로 최대한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당장, 당장 나를 풀어라. 네가 감히 반역을 꾀하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감히-!”
후작의 말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에, 따스하고 커다란 두 손이 내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등 쓸데없는 소리이니, 에리카는 듣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이룬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세이룬의 목소리는 잘 들리는데 후작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세이룬이 해인을 사용해서 후작의 목소리를 차단해 준 모양이었다.
“응, 고마워.”
내가 마주 속삭이자, 세이룬이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었다.
* * *
후작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었다.
후작 부인은 끝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으려는 듯 감옥 정중앙에 앉아서 두 눈을 감은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와 세이룬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명상하듯 앉아만 있던 후작 부인은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날 비웃으러 왔느냐?”
그 말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후작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실컷 조롱하고 비웃거라. 패배자에게 조롱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잊지 말거라. 명분이 없으면 사람은 웃음거리가 된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해수이자 드레인 대공비라 할지라도, 너의 본질은 결국 천한 피가 절반이 섞인 반쪽짜리 귀족이란 것이다. 알겠느냐?”
중대한 뭔가라도 알려 주듯이 폼 잡으면서 한다는 말이 고작 ‘너는 절반이 천민이라 온전한 귀족이 아님’ 같은 거라니.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본인 경험담 잘 들었고요.”
“뭐, 뭐라?”
“있어 보이는 척 훈수 두는 거 그만해. 되게 없어 보이고 불쌍해 보이니까.”
쯧쯧거리며 혀를 차는 나를 후작 부인이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 노기 어린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맞다, 그거 알아?”
“…….”
“나 실은, 원래 복수 같은 거 안 하려고 했어.”
내 말에, 일순 후작 부인의 하늘빛 눈동자가 반쯤 커졌다.
나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이어 말했다.
“복수란 거, 생각보다 되게 사람 삶을 피폐하게 만들거든. 그래서 나는 성년이 되면, 해수라는 이름으로 모아 둔 내 돈 챙겨서 셀루리아에서 나가 살려고 했어. 딱 거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는데.”
“…….”
“네 딸이, 내 샤샤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뭐?”
후작 부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래, 이해가 가지 않겠지. 나를 죽이려다가 샤샤를 죽인 건 카리에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후작 부인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내가 정 붙이고 있던 반려동물이 있으면, 죽일 생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