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꿈이어서인지 그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달동네 안쪽에 위치한 남루한 대문을 잠시 응시했다.
이 집은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신아와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인데, 엄마가 그 새끼와 함께 살고 있어서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도 엄마를 보기 위해 종종 방문하곤 했던 곳이었다.
‘원래는 신아의 도움을 받아서 그 새끼 몰래 엄마와 도망가려고 했지만, 엄마가 극심히 반대하는 바람에 못 했지…….’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이미 한 차례 그 새끼에게서 벗어나는 것에 실패했다.
그 대가로 지적 장애를 얻게 됐던 엄마가, 딸의 안위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새로운 도박을 원할 리 없었다.
‘차라리 당신을 희생해서 나만이라도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라셨던 거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나만은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엄마를, 내가 저버릴 수 있을 리가.
나는 손을 뻗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있으나 마나 한 마당을 지나서 현관문을 열자, 비린 혈향이 강렬하게 코를 찔러 왔다.
어쩌면, 꿈속이라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혈향이.
안으로 들어섰다.
피가 그득 고인 웅덩이 안에, 창백해진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이미 피가 멎어 버린 복부는 마치 물감이라도 쏟은 듯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팰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X발 진짜…… 재수 없으려니까…….’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 새끼였다.
기억보다도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중년 남자.
나와 엄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내 생물학적 아버지.
기어코, 손톱이 손바닥을 헤집어 핏방울을 흘려보냈다.
‘감히 내 핸드폰을 만져……? 또 신고하려고? 머저리 같은 년…… 또 처맞으려고…….’
술에 절어서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린 그 새끼는 싱크대 앞에 서서 딸꾹질을 하며 피 묻은 핸드폰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내가 집에 들어온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한다.
주위에는 며칠 동안 치우지 않은 게 분명한 소주병이 가득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서 소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손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매끄러운 유리의 촉감이 차갑다.
나는 곧장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과거의 그 날 그랬던 것처럼, 병을 치켜들고 내리쳤다.
챙그랑―!
‘아아아아악!’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새끼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조금 더 거세진 듯했다.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서 곧장 엄마에게로 뛰어갔다.
‘엄마……!’
그때는 혹시라도 엄마를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119에 전화를 걸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뛰어간 거였지만, 지금은 언제 깰지 모르는 이 꿈속에서 조금이라도 엄마를 더 보기 위해 달려갔다.
‘엄마…….’
나는 바지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엄마의 손을 쥐고 뺨에 대었다.
뺨에 닿은 손이 차가웠다.
‘엄마, 나 지금……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엄마가 항상 내게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나, 정말로 행복해…….’
온기를 잃은 엄마의 손에 뺨을 부빗거리다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내 웃음이었다.
‘이…… 년이……’
뒤에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감히 나한테……!’
어깨가 우악스럽게 잡혀 몸이 돌려졌다.
울컥, 피가 토해졌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 새끼는 악귀 같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깨진 소주병을 휘둘렀다.
꼭 그때처럼, 숨이 점점 가빠졌다.
쿵, 소리와 함께 그 새끼가 옆으로 쓰러졌다.
눈이 깜박이는 횟수가 줄었다.
감기는 눈은 막지 않았다.
나는 그날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경찰을 불러 같이 왔다면 나는 복수를 하지 못했을 테고, 그 새끼는 범행의 우발성과 심신미약으로 인해 감형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 버린 죗값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테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손으로 복수하는 게 나아.’
설령 그 대가로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그 새끼가 집행 유예를 받고 나와서 엄마가 지적 장애인이 된 이후로, 나는 법과 정의를 믿지 않았다.
* * *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아직 빛이 새어 들지 않은 것을 보니 날이 밝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제복을 차려입은 세이룬이 곱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현실이다.
“……세이룬.”
조금쯤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비싯,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세이룬을 향해 두 손을 뻗자, 그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보듬어 안은 채 일으켜 주었다.
“일찍 일어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나중에 깨워 드리려고 했었는데.”
“그냥 갑자기 눈이 떠졌어. 그런데 이 시간에 웬 제복이야? 무슨 일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세이룬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가의 군사적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내일 동틀 무렵에 황가가 신교의 성전을 칠 계획이란 정보가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에요.”
“황가가? 직접?”
“네. 황제 휘하의 황실 기사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총력전을 벌일 심산인 듯해요. 물론 성전에는 제6기사단을 보내 두었고, 신교파 귀족들에게도 비밀리에 협조 요청을 하고 있는 중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에리카가 그토록 기다리던 결전의 날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이룬이 해사하게 눈을 휘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세이룬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결전…… 복수…….”
방금까지 꾸었던 꿈 때문일까.
복수라는 말이 무척이나 기껍게 다가왔다.
나는 손을 뻗어서 세이룬의 뺨을 감쌌다.
“세이룬, 내 샤샤.”
“…….”
“너의 복수가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가만히 속삭였다.
“내 소중한 사람을 죽인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내 말에, 세이룬이 천천히 손을 들어서 자신의 두 뺨을 감싼 내 양손을 감쌌다.
그가 마주 속삭였다.
“복수가 에리카를 기쁘게 한다면, 저는 그걸로 좋아요.”
그 말 안에는 본인의 감정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직이 되물었다.
“너는 너를 죽인 카리에가 밉지 않아?”
그 물음에, 순간 세이룬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었다.
그가 스륵 눈동자를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는 에리카는, 그대를 학대한 그자들이 저주스럽지 않습니까?”
“……어?”
“그대를 학대했지 않습니까. 폭언과 감금에, 제때 식사를 제공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심지어는 레틸기스 즙으로 그대의 자아마저 빼앗아서 꼭두각시로 이용하려 했던 자들이잖아요.”
“…….”
“그런데 그대가 말하는 복수의 이유는 늘 저의 죽음이지 않습니까.”
나는 일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김해수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복수를 결심한 이유는 내가 받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를 잃었을 때, 그리고 이곳에서의 유일한 안식이 되어 주었던 샤샤를 잃었을 때.
그때 나는 복수를 결심했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천천히 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저주스럽겠어. 생각만 해도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데.”
“…….”
“그래도, 내게 쏟아지는 학대보다는 그 상실감이 더 끔찍했나 봐.”
나 자신에 대한 건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져 버린 걸지도.
내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이 천천히 내게로 손을 뻗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 밀 빛 머리카락을 느리게 파고들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겨 주며 속삭였다.
“만약 에리카가 그자들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저는 결국 그자들을 파멸로 몰아넣었을 거예요.”
“…….”
“그러니 그대가 복수하고자 하는 이유가 오로지 저 때문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대가 당한 학대에는 제가 온전히 분노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세이룬이 생긋 웃었다.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가 다시금 눈웃음을 지으며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새카맣던 하늘이 조금씩 푸르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마주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응, 가자.”
* * *
조로록, 차 따르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흑차 향기가 아멜리테 별궁의 응접실 가득 퍼져 나갔다.
아쉴 대령의 찻잔에 차를 따른 보라색 머리카락의 하인이 단정하게 뒤로 물러나자, 셀루리아 후작 부인 측의 하인이 다가와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마지막 하인까지 모두 물러난 후, 우아한 손짓으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델레미아가 생긋 미소 지으며 아쉴 대령을 응시했다.
“아멜리테 별궁에서의 생활은 좀 어떠신가요?”
“덕분에 평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쉴 대령이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델레미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 감사라니요. 감사는 오히려 관대함을 보여 주신 분께 이쪽에서 해야 할 인사인 것을요.”
“그저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협력자 사이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대령께서 보내 주신 신뢰에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아쉴 대령의 겸손한 대답에 델레미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임으로써 성의를 표했다.
이후 두세 번의 얕은 담소로 분위기를 한층 더 누그러뜨린 뒤, 델레미아가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