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에, 아쉴 대령은 문득 일전에 사피엔의 눈동자에서 느꼈던 섬뜩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건 두려울 것이 없는 자의 눈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의 눈.
결국 그 대가로 제 뼈를 내놓아야 한다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내어 줄 수 있는 광기를 가진.
“그럼, 앞으로 얼마간 같이 지내야겠네요. 호위가 죽어 버렸으니, 대공에게는 아이테 사절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같이 있는 동안은 연락하지 않겠다고 전해야겠어요.”
상념에 잠겨 있던 아쉴 대령의 귓가로 사피엔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재빨리 상념을 지워 낸 아쉴 대령이 물었다.
“이곳엔 어떻게 지내실 생각입니까?”
“제가 입을 만한 하인 복장 하나만 구해 주세요. 시종이라면 몰라도, 주인의 바로 곁에 있는 하인은 대체로 의심받지 않거든요. 물론 대령님이 적절히 장단은 맞춰 주셔야겠지만.”
그렇게 대답한 사피엔은 아까 벗었던 보라색 가발을 다시 뒤집어썼다.
가발을 흩뜨려서 눈동자를 최대한 가린 사피엔이 아쉴 대령을 돌아봤다.
“그럼, 그동안 잘 부탁해요.”
생긋 웃은 그가 대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던 아쉴 대령은 이내 손을 뻗어 사피엔의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차가운 손이었다.
* * *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열렸다.
“…….”
달빛이 희미하게 새어 드는 방 안은 엷은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문득 이곳이 대공저의 내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는 분명 황궁의 스카디 별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여기로 이동한 거지?
나는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할 때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에 고일 정도로 피가 났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일부러 다시 소리 내서 중얼거렸지만, 역시 아프지 않았다.
나는 혀를 살짝 만져 봤다. 피가 묻어나오기는커녕, 상처 같은 건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세이룬이 해인으로 치료해 줬나?’
해인이 피가 철철 나는 상처도 깔끔하게 치료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의의 치료술이 뛰어나서 단기간에 나았다는 것보다는 가능성 있었다.
‘혀가 다 나을 때까지 계속 잠만 자고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고.’
내가 진짜로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일주일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잠자는 방법 따위 나는 모른다.
“뭐…… 이따가 세이룬한테 물어보면 되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한가득 밀려 들어오는 달빛 사이로 섞여 든 짙은 물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비가 오는구나…….”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창가에 걸터앉았다.
회색빛 조각구름 뒤로 커다란 보름달이 빛을 흩뿌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지금 내리고 있는 이슬비는 곧 그칠 모양이었다.
‘이걸 무슨 비라고 하지? 여우비……?’
여우비는 햇빛 비칠 때 내리는 비니까 이건 해당 안 되나?
나는 실없는 고민을 하면서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작년의 비 오던 어느 날, 세이룬이 찾아와 뺨을 쓰다듬어 준 뒤로, 나는 비가 내려도 더 이상 욱신거림을 느끼지 않았다.
토독거리면서도 질척이는 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런 빗소리도 있구나. 멍하니 그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에리카……?”
소리 없이 열린 문으로 수건과 물그릇이 담긴 쟁반 하나를 들고 들어오던 세이룬이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나는 멋쩍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안녕, 세이룬.”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세이룬이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가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내 맞은편에 앉은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물으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차게 식은 손끝이 내 이마를 스쳤다가, 차마 더 건드리지 못하겠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그 조심스러운 손짓이 간지러워서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응, 엄청 가뿐해. 의사 솜씨가 좋은가 봐.”
“그…….”
뭐라고 말할 것처럼 달싹이던 세이룬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그가 말을 돌리듯 물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넘어가 준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빗소리를 듣고 있었어.”
“빗소리?”
“응. 빗방울이 땅에 닿을 때 나는 소리가, 우리 키스할 때 나던 소리와 닮아서.”
“…….”
순간 얼굴을 발갛게 붉힌 세이룬이 휙 시선을 피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룬, 부끄러워?”
“……에리카.”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다시금 터져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안으로 집어삼킨 나는 세이룬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세이룬.”
“……네.”
“너, 왜 이렇게 귀여워.”
“…….”
이번에야말로, 그의 얼굴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그래 봤자 발갛게 달아오른 두 귀는 똑똑히 잘 보였지만.
이대로 두면 세이룬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팡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관대하게 더 놀리지 않고 화제를 돌려 주었다.
“그나저나, 무도회는 어떻게 됐어? 나 얼마나 잤길래 여기로 온 거야?”
내 물음에, 그가 슬쩍 눈을 들어 올려서 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볼을 붉힌 세이룬이 다시금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답했다.
“……하루를 꼬박 주무셨습니다. 회장은 그대로 폐쇄되었고요.”
“아아…….”
“저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황가에게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했지만, 황가는 지금까지 엄중히 수사하여 죄인을 명징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수사의 진척도나 관련 정보는 공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대공가의 사람이 수사에 협력하는 것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말을 할수록,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수줍은 기색은 점점 사라져 갔다.
설원의 한복판처럼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그를 본 나는 일단 다시금 화제를 돌렸다.
“음, 황태자는 뭐 때문에 널 붙들고 있었어?”
“아이테 공화국의 동태에 관해서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물론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고요.”
“아, 맞다. 황자 측에서는 연락 왔어? 협상은 잘 진행했대?”
“협상은 잘 진행되었고 우리와 협력하겠다는 의사도 전달받았지만, 대신 황자는 신뢰의 증표로 사절단과 함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후로도 사절단 측과 계속 같이 움직일 것 같아서, 신교의 성전에도 그렇게 전해 두었습니다.”
또한, 황자에게 붙여 두었던 호위도 사절단의 시야 아래 있게 되어,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면 수상하게 보일 테니 당분간은 왕래가 어려울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세이룬이 덧붙였다.
“……정말로 안전하니까 황자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겠지?”
나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사피엔이 했던 트롤짓이 자꾸 생각나서 의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고 협상을 시도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황자의 안위를 담보로 내놓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렇게 덧붙인 말에, 세이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는 게 더 좋았을 거라니요?”
“음, 그러니까…….”
나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을 골랐다.
“……네가 황태자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어제 네가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왔거든. 그러더니 너인 척하면서 나더러 테라스로 가자고 했어.”
“…….”
“무슨 꿍꿍인가 싶어서 따라가 봤더니, 나한테 미약을 탄 뱅쇼를 먹이려 하더라고. ……당연히 그 새끼는 레이븐을 시켜서 없애 버렸으니까, 그렇게 누구 하나 죽일 표정 안 해도 돼.”
서둘러 덧붙이자, 그제야 세이룬의 얼굴이 반쯤 누그러졌다.
나는 누그러진 그의 기색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무도회 때 내 차림은 내가 평소에 쌓아 두었던 순수한 천사 이미자와는 완전히 다른 유혹적인 악마 이미지였어. 거기다 모르는 남자랑 단둘이서 테라스에 있었고, 난 미약을 먹을 뻔했지. 동시에 너는 독을 먹을 뻔했고. 딱 봐도 내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너를 독살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우려는 수작이잖아? 하지만 그건 내 선에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알고 계셨습니까?”
내 말을 가르고, 세이룬이 불쑥 물어왔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제 몫의 잔을 가져가신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응?”
“그 술잔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드신 건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
“그것도 제가 보는 바로 앞에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귓가에 꽂혀 들었다.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서늘한 빛을 머금고 있어서, 어깨를 움찔한 나는 감히 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열심히 눈을 굴렸다.
‘……나 진짜 바보인가?’
저번에 건국제 연회에서 셀루리아 후작 부인한테 뺨 맞은 나를 보고 날뛰려던 세이룬을 겨우 달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이번에는 술잔에 독이 든 걸 알고 먹었다고 독밍아웃(?)을 하다니!
“저기, 그러니까, 세이룬. 내 변명 좀 들어줄래? 나 이번에는 진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완벽한 이유가 있거든…….”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세이룬의 굳은 얼굴은 여전히 누그러질 줄 몰랐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내가 그동안 깜박하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에 면역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