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뇨, 없습니다. 황실 제6기사단이 사절단의 주위를 감시하고 있지만, 사절단이 외부인과 접촉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어요. ……혹여,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델레미아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카리에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심증뿐이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유리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최대한 모든 변수를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두는 것이 이로웠으므로, 이대로 곧장 칼릭스에게 사절단에 대한 일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지 못해 송구한 마음입니다, 어머니.”
“아닙니다, 비전하. 공사가 다망한 것을 알고 있는데 제가 어찌 붙잡겠습니까.”
델레미아가 서둘러 카리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카리에는 고개를 저으며 델레미아를 저지했다.
“제가 초청한 어머니를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제 마음이 편치 않으니, 어머니께서는 천천히 차를 즐기다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어찌…….”
“에밀리.”
카리에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속 시녀 에밀리가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예, 비전하.”
“너는 여기 남아서 어머니의 시중을 들도록 해. 추후 처소로 돌아가시거든 배웅해 드리고.”
“알겠습니다.”
에밀리의 순종적인 대답을 들은 델레미아도 머뭇거리다가 카리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부디 즐겁게 즐기다 가세요.”
카리에도 델레미아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곧장 방을 나섰다.
방 앞에는 명령에 따라 물러나 있던 시녀장이 시립해 있었다. 곧장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시녀장에게 카리에가 물었다.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전하의 시종이 알려 오길, 전하께서는 지금 스카디 별궁의 응접실에서 구교파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 합니다.”
시녀장의 대답을 들은 카리에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날 선 걸음으로 황태자비궁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카리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왠지 불길해……. 사절단과 병력은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급하게 진행하는 거사니만큼 빈 명분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고자 아이테와 손을 잡았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불러들이지 말 것을 그랬다.
먹물 한 방울처럼 조그맣던 불안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슴속에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누려 왔던 평온한 일상은,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세이룬이 나를 데려온 곳은 대공저에 딸린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여기를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방대한 연무장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곧장 따라 나오느라 슈미즈 위에 커다란 숄만 걸친 나는 무의식적으로 숄을 여미며 세이룬을 돌아봤다.
내 질문에 세이룬이 생긋 웃었다.
“진짜로 보여 드리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세이룬은 연무장 한구석에 서 있던 레비나에게서 뭔가를 받아 들고 왔다.
“이것을 에리카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이룬이 내민 것은 커다란 동양식 활이었다.
검은색 몸통에 용 모양이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활은 척 봐도 고급품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세이룬에게서 활을 받아 들었다.
“갑자기 활은 왜?”
“전장에 나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에리카에게도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대답한 세이룬은 자연스럽게 내 뒤로 와서 활을 쥐고 있는 내 자세를 바로잡아 주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초보자니, 검보다는 장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활을 잡고 있는 내 손의 위치를 바르게 고정했다.
“각궁과 화승총 중에서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화승총은 화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장전과 발사 속도도 많이 느려서요.”
내 시야각에 맞게 활을 들어 올리며, 그가 덧붙였다.
“또 연기로 시야를 가릴 가능성도 있어서, 려 제국식 각궁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오, 조총이 나름 문제점이 많았구나…….”
그건 몰랐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서 세이룬과 함께 잡고 있는 활을 바라봤다.
세이룬의 손길을 따라서 활시위를 천천히 당기며, 내가 말했다.
“근데 나 활은 지금 처음 잡아 보는 거라, 활이 있어도 별 도움은 못 될 텐데.”
“하하, 활은 전력에 보탬이 되라고 준 게 아니에요.”
“그럼?”
“에리카가 그토록 바라던 결전이니까요.”
팅, 하고 시위가 거칠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시위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활을 잡고 있는 손에서는 여전히 활의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묘한 고양감이 들끓었다.
잠시 활에서 손을 뗀 세이룬이 발치에 세워져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의 손과 겹친 내 손이 이번에는 화살을 메긴 시위를 쥐었다.
“그대의 복수고 그대의 전쟁인데, 그대가 무기를 가지는 게 당연하잖아요.”
팅,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길고 뾰족한 화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허수아비의 가슴께에 정확히 꽂혔다.
세이룬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대는 그저 마음껏 무기를 휘두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면 눈을 감으면 되고요. 지금껏 늘 그랬듯, 제가 곁에서 그대를 보조할 테니까요.”
뒤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된다고, 세이룬이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이 내 뒤를 지키고 있겠노라고.
“느낌이, 이상해…….”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덩어리진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치받는 느낌이었다. 가슴께가 홧홧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복수를 행할 때, 내 편이 곁에 있는 게 낯설어서 그런 걸까.
불현듯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활 더 쏘고 싶어.”
내 말에, 뒤에서 세이룬의 웃음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원하신다면, 나의 부인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나는 서투른 손짓으로 세이룬의 손길을 따라 활시위를 당겼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허수아비에 꽂혀 있던 화살이 반으로 갈라졌다.
허수아비에 새로운 화살이 박혀 들었다.
“잘하셨습니다.”
세이룬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화살은 분명 나 혼자만의 힘으로 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가슴속에서는 뿌듯한 고양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번에는, 목숨을 담보로 내놓지 않아도 되겠네.’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나는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고 당겼다.
팅 소리와 함께, 화살이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 * *
시녀장의 말대로 칼릭스는 스카디 별궁의 응접실에서 구교파 귀족들과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응접실 앞에서 카리에를 마중한 황태자의 시종장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들은 칼릭스의 시선이 카리에가 있을 응접실의 문 쪽으로 슬긋 향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칼릭스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테의 사절단은 이만 돌려보내고, 병력 요청 또한 거절했으면 좋겠습니다.”
뜬금없는 카리에의 말에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절단을 돌려보내고 병력 요청도 거절했으면 좋겠다니요? 혹여 그들의 변절을 걱정하는 겁니까?”
카리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방금 전 어머니께 듣기로, 이번 작전 실패에 대해서 사절단이 그저 상황 설명만 묻고 순조롭게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불신의 의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유감과 불안의 의사는 내비치리라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의문스럽기는 하군요.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그동안 우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언급을 자제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아이테의 입장에서는 대이렌텔 외교가 걸린 일입니다. 아직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아이테로서는 이렌텔과의 외교에서 불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비의 말은, 아이테가 변절하여 드레인 대공가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이군요. 사절단이 다른 자와 접촉한 정황은 있습니까?”
“……그건, 없습니다.”
성급했다. 그것을 깨달은 카리에가 멈칫하고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거슬리지 않았으면 하는 비의 심정은 이해하는 바이지만, 물증도 없이 사절단을 의심하여 돌려보내는 것은 아이테를 불신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추후 갈등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
“혹여 사절단이 정말로 변절했다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완전히 변절하는 것보다 결과가 확실해질 때까지 간을 보는 것이 가장 이롭습니다. 섣부른 행동을 취하진 않을 테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카리에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칼릭스가 화제를 돌렸다.
“하멜라드 백작의 신문은 어떻게 되었나요?”
“예정대로 자백을 받았습니다. 심문관에게 목숨을 붙여 놓으라 명령을 내렸으니 증언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병력 요청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여 기분이 썩 좋지 않던 참이었는데, 비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칼릭스의 얼굴이 한층 부드러워졌을 때, 복도 반대편에서 한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칼릭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곧 가지.”
칼릭스의 대답에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칼릭스가 카리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아바마마를 더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 저는 지금 이들과 같이 아바마마께 가려고 하는데, 비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카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 * *
황제가 있는 곳은 황제궁 안의 어느 방이었다.
황태자 일행을 맞은 황제의 시녀장이 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폐하께서는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칼릭스가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리에가 뒤를 따랐다.
어쩐지 굳은 얼굴로 황태자 부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귀족들은 두 눈 가득 들어찬 풍경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반쯤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