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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39)

107화

“그런 사람을 찾아서 곁에 두는 게 앞으로 전하께서 하실 일이에요. 그리고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고요.”

세상에 즐기고 누릴 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미쳤다고 볼일 다 끝난 황궁에 붙어 있겠냐.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칼에 자르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피엔이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을 이미 찾았는데, 그 사람은 저를 돌아봐 주지 않네요…….”

“앞으로 숱하게 겪게 될 일인데 그런 일로 불평하지 말고요.”

나는 냉정하게 대꾸하며 한 손으로 테라스 난간을 가리켰다.

흔들림 없는 단호한 가리킴에 피식 웃어 버린 사피엔이 순간 내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네, 앞으로 불평하지 않을게요.”

“……!”

흠칫 놀란 내가 재빨리 한 걸음 멀어졌지만, 사피엔은 이미 어느새 테라스 난간 앞에서 수신호로 본인에게 딸린 비밀 호위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무례한 행동 하지 마세요.”

내가 씹어뱉듯 읊조리자,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 사피엔이 이쪽을 돌아봤다.

“나중에 봐요, 에리카.”

이쪽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든 그는 엉뚱한 인사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는 테라스를 벗어났다.

“또라이 새끼.”

내가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사피엔이 사라진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말을 끝까지 안 들어 처먹는 황자놈이었다.

* * *

황자와 헤어진 나는 곧장 테라스 밖으로 나와 세이룬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홀을 헤집고 다녀도 세이룬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어찌나 그리 내게 관심이 많은지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앞을 가로막고 말을 걸었다.

‘아마 황가가 귀족들에게 무언가 언질을 준 모양이지.’

검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사람의 주의를 끌면 상품을 내리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 대놓고 냉대를 할 수도 없고…….’

속으로 불만을 삼킨 나는 최대한 짧게 말을 끊으면서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홀 안을 돌아다녔을까.

“아……!”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지나가던 여자가 발을 헛디뎠다.

비틀거리던 여자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몸이 내게 부딪치기 전, 한 손이 나를 빠르게 끌어당겼다.

털썩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와인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내가 시선으로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머리맡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괜찮으십니까?”

그 말과 함께, 어깨 위로 포근한 옷자락이 내려앉았다.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하얀색 가면에 하얀 가발을 쓴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차림인데…….’

눈을 가늘게 뜬 나는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 준 하얀 가발을 훑어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색 가발, 하얀 레이스로 눈을 가린 백색 반가면, 반가면을 장식하고 있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그 아래 드러난 하관의 화장 방식까지도 어제 세이룬의 차림과 비슷했다.

‘이 사람은 확실히 황가의 사주를 받고 내게 접근한 사람이구나.’

황가가 설마 내가 내 남편도 구분 못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테고.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야 하나?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남자가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색이 창백해지셨습니다. 잠시 테라스로 자리를 옮겨서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어떨까요?”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 역시 하나둘씩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하얀 가발이 어제의 세이룬과 비슷한 차림이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하나둘씩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보세요. 어제 압생트 18잔으로 사랑을 쟁취했던 바로 그 커플이에요!”

“역시 저분이 어제의 그 장미 아가씨였군요. 아까 다른 남자와 테라스로 들어가기에 아닌 줄 알았는데.”

“금방 나오셨잖아요. 역시 다른 남자보다는 어제의 저분이 더 좋으신 거겠죠.”

“봐 봐요. 아까도 장미 아가씨가 다칠 뻔한 걸 저분이 구해 주셨잖아요? 조만간 사교계에서 결혼 소식이 들려올지도요~”

“아니면 이혼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네요. 저 둘 중 한 명이 기혼자라면 말이에요…….”

사람들의 속닥거림을 들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를 ‘장미 아가씨’로 부르는 것은 둘째치고, 어제의 그분도 몰라보는 사람들이 아주 그냥 입만 살았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당장 내 눈앞에는 하얀 거머리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하얀 거머리를 떼어 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면, 차라리 이대로 모르는 척 황가의 유도에 따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세이룬이 내게 붙여 준 레이븐도 어딘가에 잠복해 있는 이상,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디 아프신가요? 말씀을 해 주지 않으시니 걱정됩니다.”

하얀 가발이 걱정스럽게 덧붙이며 세심한 척 나를 살폈다.

나는 무서운 척 입술을 꼭 깨물며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하얀 가발이 내게 벗어 준 겉옷 자락을 살짝 쥐었다.

“조금…… 조금 놀랐어요. 그냥 그뿐이에요. 전 괜찮아요.”

“크게 다칠 뻔하셨는데, 괜찮을 리가요. 잠시 테라스에 가셔서 휴식을 취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싫다고 말할 틈도 없이 멋대로 테라스 행 결론을 내려 버린 하얀 가발은 깨진 와인 잔을 치우러 온 사용인 중 한 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귀하신 분.”

“따뜻하게 데운 뱅쇼 한 잔을 저 테라스로 가져오도록 해. 와인은 세멘티나 후작 영지의 레드 와인으로 하고.”

“알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사용인이 걸음을 옮기자마자 하얀 가발은 곧장 나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를 따라갔다.

* * *

테라스로 들어간 나는 곧장 소파를 지나쳐서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앉은 자세는 아무래도 혹시 모를 위협 상황에 대응하기에 여러모로 불리하기도 했고, 호위와 합류해서 이곳을 빠져나가기에도 난간 근처가 나았으니 선정한 자리였다.

휘장을 친 하얀 가발이 난간 근처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앉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아까 힘든 일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너무 예뻐서요.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에 있고 싶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하얀 가발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우시네요.”

……듣지 않느니만도 못한 망발을 지껄인 건 덤이다.

부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부채를 꽉 쥐면서 조용히 분노를 삭일 무렵, 뱅쇼가 도착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는 하얀 가발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긴 했는데, 생각보다도 뱅쇼가 훨씬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궁금증을 풀 방법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붉은 휘장을 걷어 트레이를 건네받은 하얀 가발은 곧장 내게로 다가와 트레이 위에 얹어진 뱅쇼를 건네주었다.

“드십시오.”

“감사해요.”

나는 미소 지은 얼굴로 잔을 받았다.

레몬 조각이 띄워진 붉은색 와인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한 모금을 삼켰다.

예상하기로는 이 뱅쇼에 뭔가 독약 같은 것을 섞었을 것 같은데, 원래의 뱅쇼 맛이 어떤지를 모르니 맛과 냄새로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일단 하얀 가발의 반응이라도 살펴볼까.’

나는 뱅쇼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슬쩍 하얀 가발을 살펴보았다.

내가 뱅쇼를 마신 것을 확인한 하얀 가발은 들고 있던 트레이를 근처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내게로 걸어왔다.

“뱅쇼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꿀을 많이 넣었는지 생각보다 다네요.”

“그렇군요. 단 것이 입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하얀 가발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나한테 다가오는 것이…… 점점 몸을 밀착시키는 것 같다면 착각인가?

‘착각은 개뿔.’

흰 장갑을 낀 손이 내 뺨을 감싸는 순간, 나는 얼굴을 서늘하게 굳혔다.

이 뱅쇼 안에 들어간 것의 정체가 뭔지 깨달았다.

“이런 X발 새끼들이…….”

감히 음식에 미약을 타?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내게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채 드레스를 고정하는 리본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하얀 가발이 속삭이듯 물었다. 와중에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은 은근슬쩍 내려가 쇄골 부분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엿 같고 더러워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앞에 밀착하듯이 서 있는 하얀 가발을 부드럽게 뒤로 물린 다음에, 곧장 전광석화처럼 그의 중요 부위를 직격으로 차올렸다.

언젠가 신아가 내게 유용한 호신술이라며 알려 준 발차기 전법, 일명 ‘고 to the 자’ 킥이었다.

“아악―!”

비명을 내지른 하얀 가발이 중요 부위를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런 그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들고 있던 뱅쇼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가 테라스를 울렸다.

“이 미친 X팔 새끼야, 이거 강간이야. 알아 들어?”

“으으…….”

“하긴, 너는 못 알아들어도 돼. 이제 이 세상에서 삭제될 건데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으으으……?”

“뭐? 너는 사주받은 것뿐인데 혼자 죽어서 너무 억울하다고? 걱정하지 마. 널 사주한 자들도 곧 네 곁으로 보내 줄 테니까.”

대충 말을 끝낸 내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레이븐이 내 앞에 부복했다.

“비전하, 하명을.”

나는 턱짓으로 내 앞에서 빌빌거리는 하얀 가발을 가리켰다.

“저거 처리해 줘. 분리수거는 안 되니까 일반 쓰레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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