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네, 기뻐요.”
그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휘며 답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럼 나한테도 해 줘. 나도 기뻐할래.”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이던 세이룬이 이내 볼을 붉히며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요.”
“나도 한 번 더 말해 줘.”
“사랑해요, 에리카.”
그의 속삭임에,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내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 웃고 있으려니, 내가 웃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물어왔다.
“……기쁘십니까?”
“응, 기뻐. 너무너무 기뻐. 행복해.”
계속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 뭔데?”
진지한 얼굴로 할 말이 있다기에, 혹시 중요한 일인가 싶어서 나도 웃음기 지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잠시 주저하던 세이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족들은 모두 하나의 여의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응, 알고 있어.”
“여의주는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만병통치약일 뿐만 아니라 불로장생의 약이기 때문에, 여의주를 삼키는 자는 갖고 있는 모든 병이 사라지고 불로장생할 수 있어요.”
“오, 대박.”
“하지만 여의주는 용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용족은 여의주를 삼킨 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자가 죽으면, 그자의 환생을 느낄 수 있고요. ……여의주의 주인인 그 용족이 죽을 때까지.”
“오오, GPS인가?”
만병통치약에 불로장생약, 게다가 먹은 사람의 환생도 알 수 있는 GPS 기능을 탑재한 여의주라니. 거참 신통방통한 주인을 닮아서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닌 여의주네.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치 잘못해서 풀이 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세이룬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번…… 그대가 저 대신 독을 드셨을 때…….”
“…….”
“……그대가 죽을까 봐 무서워서, 그대에게 제 여의주를 드렸어요.”
“……어?”
나는 멍하니 반문했다.
저 말은, 그러니까, 의식을 잃기 전에 입 안에서 느껴졌던 상쾌한 박하 향이 그 여의주라는 거지?
‘잠깐만. 그때 의식을 잃기 전에 입술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착각이 아니라 진짜 세이룬의 입술이었다고?’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의식이 없을 때 키스를 한 건 처음인데…….’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한군데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그가 왠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허락도 없이 여의주를 드려서…… 역시 화가 나셨습니까?”
“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묻기 전이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다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허락도 없이 여의주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무서웠어요…….”
한층 창백해진 세이룬이 내 옷자락을 꼬옥 움켜쥐며 속삭였다.
“원래는, 멋지게 고백하면서 에리카의 허락을 받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리카는 늘 괜찮지 않을 때도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에리카가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그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느새 창백해진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잔뜩 당황해서 서둘러 그의 뺨을 닦았다.
“세이룬, 울지 마, 응? 왜 울어.”
“……저 미워하지 마세요.”
“내가 왜 널 미워해? 난 오히려 좋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한테 여의주가 있으면, 다음 생에서도 네가 나를 찾아와 준다는 거 아니야?”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욱 황당해졌다.
“나야 당연히 좋지. 내가 왜 싫어하겠어?”
“……놓아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는 그렇게 착하지 않아서, 다른 자에게 그대를 보내 드리는 방법 따위 몰라요. 제가 죽기 전까지, 저는 절대로 에리카를 놓아드리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뭐야. 그럼 너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어? 본모습 보여 주고 나 태워 준 건 여의주 얘기로 내 심기가 상할까 봐 조금이라도 기분 좋을 때 들으라고 미리 연막 친 거고?”
순간, 예전에 스레인의 그림을 보다가 세이룬의 수명에 대해 생각했었던 때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평생이지만 그에게는 찰나이니, 긴 삶을 살아가면서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을 애써 삼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는 네가 나를 잊고 살아갈까 봐 괜히 울적했었는데!’
내가 미간을 좁히자, 움찔한 세이룬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 수명은 생각 이상으로 긴 편입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물도 곁들이지 않은 고구마성 대사에 나는 울컥 소리치려던 것을 꾹 참았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가겠다고 하면, 놓아줄 수는 있고?”
대신 꺼내 놓은 것은, 한숨을 닮은 질문이었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입술을 꾹 깨물다가, 이내 힘없이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모르겠어요.”
“…….”
“에리카를 위해서는 그럴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
“……그게 안 돼요.”
고해 성사를 하듯 속삭인 그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이룬을 보면서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떻게 돼. 나도 안 되는데.”
“네?”
반사적으로 반문한 세이룬이 파드득 고개를 들었다.
놀라서 동그래진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는 세이룬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싫어. 너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고.”
“…….”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같은 결론밖에 안 나오는걸. 그러니까 세이룬도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지지 말란 소리야.”
멍한 얼굴로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이내 물기를 머금은 듯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회하시면 안 됩니다.”
“응.”
“안 물러 드릴 거예요.”
“그래, 그래.”
“정말이에요.”
“그럼, 그럼. 정말로.”
그가 만족할 때까지 충분히 대답해 준 후에야, 드디어 세이룬의 얼굴에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나를 포옥 껴안으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행복해요……. 이게 꿈이라면, 잠식당해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아.”
물기 어린 목소리는 여전히 낮게 잠겨 있었다.
나 역시 천천히 그를 마주 안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도 이게 꿈이라면 별로 깨고 싶지 않네…….”
안온한 공기, 흐드러진 달빛, 전해져 오는 사랑하는 이의 체온.
평생을 꿈속에서 헤매게 되더라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 * *
세금 정책으로 신교파와 해수의 자금을 묶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무도회를 개최하는 것은 황제가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계략이었다.
이미 구교의 중심축 중 하나인 세네카 공작 가문이 중립을 선언하며 구교파를 나갔고, 뒤이어 또 다른 중심축인 베이센 공작 가문이 중립을 선언하며 정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갔다.
게다가 건국제 연회에서 벌어졌던 일의 여파로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이미지는 바닥을 쳤고, 셀루리아를 감싼 황가 또한 구설수를 면치 못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구교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렌텔 어 버전의 경전이 전국에 퍼진 상황 또한 구교에 유리하지 않았다.
상황은 명백히 황가와 구교파에 불리했고, 이런 와중에 금권과 군권을 모두 쥐고 있는 드레인에게 상황적 우위를 점하게 하는 것은 결코 좋지 못했다.
게다가, 드레인은 물론 신교 성전 쪽에 잠입시켰던 세작들도 모두 소용이 없었으니까.
이대로라면 황가와 구교파가 드레인 대공가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버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제는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다소 무리수를 두는 것을 택했다.
조세 시책을 변경해서 드레인 대공가의 아군인 신교파의 힘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킨 다음, 가면무도회에서 대공 부부에게 불미스러운 누명을 씌워 속전속결로 대공위를 갈아치우는 것.
여기에 더해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서 아이테 공화국을 끌어들였다.
완성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는 듯했다.
미약마저 통하지 않은 에리카가 세이룬의 독잔을 대신 마시기 전까지는.
“대공비가 쓰러진 지 사흘이 지났다.”
사피엔을 제외한 황족들이 모여 있는 황제의 응접실 안, 사용인을 모두 물린 황제는 다과조차 세팅하지 않은 채 거두절미하고 입을 열었다.
“드레인의 정식 항의와 수사 협력 요청을 무시하는 것도 그럴듯한 명분이 없으니 한계에 달하고 있다. 대공비 시해 미수 명목으로 귀족들을 스카디 별궁에 구금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황제의 말에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우선, 귀족들은 당분간 더 구금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범인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들을 풀어 주는 것은 드레인에게 명분을 쥐여 주는 꼴밖에 되지 않지 않으니까요.”
황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귀족들을 구금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구나. 특히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대부분이 구교파라 오래 잡아 둘수록 황가에 불리해. 조금 더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한 듯싶은데.”
“…….”
응접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리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원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지금 이 상황도 그렇게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뭐?”
모두의 시선이 카리에에게로 향했다.
잠시 말을 고른 카리에가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대공비는 헬리베에 중독된 상태이지 않습니까. 대공가와 신교는 대공비에게 신경이 분산되어 있을 겁니다. 이 기회에 바로 대공가와 신교를 쳐야 합니다.”
“하지만 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칼릭스가 반박했다.
카리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명분이라면 만들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