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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39)

117화

“아바마마.”

칼릭스가 황제에게 인사하자, 재빨리 일그러졌던 얼굴을 갈무리한 귀족들이 따라 인사를 올렸다.

테라스에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서 방금 막 안으로 들어선 귀족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만 고개를 들라.”

그 말에도, 귀족들은 몇 초간 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든 귀족들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방 안을 배회하는 것을 지켜보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가 테라스 밖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연무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에서는 황실 기사단이 내일 새벽에 있을 공격을 위해 작전에 맞춰 한창 훈련 중이었다.

“왜, 기밀을 보게 된 것이 두렵나?”

“……황공합니다, 폐하.”

귀족들은 그저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이곳으로 그들을 부른 까닭이 무엇인지는, 굳이 떠보지 않아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권능의 방’으로, 황실 기사단이 훈련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한 가문의 기사단 훈련조차 가문의 기밀로서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하물며 황가의 기사단 훈련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군사 기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귀족들을 불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거절의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로군.’

드레인 대공비에게 행해졌던 셀루리아의 학대, 그것을 감싼 황가, 이렌텔 어로 번역되어 알게 된 경전의 내용, 구교파에서 나와 중립을 선언한 세네카 공작 가문과 베이센 공작 가문.

그리고, 황가가 주최한 가면무도회에서 독을 마시고 쓰러진 대공비.

이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구교파 귀족들은 칼릭스와의 대담 때 황실의 편에서 신교를 공격하는 것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더구나, 신교는 드레인 대공비께서 후원하고 계신 곳이 아닌가.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이 현 베이센 공작이 소공작이었던 시절, 에스로타의 티파티에서 드레인 대공비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여리고 순수하신 분이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우들에게 성의를 표하고 싶다며 손수 고르신 선물인데, 그 선물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신교는, 상처가 많으신 대공비께서 상처받은 아이들을 후원하여 본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였다. 그들로서는 이번 공격이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연무장에서 내일의 내전에 대비하여 훈련하는 기사단의 전체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그러한 감정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대들의 대답은?”

황제가 느긋하게 물었다.

귀족들의 선두에 서 있던 휴블린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기밀을 봤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은 이상, 이미 정해져 있던 대답이었다.

“신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교황 성하를 대리로 세우시고, 성하께서 폐하를 저희의 지도자로 세우셨으니, 폐하의 뜻은 곧 신의 뜻이지요. 신들은 폐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황제와 황태자 부부의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 *

다음 날 새벽.

아직 동도 채 트기 전, 신교의 성전으로 황실 기사단과 구교파 가문의 기사단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멈춰라!”

성전의 성기사들이 기사단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반역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턱없이 적은 수로 구성된 성기사단이 일국의 뿌리를 지키는 정예 병력을 막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고요했던 새벽에 갑작스레 소란이 일어나자, 성전이 위치한 제노트 1구역의 주민들이 하나둘씩 성전 근처에 모여들어서 불안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성기사들이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성전을 지키는 병력이 모두 무장 해제당하여 무릎을 꿇고 앉자, 황제의 대리로서 기사단을 거느리고 온 칼릭스가 앞으로 나와 황제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죄인 바네사는 나와서 황명을 받들라!”

“감히 성하의 이름을― 윽……!”

반발하려던 한 성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검집으로 성기사의 목뒤를 후려친 기사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쓰러진 성기사를 흘끗 바라본 칼릭스는 이내 시선을 돌려서 옆에 서 있는 황실 제1기사단장에게 말했다.

“그대는 제1기사단을 이끌고 안을 수색하여 죄인 바네사를 찾아 내 앞으로 끌고 오도록.”

“예, 전하.”

칼릭스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제1기사단장과 제1기사단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막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나는 여기 있으니, 구태여 신성한 공간을 군화로 짓밟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아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교황의 정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바네사가 추기경들을 대동한 채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칼릭스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성하……!”

몇몇 성기사들이 몸을 들썩이며 바네사를 불렀으나, 곧바로 옆에 서 있던 황실 기사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신교에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 제노트 1구역의 주민들이 불안한 얼굴로 바네사를 바라보았지만, 바네사는 동요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담백한 걸음으로 황태자의 앞에 다가섰다.

“이렌텔의 황태자께서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성전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온기 없는 은백색 눈동자가 황태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 당당함에 묘한 이질감을 느낀 칼릭스는 슬쩍 미간을 구겼다.

‘지금 저자는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상황이 신교에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이미 체념하고 끝까지 품위를 지키기로 했던지, 아니면 무언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던지.

‘……후자일 리는 없어. 궁에서 나오기 전에 분명 대공가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칼릭스가 눈짓하자, 기사 두 명이 앞으로 나와 바네사의 양옆에 섰다.

“죄인 바네사는 황명을 받들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기사가 우악스럽게 바네사의 팔을 잡아다가 강제로 꿇어앉혔다.

풀썩 소리와 함께 흰 성복 자락이 추락하는 천사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무릎을 꿇은 바네사를 확인한 황태자가 큰 목소리로 두루마리를 읽어 나갔다.

“이렌텔의 황제, 샤를로스 르 이렌텔의 이름으로 선고하노니, 대역죄인 바네사는 들으라.”

“…….”

“이레알 신교의 교황인 그대는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순결하고도 신성한 직책을 어깨에 짊어지고서도, 사욕을 위해 감히 제국을 수호하는 드레인 가문 대공비의 독살을 기도하였다. 특히 그 범행이 나라의 국본인 황제와 황태자가 기거하는 황궁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는 황족 시해 미수와도 연관이 있는 바, 짐은 이를 엄히 다스려 대역죄인 바네사의 즉결 처분을 명하노라.”

“독살 기도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는 황실의 모함이다!”

‘즉결 처분’이라는 단어에 성기사들과 추기경들이 격분하여 황태자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곧바로 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황태자의 눈짓을 받은 제1기사단장이 검집에서 칼을 꺼냈다.

스르릉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벼려진 은빛 검날이 바네사의 목에 닿았다.

제게 드리운 검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바네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증거는 있나요?”

그 물음에, 제1기사단장을 향해 잠시 멈추라는 뜻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인 칼릭스는 데리고 왔던 하멜라드 백작을 눈짓했다.

한 기사가 “자백해!” 하고 소리치며 백작의 등을 발로 찼다.

흙바닥에 엎어진 백작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 바네사 교황 성하께서…… 제게 며, 명령하셨습니다……. 에, 에리카…… 드레인 대공비의 술잔에 도, 독을 타라고…….”

“무슨 독이었죠?”

“헤, 헬리베…….”

“헬리베는 요란한 죽음으로 유명한 독이지요.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신교에 후원하고 계시는 대공비를 헬리베로 독살하는 것이. 과연 제게 이로울까요?”

시린 빛을 머금은 은백빛 눈동자가 칼릭스의 금안을 똑바로 직시했다.

일순 느껴진 오싹함에 흠칫한 칼릭스는 곧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역죄인을 처형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1기사단장이 칼을 높게 쳐들었다.

새하얀 칼날이 아래로 내리그어진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제1기사단장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몇 초의 정적 끝에, 제1기사단장의 육중한 몸이 쿵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손에 들려 있던 검은 힘없이 땅으로 챙그랑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황태자 주위로, 제1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동그란 원처럼 둘러싸 온몸으로 그를 방어했다.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누구냐!”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든 제2기사단장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성기사와 추기경들을 억압하고 있던 기사들은 한층 더 힘을 주어 그들을 압박했다.

어디선가 그림자들이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윽……!”

“커헉……!”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사람을 억누르고 있던 자들만 골라 죽였다.

해방된 성기사들은 곧장 무기를 주워들고 재무장한 뒤 재빨리 바네사와 추기경들을 빙 둘러싸며 보호했다.

복면인들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한 제2기사단장이 동요를 갈무리하려 노력하며 외쳤다.

“너희는 누구냐!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는가?! 이렌텔 제국의 후계자인 황태자 전하시다! 전하께 대항하는 것은―”

“―반역, 이라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성전 본당의 첨탑이었다.

복면인들을 경계하는 기사들을 제외한 황실 기사단과 연합군의 검날이 첨탑을 향했다.

“하지만 이건 반역이 아니야. 단죄지.”

해를 등진 첨탑 위는 역광이 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칼릭스는 이를 으득 갈며 첨탑을 노려보았다.

“대공비…….”

그가 잇새로 상대를 찢어발길 듯 중얼거린 순간, 첨탑에서 다시금 화살이 날아와 그의 허벅지에 꽂혔다.

부지불식간에 균형이 무너져 내린 황태자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황태자를 둘러싸고 있던 제1기사단이 당황하여 황태자를 불렀다.

그들의 애탄 목소리 사이로, 대공비의 목소리가 마치 징벌자의 선고처럼 내리꽂혔다.

“죄인 칼릭스 르 이렌텔은 하늘의 명을 받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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