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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39)

115화

“저번 티타임 때 현재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다음 계획이 정해지면 알려 드리겠다 했었지요. 오늘 그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죽어 가는 드레인 대공비에게로 대공 가문의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내일 새벽에 황실 기사단과 구교파 가문의 기사단 연합군이 신교의 성전을 칠 예정입니다. 신교의 성전은 신교 세력의 구심점이니, 신교 교황을 제거하고 성전을 초토화하면 적어도 적의 절반은 와해될 겁니다.”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델레미아가 말을 이었다.

“그 후에는 강세한 신교파 귀족 가문의 세력을 처단할 예정이에요. 대공 가문은 신교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을 명분으로 칠 계획입니다.”

물론 명분에 모순이 존재하지만, 감히 승자에게 모순을 지적할 간 큰 자는 없으니까요. 델레미아가 여상히 덧붙이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인 아쉴 대령이 질문을 던졌다.

“이와 관련하여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습니까?”

“한 가지, 요청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잠시 숨을 고른 델레미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수의 아이테 정예 병력을 비밀리에 지원받을 수 있으면 합니다.”

“……병력을, 말입니까?”

타국의 병력을 요청하다니. 아쉴 대령의 얼굴에 일순 의아함이 스쳤다.

델레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를 통제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대공의 눈을 속이기에도 이 편이 더 안성맞춤이라 판단했고요.”

잠시 말을 멈춘 델레미아가 나직이 덧붙였다.

“저번과 같은…… 불미스러운 결과가 반복되면 안 되니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쉴 대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백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배치할 장소는요?”

“대공령 내에 잠입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나쁘지 않은 배치였다.

타국의 병력을 국내에 들인다는 부담도 덜고, 유사시에 적의 홈그라운드를 바로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바로 본국에 요청하겠습니다.”

아쉴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델레미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후 간단한 대화를 끝으로 델레미아는 휘하의 하인과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힌 뒤, 제 앞에 놓인 셀루리아의 흑차를 가만히 응시하던 아쉴 대령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그 말에, 뒤편에 물러나 있던 하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걸어 나왔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더니, 정말이었네요.”

“약……?”

“저들이 알아서 편한 길을 깔아 줬잖아요.”

탁자 위로 성큼 올라앉은 사피엔이 눈동자를 가린 보라색 가발을 뒤로 쓸어넘겼다.

드러난 금안은 즐거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곱게 휘어 있었다.

“대공령에 아이테 군을 주둔시킬 명분이 생겼어요. 비록 대공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 보고는 해야겠지만, 황가의 지시 아래 배치하는 거잖아요? 대놓고 수상한 짓을 벌이지 않는 이상에야 웬만한 건 그냥 넘겨 버리겠죠.”

황가의 눈속임을 한다고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아쉴 대령이 다소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대공 측에 연락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대공이 사피엔에게 붙인 호위를 죽여 버린 것에 대한 우려가 담긴 물음이었다.

사피엔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녹셰를 통하거나, 국경에 접해 있는 대공가의 기사단을 통해서 알리면 돼요.”

아무래도 사피엔과 대공이 사사롭게 대화를 주고받는 게 달갑지 않을 아쉴 대령의 입장에서도 좋은 선택지였다.

“그럼 저는 본국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네에, 대령님만 믿을게요.”

사피엔이 활짝 웃으며 앉아 있던 탁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발을 흩뜨려 눈동자를 가린 사피엔은 다시 하인의 신분으로 돌아가 능숙하게 다과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쉴 대령은 황자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능숙함을 짧게 응시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문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 * *

“크아악!”

거친 비명과 함께 우둑 하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만.”

단아한 미성에 심문관이 하멜라드 백작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거친 숨소리에 핏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카리에는 잔뜩 지친 하멜라드 백작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바른대로 실토하는 게 이로울 거야, 하멜라드 백작.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가하면 그대의 다리는 완전히 으깨지거든.”

“허억, 허억…….”

“신교의 교황이 그대에게 에리카가 마실 술잔에 독을 타라고 명령했잖아. 그대는 그 지시를 곧이곧대로 수행했고. 그대가 바 근처에 있었다는 걸 본 증인도 있어.”

카리에의 말에,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하멜라드 백작을 바라보고 있던 하인 하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카리에는 여상히 말을 이었다.

“같은 신을 섬기는 신자로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이야. 아무리 천것들의 소굴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신을 섬기는 교단의 교황일진대, 자신의 교단에 후원해 준 대공비를 독살하여 죽일 만큼 이토록 극악무도했다니.”

“크, 윽…… 그런 적, 없…….”

“이런, 하멜라드 백작의 기억이 아직도 온전치 못한 것 같군. 시작하도록 해.”

카리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심문관은 다시 하멜라드 백작에게로 다가갔고, 다시금 끔찍한 비명이 지하 감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신문이 되풀이되고, 극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하멜라드 백작은 결국 거짓 자백을 토해 냈다. 목표한 바를 이뤄 낸 카리에는 하멜라드 백작의 숨을 붙여 놓으라고 심문관에게 명령한 뒤, 피 냄새가 밴 의복을 갈아입기 위해 곧장 지하 감옥을 나섰다.

가면무도회가 불미스럽게 폐장된 이후로 줄곧 귀족들을 스카디 별궁에 구금하고 있던 까닭에, 궁 안의 복도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전속 시녀 에밀리만 대동한 채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고 있는데, 마침 한 사람이 하인을 대동한 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걸어오는 사람은 사절단의 우두머리인 아쉴 대령과 의무적인 담화를 나누고 나오던 델레미아였다.

카리에를 발견한 델레미아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안주인, 델레미아 르 셀루리아가 지고하신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과도한 예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머니. 편히 대해 주세요.”

카리에가 서둘러 다가가 델레미아의 상체를 일으켰다. 델레미아는 눈동자를 내리깔면서 입을 열었다.

“한순간의 분을 다스리지 못해 폐를 끼친 죄인이 어찌 편히 어깨를 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전하께서는 부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머니의 뜻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할 바에는 이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비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책하시려거든 차라리 지금 맡고 계시는 사절단 접대에 더 신경을 써 주세요. 그 편이 어머니의 마음을 진정케 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비전하.”

흐렸던 델레미아의 하늘빛 눈동자가 반쯤 총기를 되찾았다.

델레미아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셀루리아에도 기사단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어머니.”

카리에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분골쇄신하여 황가의 도움이 되는 것이 과연 이로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카리에는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럴 게 아니라, 제 처소에 가서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마침 여쭤볼 것도 있고요.”

“예, 비전하.”

델레미아의 끄덕임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함께 태자비궁으로 향했다.

* * *

“다망하여 사절단의 근황에 대해 이제야 여쭙게 되네요. 사절단은 지금 어떤가요?”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온 카리에가 주위를 물린 뒤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델레미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이번 작전 실패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해를 구하는 요청에 순조롭게 응해 주었고, 최후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정예 병력 일부를 보내 달라는 폐하의 비밀 요청에도 순순히 응해 주었습니다.”

“……순조롭게요? 요구 사항이라든가, 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하지는 않았고요?”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려던 카리에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델레미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있긴 했습니다만, 간략히 대답해 주자 곧 수긍했습니다.”

“그런가요…….”

카리에는 흘리듯 중얼거리며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가슴 언저리에서부터 묘한 위화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기존 작전이 실패한 것에 대한 유감과 함께 불안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는데, 그냥 상황 설명만 묻고 넘어간다고? 그것도 병력까지 지원해 주면서?’

이대로 황가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비밀리에 와 있던 아이테 사절단 또한 공격의 대상이 되어 차후 아이테는 대(對)이렌텔 외교에 있어서 불리한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려 병력이 개입하는 일이지 않은가.

아무리 일부라지만, 자국의 병력을 타국에 주둔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외교상의 대규모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요청이 있었다 한들, 혹시라도 정권이 바뀌면 그 요청은 인정받지 못할 터.

인정받지 못하면, 아이테는 이렌텔 내부에 불법으로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비단 대이렌텔의 외교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었다.

‘당연히 기존 작전의 실패로 인해 황가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져서 불신과 우려를 표한다면 표했지, 관대하게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잠시 생각하던 카리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여, 사절단과 접촉한 외부인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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