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명 받들겠습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븐이 하얀 가발을 어깨에 짊어지고 난간을 넘어 사라졌다.
“아, 역겨워.”
하얀 가발과 닿은 모든 곳이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 나는 아직까지 내 어깨에 걸쳐져 있던 하얀 가발 놈의 겉옷 자락을 거칠게 내팽개친 후 곧장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황가 자식들이 내가 먹을 뱅쇼에 미약을 탄 걸 보면, 세이룬이 먹을 거에도 뭔가를 탔을 확률이 높아.’
나에게 입힌 팜므파탈 사신 느낌의 핏빛 드레스와 뱅쇼에 들어간 미약, 그리고 나에게 제 몸을 은근히 밀착시키던 하얀 가발놈까지.
황가가 파놓은 저열한 함정이 뭔지 대충 감이 오지 않는가.
‘그저 순수하고 연약한 줄 알았던 대공비가 알고 보니 팜므파탈이었고, 무도회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서 제 남편을 독살하려 했다는 주작을 치려는 거겠지.’
설마 황가가 이런 더럽고 비열한 수작질을 꾸몄을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황가를 고상하게 본 탓인가. 어쩌면 황가가 그만큼 많이 몰려 있었다는 건지도 모르지.
나는 미친 듯이 홀을 뒤지며 세이룬을 찾아 헤맸다.
회장에서 삼삼오오 떠들거나 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테라스에서 혼자 나온 나를 놀란 듯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 따위는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는 세이룬을 찾는 게 가장 급했으니까.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가 독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과거의 어느 날 느낀 적 있던 끔찍한 절망감이 다시금 뇌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마침 셀레스가 있었어.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이건 알고 있지? 물에 타 먹으면 즉시 온몸의 피가 굳어서 죽는 거.”
“에리카,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이 저택에서 네 편은 하나도 없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저택에서 숨 쉬고 있었는데, 당연히 죽어 마땅한 게 아니겠니?”
뇌리에 여전히 생생히 박혀 있는, 아마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카리에의 말이 귓가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는 손바닥에 붉은 손톱자국이 새겨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세이룬이 용족인 것은, 용이라서 독에 쉽게 당할 리 없다는 사실은, 지금 느껴지는 이 초조함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나는 그저 세이룬이, 샤샤가, 다시 독을 먹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프레이야 홀을 샅샅이 뒤졌다. 이미 휘장이 쳐져 있는 테라스도 빠짐없이 살폈고, 2층에 올라가서 휴게실도 모두 돌아봤지만 세이룬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황태자 새끼, 우리 세이룬 어디다 빼돌린 거야…….”
나는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1층 홀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홀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없으면 곧장 밖으로 나가 화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간 순간, 저 멀리 바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두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그중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색 가발을 쓴 남자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세이룬이라는 것을.
“……해서, 그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의미로 이 술잔을 드리겠습니다.”
바 위의 술잔들을 한 차례 교체한 사용인이 물러난 후, 노란 가발에 연두색 가면을 쓰고 있던 남자가 잔 하나를 집어 세이룬에게 내밀었다.
제가 받은 잔을 빤히 내려다보던 세이룬이 그것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려는 순간, 나는 불쑥 손을 뻗어서 세이룬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실례.”
졸지에 내게 잔을 빼앗긴 세이룬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리카……?”
“갑자기 목이 마르지 뭐야.”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대답한 나는 휙 몸을 돌려 세이룬의 상대방에 있던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 그러니까 아마도 황태자일 그는 당황한 듯 입술을 일자로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흑장미로 대신 마실게요.”
“……레이디, 그건―.”
황태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황태자의 말을 싹둑 자른 채 잔을 곧장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핏빛을 머금은 레드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와인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묘한 씁쓸함이 혀끝을 맴돌았다.
‘역시 독을 탔군.’
어떤 독인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최대한 요란하게 사람을 죽이는 독을 썼을 것이다. 황가의 계획대로라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쓰러진 세이룬을 목격해야 유리했으니까.
‘요란하게 사람을 죽이기로는 독약 ‘헬리베’가 단연 으뜸인데.’
헬리베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오장육부를 모두 태워 녹이기로 유명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top 5 안에 드는 무시무시한 독이었다.
사람이 헬리베를 치사량 먹으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각혈을 시작하다가 이어 엄습해 오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1시간가량 몸부림을 치고, 그렇게 일주일에 걸쳐 서서히 죽어 간다. ……이상 저번에 약초학 도서를 읽다가 참고 코너를 통해 알게 된 잡지식이었다.
아무튼, 이제 슬슬 연기를 시작해야겠다.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반쯤 남은 잔을 입에서 떼어 냈다.
나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세이룬이 곧장 내 어깨를 감쌌다.
“에리카? 괜찮으십니까?”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저은 나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세이룬의 검은 연미복 자락을 슬쩍 쥐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나를 세뇌시켰다.
‘나는 지금 멀미하고 있는 중이다. 토할 것 같다. 구역질이 나온다. 멀미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적으로 되뇌니, 정말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세이룬의 연미복을 움켜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에리카, 안색이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서 어의를―”
세이룬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하던 도중,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머금고 있던 붉은 와인을 왈칵 뱉어 냈다.
“흑, 컥―”
검붉은 포도주가 마치 죽은 피처럼 내 드레스 자락에 스며들었다.
내 요란법석에,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향했다.
순간 장내가 단체로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세이룬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리카?”
나는 들고 있던 잔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린 뒤,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혀를 짓씹었다.
‘아 씨…… 더럽게 아프네.’
다행히 송곳니가 혀를 깊숙이 찔렀는지, 입 안에 피가 점점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착실히 연기를 진행하며 입가로 피를 흘려보냈다.
“세, 흑, 이룬…… 나, 아파…….”
나는 숨이 넘어갈 듯 속삭이며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치 정지 마법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나와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은 세이룬이 내 어깨를 으스러져라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레이븐, 베레나! 지금 당장 어의를 데려와! 불가하다고 버티면 목에 검을 들이대서라도―”
“컥, 콜록, 콜록―!”
세이룬의 외침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달뜬 숨을 꾸며 내려다 마침 사레에 들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바탕 신명 나게 온몸을 들썩이며 콜록거렸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환장할 것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욱신거리는 혀에다가, 사레 때문에 목이 당장 헐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미친 듯이 기침을 해 대니 정말로 정신이 반쯤 나갈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순간 지금 내가 진짜로 독에 중독된 건 아닌지 헷갈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연기는 완벽하겠네…….’
깊은 상처가 난 혀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고, 사레가 겨우 멎은 목에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서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데, 이를 으득 갈던 세이룬이 곧장 나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곧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인 세이룬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프레이야 홀을 나섰다.
그가 들어간 곳은 프레이야 홀이 있는 스카디 별궁의 방 중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고개를 기댄 그의 가슴팍으로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그걸 듣고 있던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세이룬, 나 괜찮아…….”
내 속삭임에, 세이룬의 걸음이 일순 멈칫했다.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는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에리카는, 늘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아닌데. 진짜로 괜찮은데…….”
나 독에 안 당했어. 이거 다 연기야. 나 정말로 괜찮아.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지만,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은 한숨 자고 싶었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두고만 봐요.”
세이룬이 내게로 천천히 상체를 숙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물속에 잠긴 듯 멍한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그대가 자초한 거야…….”
그 뜻 모를 말과 함께, 입술에 부드러운 온기가 내려앉았다.
비릿한 피 맛이 가득한 입 안에 박하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무언가가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아멜리테 별궁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안녕하세요, 메스 아쉴 대령님.”
뒤쪽 창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렌텔 황제가 보장한 안전을 믿고 별궁에서 여독을 풀고 있던 사절단의 총책임자, 아쉴 대령은 흠칫 놀라서 창문을 돌아봤다.
아까까지는 분명 닫혀 있던 창문가에 한 남자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린 채 걸터앉아 있었다.
“우리 초면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앉아 있던 창가에서 훌쩍 뛰어내린 남자는 보라색 머리카락에 군청색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구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저자는 비밀 호위도 한 명 달고 있었다. 그자가 그저 호위인지 아니면 매복인지는 두고 봐야 할 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아쉴 대령은 재빨리 테이블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검을 꺼내 우선 남자를 겨눴다.
“……누굽니까,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