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39)

106화

“아뇨, 못 주겠는데요.”

“감사합…… 아니, 예?”

“그리고 이렇게 제 앞길을 무턱대고 막으신 거, 상당히 불쾌하고 무례한 행동이에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으셨으면 좋겠네요.”

“…….”

“그럼 이만.”

차갑게 일갈한 나는 곧장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늘색 가발을 쓴 남자의 옆을 스치는 순간, 그의 손이 내 팔을 덥석 움켜잡았다.

“죄송합니다. 제 무례에 대해 사죄드리겠습니다.”

내 쪽으로 몸을 튼 하늘색 가발이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네. 그 사과 잘 받아들일게요. 그럼―”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까딱인 후, 그대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늘색 가발은 내 팔을 붙잡은 손에 여전히 힘을 빼지 않고서 애원조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면 안 될까요? 레이디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저는 싫으니, 이만 비켜 주시죠.”

차게 식은 눈으로 대꾸한 나는 잡힌 팔을 빼내려 팔에 힘을 줬지만, 하늘색 가발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팔을 더욱 꽉 움켜쥘 뿐이었다.

‘하…… 이 새끼가?’

여성인 내가, 그것도 단련이라고는 그냥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의 운동이 전부인 내가 남성의 완력을 물리적으로 떨쳐 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거리를 애써 삼켜 낸 내가 근처에 있을 비밀 호위, 레이븐을 불러야 하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로군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내 팔을 붙들고 있던 팔이 퍽 하고 떨어져 나갔다.

‘누구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색 가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나를 도와준 사람은 보라색 가발에 군청색 가면을 쓴 한 남자였다.

보라색 가발을 위아래로 스윽 훑어본 하늘색 가발이 불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고 있는 거죠?”

“대화? 방금 그게 대화였나요? 제가 보기엔 그냥 일방적인 위협이었는데.”

보라색 가발이 비웃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공격당한 하늘색 가발이 분노로 부들거리다가 이내 휙 나를 돌아봤다.

“레이디, 우리는 그냥 자리를 뜨도록 하죠. 이런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상대해 줄 가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하늘색 가발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서 픽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상대해 줄 가치가 없다는 말,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인데요.”

“네?”

“저는 그쪽과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체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청력에 문제가 있으신가요?”

진심 보청기라도 하나 선물하고 싶네. 사람 말을 무시할 때면 시끄러운 기계음을 마음껏 선사하는 그런 보청기 말이지.

내 빈정거림에, 딱딱하게 굳은 하늘색 가발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

“그러게, 처음부터 제 말 듣고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으면 좋았잖아요. 서로 기분도 안 상하고. 응?”

감히 물리적 약자를 힘으로 제압하려 하다니. 저런 몰상식하고 몰지각한 인간과는 말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저 방금 당신 행동 때문에 굉장히 불쾌했거든요. 본인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잘못된 점은 부디 고쳤으면 좋겠네요. 다시는 그런 무례하고 위협적인 짓 하지 않기를 바랄게요.”

이만하면 곱게 말해 줬다.

분노로 두 손을 부들거리던 하늘색 가발은 내 옆에 있는 보라색 가발을 계속 흘끔거리더니, 이내 홱 소리를 내며 몸을 돌리고는 자리를 떴다.

‘설마 나 한 대 치려고 한 건 아니겠지.’

떠나기 전까지 보라색 가발을 계속 흘끔거린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나는 질린 눈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하늘색 가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지몰각에다 심지어 강약약강이라니, 진짜 최악의 인간상이잖아.’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더 상종하게 된다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거하게 비어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속으로 삼킨 나는 이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보라색 가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네요.”

정중하게 인사하자, 보라색 가발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일인 것을요.”

“그럼, 전 이만.”

이제 진짜로 세이룬을 만나러 갈 수 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까딱인 다음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에리카.”

이어 들려온 내 이름만 아니었다면.

“……당신은 누구죠?”

나는 경계 가득한 눈으로 보라색 가발을 올려다보았다.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지만, 전체적인 체격과 가면 밑으로 드러난 하관만으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보라색 가발이 짐짓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

“저는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는데.”

“……황자 전하신가요?”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묻자, 상대가 입꼬리를 잔뜩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래도 절 알아보셨네요. 기뻐요.”

“전 하나도 안 기쁩니다. 그럼 이만.”

나는 단칼에 선을 긋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오늘 일진이 안 좋은데, 이런 게 바로 액땜이라는 걸까.

하지만 닥쳐올 액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엄청난 녀석인 모양인지, 사피엔은 테라스를 향해 걸어가는 내 뒤를 개새, 아니,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왔다.

“에리카, 저 피하지 마세요.”

“댁은 절 이름으로 부르지나 마세요.”

“우리 할 얘기 있지 않나요?”

“그건 제 남편과 같이하도록 하죠.”

나는 사피엔의 말을 단칼에 쳐 냈다.

소리 죽여 웃은 사피엔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드레인 대공은 지금 황태자에게 붙들려서 못 와요.”

“…….”

그의 말대로였다.

꾸역꾸역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테라스 앞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뭔가요.”

딱딱하게 묻자, 사피엔은 의뭉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음, 기밀을 이런 공개된 공간에서 말해도 되나요? 아무래도 테라스에 들어가서 나누는 게 안전할 것 같은데.”

“전하.”

“사적인 감정 때문에 대업을 망치면 안 되잖아요?”

사피엔이 눈을 접어 웃으며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잠시 응시하던 나는 슬쩍 주위의 분위기를 살폈다.

가면을 방패 삼아 나른하게 무르익은 회장 안에는, 이쪽을 흘끔거리며 쑥덕거리는 사람들은 있어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테라스의 붉은 휘장을 걷었다.

“……들어가시죠.”

* * *

휘장을 친 나는 곧장 안쪽으로 걸어가 팔짱을 끼고 사피엔을 돌아봤다.

“기밀 얘기, 말씀하세요.”

다른 사적인 용무는 일절 받지 않겠다는 딱딱함으로 얼굴을 중무장한 채 내뱉자, 피식 웃은 사피엔이 단정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 이용해서 아이테 사절단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잖아요.”

우려와는 달리, 사피엔은 내가 바라던 대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말이 좀 통하네. 나는 계속 좁히고 있던 미간을 한층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오늘 낮에 녹셰로부터 아이테 사절단이 비밀리에 황궁에 입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회장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는 사절단이 아멜리테 별궁에서 여독을 풀고 있다는 정보도 확인했고요.”

“별궁을 지키는 병력도 확인했나요?”

“네. 아무래도 이목이 몰리는 건 곤란한 모양인지, 병력의 양은 기존과 다를 것 없다고 해요. 물론 개개인의 실력은 황제친위대 다음으로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었다지만요.”

사피엔의 단아한 대답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얕은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속에서 잠시 생각하던 내가 불쑥 물었다.

“전하께서 보기엔, 황가가 왜 아이테 사절단을 불러왔을 것 같나요?”

내 질문에, 보라색 레이스 너머로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황금빛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마, 적이 같으니까?”

“……네?”

“아무래도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인 법이니까요.”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한 사피엔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부채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전하의 말씀은, 현재 아이테 공화국이 우선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적은 ‘이렌텔 제국’이 아닌 ‘드레인 공국’이란 말씀이시군요.”

확실히, 아이테 입장으로서는 이렌텔 정복을 사사건건 방해하면서 본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드레인이 증오스러울 터였다.

어쩌면, 근본적인 원인인 이렌텔보다도 더.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황가가 아이테 사절단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되지 않아.’

드레인을 증오하는 아이테 사절단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은 황가가 드레인을 공격할 때 명분으로서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황가가 드레인을 공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현재 황가는 드레인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황가는 이 무도회 도중에 드레인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 예정인 모양이네.’

그 ‘명분’을 이용해서 황가는 드레인을 공격할 테고, 미리 도착해 있던 아이테 사절단은 황가에게 힘을 보태 주면서 여론이 황가에 우호적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겠지.

동시에, 사절단의 방문을 통해 보여 주는 아이테와 이렌텔의 친교는 국경을 수비하던 드레인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릴 테고 말이다.

‘……확실히 이런 독 장미 같은 옷을 입힌 이유가 있었네.’

기존의 내 순수하고 선량한 이미지를 단기간에 탈피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시각적 장치라도 동원하는 게 좋을 테니까.

내 차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킨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사피엔을 응시했다.

“현 황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카드로 사절단을 회유해야겠네요. 썩은 동아줄을 잡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럼 이제 전하께서는 사절단과 협상하러 가세요.”

하지만 사피엔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슬쩍 기울인 내가 다시 재촉하기 위해 입을 막 열었을 때, 그가 돌연 화사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에리카는 정말 유능한 사람인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제 곁에서 저를 도와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