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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39)

118화

그와 동시에, 성전 밖에서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황한 황실 기사단과 구교파 연합군은 서둘러 맞서 싸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숨을 잃거나 무장 해제당하여 무릎을 꿇었다.

날붙이가 서로 맞붙는 소리가 들려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실 기사단과 구교파 연합군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온몸으로 막아 주는 동안, 황태자는 제1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인적이 드문 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황은?”

자리를 옮긴 칼릭스가 허벅지에 꽂힌 화살을 뽑으며 물었다.

상황을 확인하고 온 기사가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점점 역전되어 가는 상황에 이를 악문 칼릭스는 머리를 차게 식히며 상황을 파악했다.

‘옷에 달린 표식을 봤을 때, 지금 여기에 있는 기사단은 전부 대공 휘하의 기사단이야. 총 3개의 기사단에…… 그 복면인들도 기사단이라 가정하면, 대공과 함께 수도로 올라온 4개의 기사단 모두가 이곳에 있어.’

그렇다면, 아직 황궁은 무사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복면인들은 왜 보이지 않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복면인들의 행방에 의문을 품던 칼릭스는 이내 의문을 지운 뒤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기사를 보고 명령했다.

“너는 곧장 이곳을 나가서 황궁에 소식을 전해라. 지원군을 얻을 수 있으면―”

그때,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칼이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의 목을 잘랐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제1기사단이 황급히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곧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제 주위를 둘러싼 피바다 속에서 얼음처럼 굳어 있던 황태자의 목에, 불현듯 새하얀 검날이 드리워졌다.

“이제야 ‘죄인’이란 수식어가 진짜 주인을 찾았네요.”

검날을 황태자의 목에 드리운 바네사가 온화하게 웃었다.

눈처럼 새하얀 정복에 피 한 방울조차 묻지 않은 정갈한 차림새였다.

칼릭스가 이를 으득 갈며 씹어뱉듯 읊조렸다.

“……감히―”

“전하, 신교가 생겨난 이유에 대해 아시나요?”

칼릭스는 대답 없이 그저 바네사를 노려보기만 했다.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바네사는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경전의 말씀과 구교의 교리가 어긋났기 때문이에요.”

“…….”

“교황은 신의 절대적 대리자로서 단 한 점의 오류도 없으니, 교황이 세운 황제는 곧 신께서 세운 것과 같다.”

“…….”

“황제의 절대적 권위는 신께서 주셨으므로, 설령 황제가 폭정을 한다 할지라도 폭군을 살해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신분의 귀천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굴레와 같은 것이니, 각자 맞는 굴레에 순응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다.”

느릿하게 구교의 교리를 읊던 바네사가 슬긋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경전 그 어디에도 이 같은 내용은 존재하지 않죠.”

“…….”

“구교는 경전의 번역을 금기시해 왔죠. 성스러운 신의 말씀을 감히 세속의 언어로 더럽힐 수 없다는 이유던가요?”

“……쳐.”

“‘만민은 평등하며, 능력과 인성이 뒷받침되는 그 누구든 원하는 곳 어디든 위치할 수 있으리라.’ 이런 경전의 말씀이 세상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건 아니고?”

“닥쳐!”

당장이라도 상대를 죽여 버리고 싶어 안달하듯 몸을 들썩이는 칼릭스의 목에 바네사는 검을 더욱 바짝 가져다 대었다.

새하얀 검신에 붉은 피가 젖어 들었다.

움직일수록 목의 상처가 더 깊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황태자가 주춤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황태자의 앞으로 두 인영이 다가왔다.

“칼릭스 르 이렌텔 씨, 오랜만이야.”

첨탑 위에서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울림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칼릭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 움직이기 편한 검은색 제복, 그리고 한쪽 팔에 들고 있는 커다란 각궁까지.

‘독에 당한 사람치고는 멀쩡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처음부터 이 일을 예상하고 작정한 사람의 차림이지 않은가.

“……대공비.”

칼릭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금빛 눈동자를 직시하며, 에리카가 픽 웃었다.

“그러게, 양심에 맞게 살았어야지. 왜 악행을 저질러서 이쪽 신경을 건드려.”

“네가 감히 이따위 짓을 하고도―”

“오, 지금 반역자인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거야? 근데 그럴 필요 없어. 황궁에도 기사들 보내 놨거든.”

“……뭐?”

칼릭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리카가 군청색 눈동자를 곱게 접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너희가 구교파 귀족들의 기사단을 끌어들였길래, 우리도 신교파 귀족들의 기사단을 끌어들였어.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걸?”

그 말에, 칼릭스가 쥐었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분명 오늘 출정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자, 그럼 이제 죗값을 받으러 가야지, 태자 전하?”

에리카의 그 말을 끝으로 라인이 칼릭스의 목뒤를 쳤다.

칼릭스는 정신을 잃었다.

* * *

정신을 잃은 황태자를 데리고 도착한 황궁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이룬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던 나는 활짝 열려 있는 황궁의 정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신교파 기사단들이 황궁 안으로 잠입했네?”

내 말을 들은 세이룬이 나직하게 웃으며 설명해 줬다.

“신교의 성전에서 적들을 모두 쓰러뜨린 뒤 제6기사단을 미리 이곳으로 보내 놓았습니다.”

“아, 역시.”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신교파 가문 기사들의 수준이 높다고 한들, 일국의 황실을 지키는 정예 병력보다 높지는 않을 터였다.

또한 대공가의 기사단은 총력전을 대비해 전부 신교의 성전에 가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황궁 앞에서 공성전을 할지언정 황궁 문이 열렸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뭐, 결국에는 반전 없이 드레인의 제6기사단 덕분이었지만.’

활짝 열린 정문을 당당히 넘어서자, 치열한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인한 광경에 일순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나는 애써 담담히 가라앉혔다.

제복을 입고 직접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에센테르 후작, 라리엘이 지원군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비전하!”

측근에게 무어라 언질 준 라리엘이 냉큼 말을 타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네, 라리엘” 하고 답하며 생긋 웃어 주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라리엘이 그제야 안심한 듯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전하의 불미스러운 소문을 듣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대공 전하께서 병력을 요청하실 때 비전하께서는 괜찮으시다고 알려 주시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뵈니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아, 그러고 보니 비전하, 이렇게 전쟁터에 와 계셔도 괜찮으신가요? 아무래도 전쟁터는…….”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말하며 라리엘이 은근슬쩍 내 손을 잡았다.

내 손과 맞닿아 있는 라리엘의 손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세이룬이 슬쩍 말을 움직여서 라리엘로부터 조금 멀어졌다.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지금은 전시니, 에센테르 후작은 상황에 집중하도록.”

세이룬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보통 사람들은 흠칫해서 기가 죽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라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 당연히 그래야죠. 비록 전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전시 때문이 아닌 것 같지만.”

“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우리 세이룬, 질투쟁이인 거 들켜 버렸네.

“그, 총 4개 가문에서 병력을 지원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직접 참전한 가주는 라리엘밖에 없나 봐요?”

세이룬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듯한 라리엘이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전쟁 참여 경력이 있는 제가 대표로 통솔하기로 했어요. 뱃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잖아요.”

“그렇군요. 아, 맞다. 이걸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깜박하고 있었네요. 지금까지의 병력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순간 라리엘이 멈칫했다.

그녀가 주황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가, 이내 다시금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의 없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병력을 요청하실 적에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충분하다고 하셔서, 방어 위주로만 싸우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대답한 라리엘이 슬쩍 시선을 돌려서 승기가 기운 전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선택이 맞았네요. 지원군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우세해질 줄이야.”

하긴, 제국의 방패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덧붙인 라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전장을 바라봤다.

휴전국에서 살았지만 전쟁을 사극 드라마나 전쟁 영화에서나 접했던 나조차도 알 정도로 상황은 확실히 우리에게 유리했다.

‘성전에서도 천천히 이겨 주느라 시간이 걸렸었는데, 이번에도 시간 꽤 걸리겠네.’

나는 손차양을 하며 황궁의 상황을 꼼꼼히 살폈다.

세이룬에게서 지휘자의 권한을 인계받은 라인의 지휘 아래, 드레인의 기사단과 신교파 연합군은 착실하게 승기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수인들이라면 진작에 전장을 정리하고도 남았겠지만, 다른 자들의 시선이 있기에 적당히 구색에 맞춰 이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기사들의 보고를 받던 라인이 이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전하, 보고드립니다.”

“하도록.”

세이룬이 허락하자, 자세를 바로 한 라인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일에 가담했던 구교파 귀족들을 모두 포박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라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휴블린 공작을 비롯한 구교파의 귀족들이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빨리?”

“저항이 크지 않아 가능했습니다.”

라리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샐쭉 눈을 휘었다.

“뭐, 비전하께 귀한 선물 받았다고 그렇게 자랑하던 자들인데, 양심이 있다면 일찍 잡혀 주는 센스 정도는 있어야죠.”

“하하…….”

나는 먼 산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나중에 신교파 귀족들에게도 선물 하나씩 사 줘야지…….

‘그나저나, 구교파 귀족들도 잡혔는데 셀루리아 후작 부부와 카리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황제와 황후도 안 보이는데, 황태자는 버리고 도망갔나?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맞은편에 있는 카델리아 정궁의 창문 중 한 곳에서 은빛의 무언가가 반짝였다.

‘……어?’

뭔가 불길한 예감이 뒷통수를 스쳤을 때였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창문을 뚫은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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