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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139)

109화

“와아, 대령님 이렌텔 어 엄청 잘하시네요? 신기해요. 저는 외국어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데.”

남자는 나사 하나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해맑은 어투로 재잘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자를 미친놈 취급하며 경계를 풀었을 법했지만, 아쉴 대령은 남자에게 똑바로 겨눈 검을 물리지 않았다.

“대답하십시오. 누굽니까.”

“아, 외국인이 이렌텔 어에 능숙한 게 너무 신기한 나머지 제 소개도 깜빡 잊고 있었네요.”

남자가 배시시 웃으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가면의 눈 부분에 달린 군청색 레이스가 사라지자, 지금껏 가려져 있던 황금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렌텔의 황가를 상징하는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대령님 생각은 어떠세요?”

금안은 이렌텔 황가 핏줄의 특징이었고, 금안을 가진 황족 중에서 아쉴 대령이 만나지 못한 황족은 단 한 명이었다.

사피엔 황자.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힌 아쉴 대령은 사피엔을 겨눴던 검을 천천히 집어넣은 다음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절단의 총책임자인 메스 아쉴이 사피엔 르 이렌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인사해 주셨네요. 기뻐요.”

활짝 웃은 사피엔은 보라색 가발마저도 벗어 버린 뒤 테이블 의자에 멋대로 앉았다.

아쉴 대령은 어린애처럼 동당동당 발을 흔드는 사피엔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들리던 소문처럼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군.’

황자를 훑어 올리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던 그는, 역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사피엔의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떤 아쉴 대령은 흠칫 시선을 피했다.

“……저를 보러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쉴 대령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눈꼬리를 사르르 접어 웃은 사피엔이 노래하듯 대답했다.

“거래를 하러 왔어요.”

방금 전 느낀 섬뜩한 감각은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오는 사피엔의 목소리는 첫인상처럼 한없이 해맑았다.

‘하지만, 전장에서 얻은 육감과 연력은 그를 경계하라며 경고하고 있어.’

아쉴 대령은 아까의 섬뜩함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거래, 말씀입니까?”

그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묻자, 다시금 방긋 웃은 사피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거래. 오히려 그쪽이 더 절박하게 매달려도 모자랄 거래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황제가 아닌 저와 손을 잡으세요.”

“……예?”

순간 아쉴 대령은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사피엔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당신들이 손을 잡은 황제는 썩은 동아줄이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패망할 예정이거든요.”

사피엔이 나긋하게 말했다.

아쉴 대령은 낌새를 살피듯 사피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황자께서는 어찌 그것을 확신하십니까?”

“저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자가 신교와 손을 잡은 드레인이니까요.”

“…….”

아쉴 대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평민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신교와 군력과 재력을 동시에 쥐고 있는 드레인의 조합은 실로 막강했다.

‘하지만, 명분과 정당성은 황가에 있어.’

그뿐만 아니라, 아이테는 이렌텔의 방패인 드레인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차후 이렌텔의 내정에 간섭할 발판도 얻길 원했다. 하지만 사피엔의 뒤에 드레인 대공가가 존재한다면, 드레인의 방해로 인해 내정 간섭의 길은 요원해질 터.

‘그렇다면, 어떻게든 황자를 죽여야만 해.’

아쉴 대령의 보라색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을 때였다.

“드레인 대공을 직접 쳐부수게 해 줄게요.”

“……예?”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피엔의 말에, 아쉴 대령은 순간 멍청하게 반문했다.

사피엔이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원한다면 대공령도 줄 수 있어요. 드레인과 관련된 건 싹 다 도려낼 생각이라서.”

“그, 게 무슨…….”

돌연 튀어나온 조건에 당황한 아쉴 대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의 말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준 사피엔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내전이 끝나고 나서 곧장 이렌텔에 쳐들어올 계획이었겠죠? 민심을 한데 모으고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만 한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생각보다 국내 불온 세력이 많아지면서 원정은 불가능해졌죠. 자칫하면 군대가 이렌텔로 원정 나간 사이에 정부가 공격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에 마침 현 사태를 타계해 줄 만한 동아줄이 하나 내려왔어요. 이렌텔 황가와 협력해서 드레인 대공가를 쳐부술 수 있는 기회 말이에요. 그래서 아이테 정부는 방향을 틀었어요. 차라리 이렌텔과는 화친을 맺음으로써 바깥 정세를 유리하게 안정시키고, 민심을 달랠 목적으로는 드레인 공국을 공격하자고.”

어차피 드레인 공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건 황가의 담당이었으니 군대를 보내서 위험을 감수할 일도 없고 말이죠. 사피엔이 나긋하게 덧붙였다.

아쉴 대령은 차갑게 식어 가는 손을 꽉 움켜쥐며 사피엔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황가와 손을 잡으면 아이테는 그저 곁다리일 뿐이죠. 모든 공은 황가에서 다 가로채고, 아이테에게 남는 공은 그저 드레인의 악랄함을 입증한 것뿐이잖아요? 게다가 황가는 드레인을 완전히 멸문시키지도 않겠죠. 이걸 시민들은 과연 얼마나 받아들여 줄지 의문이네요.”

아쉴 대령은 잠시 침묵했다.

황자는 지금 이렌텔의 내정 간섭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아이테의 완전한 속내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아이테의 속사정을 정확히 짚어 내는 사람이 그 뻔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하의 말씀은. 전하와 손을 잡으면, 전하를 황제로 옹립시켜 준 드레인 대공을 우리의 먹잇감으로 주겠다는 겁니까?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쉴 대령이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경계 안에 얼핏 섞인 기대감을 읽은 사피엔은 생긋 미소 지으며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제 목숨을 쥐여 드릴게요.”

“……예? 그게 무슨,”

“황가와 셀루리아의 처형이 끝나고 제가 황위에 오른 직후,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에 드레인 대공이 참전할 때까지. 제가 대령님 옆에 있을게요. 혹시라도 수틀렸다 싶으면 절 죽이세요.”

“…….”

“지금 당장 제가 신의를 내보일 방법은 이게 최선인 것 같은데.”

사피엔의 해사한 말에, 아쉴 대령은 순간 저 말이 농담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장난치지 마십시오, 전하.”

“저 목숨으로 장난치는 취미 없어요, 대령님.”

“전하.”

“그만큼 제가 진심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저로서는 목숨 걸고 하는 도박인데 장난이라니, 평가가 박하시네.”

사피엔이 투덜거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며 아쉴 대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자가 드레인을 먹잇감으로 주겠다고 한 이상, 아이테로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황가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은 게 아닌 이상 황자나 대공가가 아이테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을 테니, 아이테로서는 여기서 황자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추이를 지켜보다가 이긴 편과 최종적으로 손을 잡는 쪽이 유리했다.

생각을 마친 아쉴 대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이 진심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하의 비밀 호위를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 맞다. 일부러 기척 덜 숨기라고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 잠시만요.”

가볍게 대꾸한 사피엔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순식간에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

깜짝 놀란 아쉴 대령이 곧장 검을 뽑았지만, 남자는 대령을 공격해 오기는커녕 허리춤에 꽂힌 검을 꺼내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어벙하게 서 있는 아쉴 대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깨를 으쓱인 사피엔이 입을 열었다.

“드레인 대공이 내 비밀 호위라고 붙여 준 자인데, 이건 호위라기보다는 대공이 내게 달아 놓은 감시역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아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대공에게 보고하려고 하길래 저도 술수를 좀 썼죠.”

“……술수?”

“뇌를 굳게 만들어서 생각을 둔화시키는 말레이르 향을 제 처소에 피웠는데, 며칠 안 가서 이렇게 멍청해지더라고요. 이 사람, 생각보다 감각이 많이 예민한 모양이에요. 뭐, 나야 원하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서 좋지만.”

“……전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의례적인 질문에, 사피엔은 사르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 향에 면역이 있어서 멀쩡해요.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맡아 왔던 거라. 저 향을 맡는 내내 뇌가 굳지 않도록 한시도 쉬지 않고 머리를 썼거든요.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저 향을 맡아도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말을 맺은 사피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위에게로 걸어갈 동안, 아쉴 대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호위를 살폈다.

사피엔의 말이 사실인 듯, 호위의 회색 눈동자는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리멍덩했다.

호위를 겨누었던 아쉴 대령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을 때였다.

호위의 검을 빼든 사피엔이 그대로 곧장 검을 호위의 목에 박아넣었다.

“……!”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건장한 신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 앞에서 저항 한 번 못 하고 숨을 거둔 호위를 흘끗 내려다본 사피엔이 생긋 웃으며 아쉴 대령을 돌아보았다.

하얗고 순한 얼굴에 번진 핏방울이 소름 끼쳤다.

“이제 됐나요?”

“……예.”

낮게 잠겨 버린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낸 아쉴 대령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긍정의 답을 들은 사피엔은 눈꼬리를 더욱 곱게 휘며 검을 바닥에 던진 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는 사피엔의 손은 검을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이의 것이었다.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을 게 분명한.

손수건을 쥐고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 내는 손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쉴 대령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자께서는 왜 드레인 대공가를 쳐 내려는 겁니까?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어서?”

얼굴을 닦던 손짓이 일순 멈칫했다.

사피엔의 선명한 금안이 아쉴 대령을 돌아보았다.

“아뇨.”

“그럼 왜―….”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얻는 데 드레인 대공이 방해돼서요.”

그래서 치워 버리려고요. 사피엔이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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