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39)

119화

* * *

황궁이 눈에 띄게 소란스러워졌다.

빗자루를 든 채 아멜리테 별궁의 창문을 내다보던 사피엔이 오,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별궁을 지키던 인력도 데려가네요. 진짜 상황이 급해졌나 보다.”

“……확실히 다급해 보이는군요.”

사피엔의 옆에서 같이 창문으로 바깥 동태를 살피던 아쉴 대령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인 대공을 상대로 이토록 쉽게 쓰러질 황가였는데, 만약 사피엔이 제 손을 잡으라고 제안했을 때 그 제안을 뿌리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 문 쪽에서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벌컥 열렸다.

“대령 각하.”

다급히 들어온 사람은 바로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평소에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던 기품은 어디로 날려 버렸는지, 방 내부도 훑어볼 여유도 없이 곧바로 아쉴 대령에게 다가가 본론을 꺼냈다.

“신교의 성전으로 가셨던 황태자 전하와 연락이 끊겼고, 방금 신교파의 기사단 연합군이 황궁 내부로 침범했습니다. 하여 사태를 타계하고자 하니, 각하께서는 대공령에 잠입시켜 놓았던 병력을 움직여―…”

“아, 쫑알쫑알 말이 많네요.”

시종장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사피엔이 팔짱을 낀 채 시종장을 쳐다봤다.

감히 자신의 말을 끊은 하인의 행태에 시종장이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사이, 사피엔은 더 이상 뒤집어쓰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보라색 가발을 벗어 던졌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푸른색 머리카락과 황가의 금안이 드러났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다듬은 사피엔이 시종장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안녕, 아바마마의 시종장 씨? 나 많이 찾아다녔죠?”

“―다, 당신은……!”

사피엔을 알아본 시종장의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이어 나온 말은 없었지만, 사피엔은 네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에요. 마지막으로 본 게…… 당신이 내 처소에 마지막으로 말레이르 향을 피웠을 때인가?”

“그, 그걸…… 어떻게…….”

시종장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사피엔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내가 8살 때부터 10년간 질리도록 맡아 왔던 거잖아.”

“히익……!”

“날 백치로 만드느라 고생했어요. 비록 실패했지만.”

금세 상냥하게 표정을 바꾼 사피엔이 아쉴 대령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곧장 시종장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아바마마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대가는 죽음으로 치러야죠.”

다시 검을 뽑자, 울컥 피를 토한 시종장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시종장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사피엔은 아쉴 대령에게 검을 돌려준 뒤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이제 정말로 작별 인사를 할 때가 되었네요. 비밀 통로까지 안전히 안내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요.”

“……예, 전하.”

그렇게 대답한 아쉴 대령은 피 묻은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짐과 사람은 미리 챙겨 놨기에 더 준비할 것은 없었다.

아멜리테 별궁을 나선 지 반 시간도 안 되어, 아이테 사절단은 황궁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 * *

“…….”

굉음은 소리만 요란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던 나는 딱 봐도 총알인 무언가가 날아가 떨어졌을 법한 곳을 스윽 훑었다가, 굉음이 들렸던 카델리아 정궁을 한 번 쳐다봤다가, 그곳으로 달려가는 아군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가, 이내 세이룬을 돌아봤다.

“방금 그거, 설마 화승총?”

세이룬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하…… 저게 바로 그 화승총이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로만 듣는 것보다 직접 보니 왜 세이룬이 화승총 대신 각궁을 선택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사정거리고 자시고, 일단 저 자욱한 연기 때문에 눈물 콧물 기침 다 짜지 않았을까.

‘첨탑에서 이거 쐈으면, 음, 좀 쪽팔렸을지도.’

나는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서 어깨에 메여 있는 각궁을 소중하게 안았다.

내가 네 덕분에 이미지 지켰다…….

“대외비로 개발 중이던 화승총을 이렇게 사용하다니…… 참 재밌네요. 유효 사정 거리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뜬 라리엘이 화승총이 있던 건물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화승총을 쏜 건 이목을 끌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목을?”

“네. 가령, 황제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다거나.”

라리엘이 알겠다는 듯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요. 어차피 잡힐 테니 시간 낭비인 것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델리아 정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방금 정궁에서 화승총을 쐈던 자들은 황제의 친위대 소속 기사들로, 우리 측 기사들과 한바탕 칼을 맞대다가 밀리기 시작하자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고 했다.

“황제의 위치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해 대는군.”

라리엘이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나는 우리 뒤쪽에서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로 잠들어 있는 황태자를 흘끗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황태자가 우리 수중에 있다는 말은 했어?”

“예, 비전하. 하지만 동요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태자는 버리는 걸 택한 모양이네.”

아무리 황가가 정 없고 독하기로 유명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친아들을 버리고 도망가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세이룬이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술래잡기는 끝났다. 황궁 내 비밀 통로를 샅샅이 뒤져서 황제 일행을 끌고 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숙여 인사한 기사들이 몸을 돌려 떠났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서 전장을 훑었다.

전장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접어든 상태였다.

기사들을 지휘하는 위치로 돌아간 라인이 항복하라고 크게 외쳤다.

항복 권유는 이후로도 몇 번 더 반복되었고, 아직 남아 있는 황실 기사들의 상태도 썩 좋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꿋꿋하게 검을 휘두를 뿐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다.

그 융통성 없는 모습이 멋있기보다는 뭔가…… 그냥 한숨이 나왔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살려 주고 싶은데, 강제로 못 살려 주게 하네…….”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며 세이룬의 가슴에 등을 기대자, 생긋 웃은 세이룬이 내 손을 가져가 그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전쟁에서 그렇게 상냥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에리카뿐일 겁니다.”

“……하긴, 그건 그래.”

나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내가 등 따숩고 배부른 소리를 했네…….

그렇게 생성된 흑역사에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전장에서 하나둘씩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도, 비밀 통로로 도망치려던 황제 일행을 포박해 온 것도 바로 이때였다.

“저 천한 것이, 감히……!”

황제와 황후, 그리고 셀루리아 후작 부부가 밧줄에 묶인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카리에는 어쩐지 멍한 얼굴이었지만, 뭐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아무튼 분한 얼굴의 그들을 명화 감상하듯 하나하나 천천히 훑어 주고 있는데, 우레처럼 커진 함성을 뒤로하고 내게 다가온 라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그 인사를 시작으로, 대공가의 기사 전원이 동시에 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승전 축하 인사가 마치 황궁을 뒤흔들 듯 울려 퍼졌다.

나를 콕 집어서 축하 인사를 올리는 기사들이 의아했는지 옆에 있던 라리엘이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상황을 대강 눈치챈 듯 피식 웃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아예 한술 더 떠서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라리엘에게 나도 생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라리엘. 고마워, 다들. 모두 그대들 덕분이야.”

“황공합니다, 비전하.”

그렇게 외친 그들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축하 인사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끝난 황궁을 찬찬히 눈에 담는데, 세이룬이 뒤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왔다.

“승리를 축하합니다, 에리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의 축하 인사를 듣고서야, 나는 드디어 내가 복수의 완성을 좌우하는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겼어.”

“네, 에리카.”

“내가, 죽지 않고.”

“네, 에리카.”

“다치지도 않고.”

“네, 에리카.”

“되갚아 줄 수 있게 됐어.”

시나브로,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고양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샤샤를 죽게 만든 원흉인 카리에, 그리고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셀루리아 후작 부부.

샤샤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그들에게 똑같이 죽음을 되갚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복수였다.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 * *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과 셀루리아 후작 부부는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들과 협력했던 구교파 귀족들은 자의가 아니었음이 참작되면서, 영토를 절반 몰수하고 작위를 하나씩 강등하는 것으로 목숨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모두 죄인 신분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적법 황자인 사피엔에게로 향했다.

귀족들은 멍청하다고 알려진 사생아 황자가 나라의 국본이 되는 것을 우려하는 기색이었지만, 사피엔이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오히려 기대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피엔의 황제 대관식과 죄인들의 재판 및 처형식은 바로 내일 약식으로 연달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내전과 황위 교체로 인해 혼란해진 나라를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며칠에 걸쳐 진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몇 시간에 걸친 내전에 대한 수습 회의가 끝나고 나니,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셀루리아 후작 부부와 카리에가 처형되기 전,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보기 위해 세이룬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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