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하지만, 단기간에 어떻게?”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신교파 귀족 중 하나를 끌고 와서, 신교 교황의 사주를 받아 대공비를 시해하려 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으면 명분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잠시 말을 고르며, 카리에가 이어 말했다.
“물론 다소 허술하기는 하지만, 드레인과 신교가 제대로 반격하기 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면 감히 황실의 면전에서 명분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자는 없을 거예요.”
구교와 구교파 귀족들은 아군이니 당연히 공격할 리 없었고, 적인 신교파 귀족들은 그동안의 규제 등으로 세력 기반이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터였다.
더구나, 황가에 대적했던 대공가를 쓰러뜨린 직후이지 않은가.
이렌텔의 방패라 불렸던 대공가를 쓰러뜨렸는데, 대공가보다 세력이 약한 가문은 당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대공비가 쓰러져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긴 하지. 명분도…… 당장 급조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한계인 듯하고.”
카리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카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낭비할수록 드레인과 신교파에게 유리해집니다. 나중에 대공비가 헬리베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죽어 버린다면,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대공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현 대공이라면 정말로 변방의 군대를 모두 끌어들여서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어.”
이어진 황후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의 명맥 자체가 완전히 끝장나 버리는 말이었다.
“……아바마마, 부디 결정을.”
칼릭스가 침묵을 깨고 황제를 불렀다.
눈을 깊게 감았다 뜬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루 후 동트기 직전, 먼저 신교를 공격한다.”
황제가 선언했다.
“일단 구심점인 신교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신교파에 대해서는 우선 병력이 있는 가문만 억압하는 것으로 하겠다.”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가 파하는 즉시 태자비는 하멜라드 백작을 신문하여 자백을 받아 내도록 하라. 태자는 기사단을 소유한 구교파 귀족들을 비밀리에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고 ‘권능의 방’으로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아바마마.”
카리에와 칼릭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제의 말을 듣고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드레인 가문은 병력의 구심점이 되는 가문이니, 분명 이쪽의 군사력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해서 비밀리에 소수의 병력을 아이테에 요청하여 만일을 대비했으면 싶은데, 어떠십니까?”
“타국의 병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꺼림칙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나을 수도 있겠어. 사절단 응접을 맡은 셀루리아 후작 부부를 데려와야겠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카리에와 칼릭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너희는 이만 나가도 좋다. 나가면서 밖에 있는 시종장을 들여보내도록.”
“예, 폐하.”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황제에게 인사한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응접실 밖을 지키던 황제의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와 황제와 황후에게 허리를 굽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래. 사피엔은?”
“아직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후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한숨을 내쉰 황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물러가라. 아, 그리고 셀루리아 후작 부부를 데려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황제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의 창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릿느릿 비를 흩뿌리던 조각구름은 어디로 갔는지, 달이 혼자서 그 빛을 지상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가 그쳤군.”
황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주군, 급보입니다.”
총부기사단장 라인이 세이룬의 뒤로 소리 없이 부복했다.
비행을 마친 뒤 침소로 돌아와 잠이 든 에리카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세이룬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가 문득 멈췄다.
그가 슬긋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조용히 보고하라. 부인님께서 잠드셨으니.”
“……황궁과 수도 경비대에서 군사적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콜린을 보내 알아본 결과,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 본격적으로 공격할 예정인 듯합니다.”
안 그래도 작았던 라인의 목소리는 마치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더욱 작아졌다.
그제야 만족한 듯, 세이룬의 손이 다시금 에리카의 머리카락을 사락이며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신교의 성전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자는 아이테 사절단의 인질로 있길 잘한 것 같군.”
세이룬이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피엔이 신교의 성전에 있었다면 안전을 위해 대공저로 데려와야 했을 뻔했다.
“규모는 정해졌나?”
“예상하기로는, 황가 전체 병력의 약 6, 7할과 수도의 경비 병력, 그리고 구교파 귀족들의 기사단이 함께 움직일 듯합니다.”
“총력전을 벌일 심산이군.”
무심히 중얼거린 그가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은신에 능한 제6기사단을 신교의 성전에 투입한다. 그 누구에게도 잠입을 들켜서는 안 되며, 내가 다시 명령을 내릴 때까지 은신한 상태로 대기하라 전해. 제6기사단장은 신교 교황에게만 잠입 사실을 전한 뒤 역시 은신한 상태로 대기하도록 하고.”
“예, 주군.”
“중앙 기사단과 제4기사단, 제5기사단은 전원 무장한 채 대기한다. 또한 타한에게 사용인 중에서 인원을 추려 신교파 귀족들에게 본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라 전해.”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명령을 받은 라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도록 해.”
세이룬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인은 즉시 자리를 떠났다.
세이룬은 그때 동안 계속 쓸어 넘기고 있던 에리카의 머리카락을 조금 집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달빛에 젖은 밀 빛 머리카락에서는 희미한 밤 내음이 묻어났다.
“에리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채, 그가 속삭였다.
“그대가 손수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
“아침에 소식을 전해 드릴 테니, 부디 제게 웃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상대에게 들리기를 원치 않은 속삭임은 길 없이 허공을 맴돌다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사락사락, 곧고 가는 손가락이 다시 밀 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울어 가는 달빛이 그림자에 긴 꼬리를 그렸다.
* * *
이게 꿈이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내 앞에 서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
‘김해수! 너 내 말 듣고 있어?’
깔끔한 화이트 톤으로 꾸며진 익숙한 거실에서, 외출복을 차려입은 신아가 세모꼴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꿈에 나온 적 없는 괘씸한 친구를 향해 중얼거렸다.
신아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팔짱을 꼈다.
‘오랜만? 우리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었거든요?’
‘…….’
‘그보다, 나 지금 나간다. 어제도 말했었지? 로스쿨 진학 때문에 교수님이랑 상담하러 간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지금 내가 꿈으로 꾸고 있는 이 순간이 언제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가슴이 꽉 우그러지듯 조여 왔다.
나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꺼냈다.
‘……나,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
‘노래? 무슨 노래?’
‘정지상의 ‘송인’을 모티브로 작곡한 과제곡이 하나 있거든.’
‘과제곡? 정지상의 ‘송인’을 모티브로 작곡했다고?’
‘응.’
고개를 끄덕이자, 환하게 웃으며 당장 들려달라고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신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김해수 너 딱 기다리고 있어, 교수님과 상담 빨리 끝내 버리고 바로 튀어 와서 들을 거니까.’
비장한 얼굴로 각오를 다진 신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신아는 내가 죽고 난 이후로도 계속 여기서 살고 있을까, 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었다. 신아가 내 핸드폰으로 시선을 주었다.
‘해수야, 문자 왔어.’
‘……응.’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린 나는 새로 온 메시지를 터치했다. 과거의 마지막 날 읽었던, 아빠의 핸드폰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도오ㅏㅈ]
무슨 메시지가 올지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글자를 읽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아야.’
‘응? 왜?’
신아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 교수님하고 상담하는 거, 꼭 오늘이어야 해?
내가 그 집에 갈 때마다 항상 같이 가 준다고 했잖아. 나 갑자기 그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아니, 그냥. 조심히 갔다 오라고.’
몇 주 전부터 잡혀 있던 상담을, 당일 갑자기 취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목 끝까지 치민 말을 애써 속으로 삼키며 빙긋 웃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아가 이내 피식 웃었다.
‘뭐야, 싱겁게.’
‘지각하겠다. 어서 나가 봐.’
‘알았어. 집 잘 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신아는 나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집을 나섰다.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현관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창문을 바라봤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 * *
꿈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토독토독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었다.
예전 김해수였던 시절의 마지막 날,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온갖 생각을 했다.
경찰과 같이 갈까.
하지만, 그랬다가 정작 별일 없어서, 경찰은 그냥 돌아가고 화난 그 새끼 때문에 엄마만 죽도록 맞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예전에 그 새끼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맞아서 지적 장애인이 된 엄마인데.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그날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