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면역?”
순간, 세이룬의 차가운 표정이 반쯤 허물어졌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맞이풀과 달맞이풀을 섞어서 1년여간 꾸준히 먹으면 이 세계 모든 독에 대한 면역을 가지게 되거든. 예전에 내가 여기는 친구가 쓴 소설 속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곳 세계에 대한 설정에 빠삭하다고. 그 덕에 알고 대비할 수 있었어.”
“…….”
“내가 독에 면역이 없었으면, 나는 진작 셀루리아에서 먹인 레틸기스 즙 때문에 멍청한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을걸?”
내가 말을 이어 갈 때마다 점점 멍해지던 세이룬의 얼굴이, 일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전,”
그가 붉어진 얼굴로 허둥거렸다.
“전, 전 그것도 모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세이룬은 아예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잉?’
기껏해야 왜 미리 말하지 않아서 저를 걱정하게 만들었냐며 원망하는 반응을 예상했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반응에 당황했다.
“너, 넌 당연히 몰랐지! 내가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나는 쩔쩔매며 세이룬을 달래려 했지만, 잔뜩 내려간 세이룬의 고개는 다시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독에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걸 모른 게 이렇게 부끄러워할 일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세이룬이 부끄럽다고 하니까 열심히 괜찮다고 말해 줬다.
얼마간 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카.”
“응, 세이룬!”
드디어 삽질에서 벗어났나 싶어서 반색하며 답하자,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저번에, 제 본체를 보고 싶다 하셨지 않습니까. 하늘을 날고 싶다고도 하셨는데…….”
“응? 응, 그랬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룬이 왠지 반짝이는 듯한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대가 기뻐할까요?”
“나 태워 줄 거야?”
기대감에 목소리가 저절로 크게 나왔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은 모양인지, 그가 한층 화사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만 좋으시다면요.”
“헐, 너무 좋아! ……하지만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 괜찮을까?”
“아…….”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짧게 탄식한 세이룬은 고개를 돌려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슬쩍 손을 내민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어슴푸레한 해인이 그의 손 주변을 맴돌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리는 빗방울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네?”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빗방울 한 점도 묻어나지 않았다.
빗방울뿐일까. 별과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도 말끔히 사라졌다.
“세이룬, 비 그치게 할 줄도 알아?”
정말 신통방통한 재능이구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룬을 돌아보자, 그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이슬비 정도는 15살이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걸요.”
“……15살……?”
대체 용족은 어떤 존재이길래 15살이 되면 비를 그치게 하는 능력이 장착되는 걸까.
잠시 질린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는데, 내 눈앞에 불쑥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그럼, 이제 저와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세이룬이 나를 유혹하듯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나는 그 설탕 같은 달콤한 웃음에 반쯤 홀려서 손을 내밀었다.
“응, 좋아.”
* * *
물기를 머금은 한밤의 정원은 청량한 내음이 가득했다.
“자, 세이룬! 다 왔어! 정원!”
그러니 네 귀염뽀짝한 본모습 보여 줘!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자, 어느새 조금 창백해진 세이룬이 연신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제가 먼저 본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한 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저를, 싫어하시면 안 됩니다.”
그가 내 옷자락을 꼭 쥐며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그 가련한 모습에, 나는 폭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세이룬, 나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용을 좋아한다고 한 것도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면서 그렇게 말한 거고. 내가 네 본모습 보고 정떨어질 일은 전혀 없단 말이야.”
“그치만…….”
“그렇게 걱정되면, 키스해 줄까?”
세이룬의 불안도 진정되고, 내 사심도 채우고!
말하고 보니 무척이나 좋은 선택지 같았다. 은근하게 눈을 빛내며 세이룬을 바라보자, 얼굴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인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 자극하지 마세요…….”
“나 진심인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자, 세이룬이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래서, 나랑 키스 안 할 거야?”
“…….”
눈썹을 파르르 떨던 세이룬이 이내 사붓이 눈을 감았다.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뻔했다. 애써 웃음을 삼킨 나는 발꿈치를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 키스.”
담백하게 뒤로 물러나자, 눈을 뜬 그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저랑 키스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가 서럽게 중얼거렸다.
작게 웃은 나는 시무룩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네 본모습 보여 주고 나 하늘 날게 해 주면, 그때 네가 원하는 키스 해 줄게.”
“……정말?”
“응, 정말.”
“약속?”
“응, 약속.”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세이룬은 내 확답을 듣고 나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세이룬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불시에 불어온 돌풍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에리카.”
늘 그렇듯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에 슬쩍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세이룬이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을 한 채 서 있었다.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검은색 비늘과 머리 위로 곧게 뻗은 두 개의 뿔, 길고 유연하게 뻗은 몸체.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별빛을 그러모아 품은 듯한 저 금빛 은빛 눈동자는 지금껏 늘 그랬던 것처럼 나만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아…….”
나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서 멍하니 탄성을 흘렸다.
과거 김해수였을 때 접했던 수많은 용 때문일까.
분명히 처음 보는 모습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에리카?”
다시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로 초점을 맞추자, 세이룬이 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로 우물쭈물하는 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걸어가서 그의 목을 꼭 껴안고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세이룬, 너 너무 귀여워.”
“네……?”
“완전 샤샤 확장판이잖아? 뿔 달리고 발 달린 샤샤!”
“그, 그것뿐일 리가요…….”
세이룬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지만, 나는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면 된 거 아닌가!
“귀여운 샤샤, 이제 나 태워 줘. 하늘 날아 볼래!”
용을 타고 하늘을 난다니,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빠른 속도로 두근거렸다.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실실거리고 있으려니, 같이 웃은 세이룬이 내가 올라타기 편하도록 몸을 낮춰 주었다.
“해인으로 잡고 있을 테니,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알았어.”
세이룬의 등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자, 내가 완전히 앉은 것을 확인한 세이룬이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멍한 부유감과 함께 땅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비 온 뒤의 밤공기는 다소 차가웠지만, 세이룬이 해인으로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도 춥지 않았다.
뺨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부딪쳐 왔다.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별과 달이 한층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와…….”
나는 홀린 듯한 얼굴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에는 가루가 흩뿌려지듯 별들이 흩어져 있었고, 커다란 보름달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빛무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세이룬을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서 달을 향해 뻗었다.
하얀 손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날고 있어.”
나는 지금, 용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전에 생각했었던 것처럼, 이건 정말로, 멋지고 환상적이면서도 머리가 아득할 정도로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머릿속으로 묘한 위화감이 스쳐 지나갔다.
달을 향해 뻗었던 손이 주춤거리며 거둬졌다.
‘왠지……’
과거에도, 이런 등에 타서 하늘을 날아 본 것만 같은…… 그런 기시감이 드는데.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무언가가 신경 쓰여서 머리가 욱신거렸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생각을 털어 내며 세이룬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피부로 전해져 오는 세이룬의 체온이 따뜻해서, 마음속의 심란함은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이라면, 저 달을 딸 수도 있을 것 같아.”
그에게 뺨을 비비며 속삭이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따고 싶으십니까?”
“응. 따서 너한테 주고 싶어.”
“저한테…….”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이룬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금 속삭였다.
“왜…… 저한테 주고 싶으신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어?” 하고 반문했던 나는 이내 그 질문의 의도를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사랑하니까.”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내가 너를 엄청 많이 사랑하니까, 너한테 뭐든 해 주고 싶어서.”
그 말이 끝난 순간, 거친 바람과 함께 새하얀 빛무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나는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품에 가득 안겨 있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저를 기쁘게 하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이룬이 나를 꼬옥 껴안은 채 귓가에 소곤거렸다.
귓가에 닿아 오는 숨결이 간지러워서 키득거린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려서 그를 마주 봤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나와 그의 머리카락이 길게 너울졌다.
“세이룬,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