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혹시, 압생트가 너무 독해서 취한 걸까?’
아니면 압생트의 향이 너무 강해서 어지럽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세이룬이 용족이라고 내가 너무 안일하게 마음 놓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일단 그의 얼굴이라도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얼굴의 절반을 가린 가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그를 불렀다.
“세이룬, 왜 그래. 괜찮아?”
“……에리카.”
그가 천천히 내 귓가로 고개를 무너뜨리며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화한 압생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어디 아파? 응?”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세이룬의 뺨을 매만졌다.
하지만 술에 취했다기에는, 만져지는 그의 뺨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내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압생트 맛을 가득 머금은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 갑작스럽게 밀려 들어온 강렬한 압생트의 향이 아찔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서로의 숨결이 서로에게로 섞여 들었다. 꽤 오랫동안 정신없이 이어지던 키스는 내 숨이 불안정해졌을 때에야 겨우 멈췄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세이룬이 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 웃음이 꽤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라,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웃어?”
“만족스러워서요.”
“뭐가 만족스러운데?”
“에리카의 입가에 번진 붉은색.”
세이룬이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거, 제 입술에 발라져 있던 연지이지 않습니까.”
“…….”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한 손을 들어서 이미 가면으로 가려진 눈가를 덮었다.
정말로, 이전부터 누누이 궁금해 왔던 거지만, 세이룬의 수줍음 기준은 대체 뭘까.
내 반응이 웃겼는지, 작게 웃음을 흘린 세이룬이 눈가를 가린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내렸다.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었다. 그의 가면에 달린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내 가면에 닿아 맑은 소리를 냈다.
눈을 가린 흰 레이스 너머로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금빛 은빛 눈동자가 느른히 휘어졌다.
“다시는, 에리카.”
묘하게 맛이 간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그대에게 술잔을 건넬 기회를 다른 자에게 허락하지 마세요.”
“……어?”
“인간은 술에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라 하더군요.”
“으, 으응…….”
나는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나는 평범한 와인 한 병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주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소파 위로 어지러이 흩어진 주황색 가발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런데 에리카가, 그 자식의 앞에서 취해 버려서. 그 자식이 에리카의 무방비한 모습을 봐버렸다고 생각하면,”
“…….”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 자식의 눈깔을 파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세이룬이 나긋하게 말을 맺으며 생긋 웃었다.
멍하니 그 웃음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뭔가, 세이룬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 것 같지 않은 거친 말이 튀어나온 것 같은데.
내가 열심히 동공을 흔들고 있는 동안, 내 턱에 다시금 입을 맞춘 그가 재촉하듯 소곤거렸다.
“알겠다고, 대답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여기서 싫다고 하거나 대답을 얼버무리면 밖에 있을 초록 가발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다고, 내 직감이 경고했다.
나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다급히 외쳤다.
“당연히 알겠어! 절대로 안 그럴게!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리카.”
세이룬이 기쁜 듯 화사하게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춘 뒤 상체를 일으켰다.
세이룬의 손길에 이끌려 덩달아 상체를 세운 나는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다.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는 세이룬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나는 세이룬의 어깨 언저리로 매끄럽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나 빠르게 찾았네? 나는 내 모습이 되게 낯설던데.”
“저는 에리카가 어떤 모습이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린 세이룬이 당연한 것을 말하듯 대답했다.
그 어조에 왠지 위화감이 느껴져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물으려는데,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터뜨린 그가 상체를 곧게 세우고는 나를 바라봤다.
“말씀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사피엔 황자의 무도회 절대 참석 명령을 내렸습니다. 참석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도요.”
“어떻게든 황자를 제 시야 안에 두고 싶겠지.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없애 버리거나.”
“네, 그래서 황자는 내일 녹셰의 정보와 비밀 호위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들어올 예정입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는 흔적을 남기면서도, 최대한 황가의 눈에는 띄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하긴, 방문의 증거는 홀 입구에 있는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기만 하면 되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다음 순간 내일은 사피엔도 참석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끄덕임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일은 황자도 참석한다는 거지?”
으. 표정이 절로 썩어 들어갔다.
하관만으로도 질색하는 내 기색이 잘 드러났는지, 세이룬이 쿡쿡 웃으며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었다.
“어차피 아이테 사절단과 수월하게 접촉하려면 이편이 더 나으니까요.”
“그래도 싫어.”
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을 손으로 슥슥 쓰다듬으며 질색팔색하던 나는 이내 하르르 한숨을 내쉬며 세이룬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세네카 소공작은?”
“무도회 개최 직후 저택 근신 황명이 떨어졌습니다. 세네카 공작 가문은 문인 가문이니 발을 묶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해요.”
“황가 측의 군사적 움직임은 없었고?”
“네, 없었습니다.”
“아이테 사절단은 지금 어디쯤이래?”
“수도에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마 내일 무도회부터 참석할 예정인 것 같습니다.”
“아이테 측의 군사적 움직임에서는 수상한 점 없었어?”
“전쟁의 기미가 있는지 여쭤보시는 거라면, 아직까지는 이전에 말씀드렸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경은 방어 위주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고, 주 병력은 나라 곳곳에서 나라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치안이 불안정한 모양입니다.”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황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테 사절단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정석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법은 아이테 측에 드레인 대공령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데.’
사절단이 오간다는 것은 보통 친교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가.
‘황가로서는 아이테와 친교를 맺지 않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왜 사절단을 요청했을까…….’
나는 손톱으로 부채를 톡톡 두드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이테와의 친교는 곧 드레인 공국 내부의 병력 증강을 뜻했다. 아이테와 전쟁을 벌일 확률이 감소한다면 이전처럼 드레인이 가지고 있는 대규모의 병력을 국경에 투입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리고 어차피 사절단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으니, 굳이 황가의 의도가 무엇일지 골몰하며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자, 세이룬. 이제 슬슬 테라스 밖으로 나가 볼까?”
황가는 우리가 어떤 차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자리를 오래 비우면 공연한 의심을 살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이룬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사르르 웃으며 손을 얹었다.
“네, 에리카.”
테라스의 난간 너머로 커다란 상현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빛무리를 흘려보냈다.
잔잔히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등지고, 나는 세이룬과 함께 다시 홀로 향했다.
* * *
가면무도회 첫날은 놀랄 만큼 아무 일도 없었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변장을 했을 때와는 다르게 세이룬과 함께 있을 수 있는 황궁의 거처에서도, 바짝 세운 경계심이 무색하리만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이번에도 세이룬과 헤어져서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아 어제 갔던 별궁으로 향했다.
오늘 콘셉트는 뭐랄까, 어제보다 더 타락한 느낌이었다.
어제는 새빨간 장미꽃이 보는 이를 유혹하려는 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 이미지였다면, 오늘은 어제의 그 꽃이 검붉은 피에 물들어 보는 이를 홀려 죽이는 사신이 된 이미지라고나 할까.
피에 절인 것처럼 검붉은 빛깔의 드레스, 새빨간 립스틱을 연상케 하는 선명한 붉은빛 머리카락.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 어제와 같은 검은 가면.
‘이번에야말로 건국제 연회 때와는 정반대가 되어 버렸네.’
순수하고 청명한 이미지의 하얀 천사와 타락하고 화려한 이미지의 검은 사신으로 말이지.
‘내 기존 천사 이미지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이런 내 차림에 무의식적인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런 만큼 사람들은 이 차림의 내가 대공비 에리카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나는 사용인이 건네주는 검은색 부채를 받아 들고 프레이야 홀로 향했다.
홀 내부는 딱히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까 헤어지기 전에, 세이룬과 어제 그 테라스 앞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나는 어제와는 달리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세이룬이 오늘 무도회부터 사절단들도 참여할 확률이 높다고 했으니, 최대한 세이룬과 함께 있는 편이 좋았다.
‘나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는 없어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어렵게 할 수는 있지.’
이것이 바로 내향형의 순기능일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레이디. 잠시 그대와 이야기할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직진밖에 모르던 내 앞길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늦지 않게 걸음을 멈춘 나는 감히 내 앞길을 막은 무례한 남자를 싸늘한 눈길로 쳐다봤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대체 이 자식들은 왜 이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