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홀 안은 이미 황가에서 내려 준 차림으로 변장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신교파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인파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붉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홀 안쪽에 마련된 바에서 술잔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레이디께 술 한 잔 드릴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초록색 가발에 푸른 가면을 쓴 한 남자였다.
대답을 조금 끌며 주위를 살피자, 사람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각자의 규칙에 따른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절하면 튀어 보이겠지.’
뭐, 술은 마시는 척하면서 잘 버리면 되는 거니까. 나는 부채를 탁 접으며 입가에 대고는 생긋 웃었다.
“네, 기꺼이.”
비록 레이디가 아니라 부인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첨언하지 않았다.
내 허락에 반색한 남자가 에스코트하듯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레이디, 이쪽으로―…”
“그건 안 되겠는데.”
그때, 내 바로 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다가와 말했다.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솟아오르는 것을 부채를 펼쳐 가리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내 변장이 만만찮은 만큼이나 세이룬의 변장도 만만찮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백발에, 하얀 레이스로 눈 부분을 가린 백색 반가면. 드러난 하관조차도 기존에 그가 주로 하던 화장법과는 달라서 원래 ‘세이룬’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원래의 세이룬이 미모로 나라를 기울일 것 같은 천하절색의 미인이라면, 지금은 천사라고 해도 아무 의심도 없이 아 그래서 저렇게 예쁘구나 할 정도로 성스러운 분위기의 미인이잖아…….’
근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멍한 감탄을 들으며, 나는 홀린 것처럼 멍하니 세이룬을 바라봤다.
내게 술을 권한 남자도 마찬가지로 잠시 넋을 잃고 세이룬을 바라보다가, 이내 흠칫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무도회는 누구나 기존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특별 연회입니다. 제가 먼저 이분께 술을 권했고 이분께서도 제 청을 승낙하셨으니, 그쪽이 우리를 막아설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불안한 기색으로 흘끔거리는 것이, 내가 저 잘생긴 사람을 따라 홀랑 가 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렴, 당연히 불안하겠죠.’
다른 남자와 술 마시지 말라고 막아선 남자의 미모가 탈인간급인데 대체 어떤 여자가 안 설레겠냐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세이룬의 등장 시점부터 이쪽을 향한 흥미의 눈초리는 배로 불어나 있었다. 하긴, 그냥 삼각관계도 흥미로운데 그중 한 명이 천사 뺨치는 미모의 소유자라니 얼마나 재밌겠는가.
‘나 같아도 바로 팝콘 들고 구경 왔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슬슬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었다.
“저런,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이 나를 두고 싸우는 형국이 되어 버렸네요.”
여유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남자-초록 가발과 세이룬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탁, 하고 부채를 접어 가볍게 쥐고는 초록 가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당신이 저에게 청한 것이 술잔을 건넬 기회였던가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내 질문에, 초록 가발이 은근한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이번에는 세이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도, 이분처럼 술잔을 건넬 기회인가요?”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때까지 줄곧 나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전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있나요?”
어딘가 애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미인의 청초한 분위기와 만나자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자랑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어째서 당장 저 미인을 선택하지 않는지, 혹시 내 눈이 삔 건 아닌지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미모에 홀려서가 아닌, 뒷말이 전혀 나오지 않을 깔끔한 방법으로 자리를 뜨고 싶었기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은 내상으로 속이 엉망진창이 돼서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걸 꾹 참고 있었다.
속이 얼마나 엉망이 됐건, 나는 일단 겉으로는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글쎄요,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답니다. 저는 두 분이 게임을 해서, 이긴 분께 그 기회를 드리려 하거든요.”
“게임?”
“규칙은 간단하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거예요. 물론 먼저 취하는 사람이 패배하는 거고요. 저는 제게 술잔을 건넬 분이 술에 약하길 원하지 않거든요.”
물론 싫으면 가셔도 된답니다. 여상하게 덧붙이자, 내게로 허리를 숙인 세이룬이 내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주위의 귀족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감탄 소리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압도적으로 세이룬에게 우호적인 주변 분위기에 다소 위축되어 있던 초록 가발도 이 게임에는 자신 있는지 내게로 손을 뻗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록 가발도 세이룬처럼 내 손끝에 입을 맞추려 했던 모양이지만, 중간에 세이룬의 살기에 주춤하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초록 가발, 세이룬과 함께 바 옆에 마련되어 있는 카우치로 갔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숨 막히는 술 전쟁이 흥미로웠는지, 우리를 따라온 구경꾼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카우치 주위를 빙 둘러쌌다.
저들끼리 흥분해서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용히 찾아온 현타를 느꼈다.
‘내가 어째서 이 요란한 상황 한가운데에 있게 된 걸까…….’
분명 처음에는 튀고 싶지 않아서 초록 가발의 청을 수락한 건데 말이지. 그게 이렇게까지 큰 흥밋거리로 번질 줄 알았으면 그냥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니 싫다고 초장에 거절할 걸 그랬나…….
‘그냥 황가에게 내가 가면무도회에 녹아들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건데.’
그래야 황가 측에서도 날을 바짝 세우지 않을 테니까.
뭐,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홀 안의 사용인을 불러서 게임에 필요한 준비물을 요구했다.
“술 게임을 할 거야. 똑같은 크기의 샷 잔 열 잔과 넉넉한 양의 술을 가져와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귀하신 분. 술은 어떤 것으로 가져올까요?”
사용인의 물음에, 나는 상큼하게 답했다.
“압생트가 좋아.”
“……음, 저. 귀하신 분. 얼음물도 함께 가져올까요?”
술의 종류를 들은 사용인이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황실에 납품되는 압생트는 70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용인을 향해 있던 내 시선이 초록 가발과 세이룬을 향해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설마 제게 술잔을 건네길 원하시는 분들이 고작 압생트에 얼음물을 넣어서 드시지는 않겠지요?”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술을 가장 잘 음미하는 방법은 역시 스트레이트죠.”
……아무리 내가 먼저 권유했다고 해도 그렇지, 진짜로 70도짜리 술을 그냥 마시려고 하다니. 그것도 향이 강하기로 유명한 압생트를.
‘독하다, 독해.’
나는 저절로 썩어 들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고는 사용인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들었지? 얼음물은 필요 없으니 그냥 내가 말한 것만 가져와.”
여전히 동공을 흔들어 보이던 사용인은 이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내가 말한 것들을 충실하게 가져왔다.
사용인은 투명한 샷 잔 5잔이 꽂힌 잔 홀더 두 개를 각각 초록 가발과 세이룬 앞에 두고, 이어 압생트를 잔에 따랐다.
초록빛 에메랄드를 떠올리게 하는 액체가 맑은 소리를 내며 잔에 차올랐다. 이윽고 10개의 잔에 모두 압생트가 차오르자, 내가 입을 열었다.
“첫판은 다섯 잔으로 시작할게요. 그럼 두 분은 첫 번째 잔을 마셔 주시겠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첫 번째 잔이 비워졌다.
‘와, 진짜로 독한 사람이네.’
나는 질린 눈으로 초록 가발을 바라봤다.
세이룬은 용이니까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저 초록 가발은 그냥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얼른 부채로 얼굴을 살랑살랑 부쳤다.
“두 번째 잔을 마셔 주세요.”
두 번째 잔도 눈 깜짝할 새에 비워졌다. 이어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도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첫판은 무승부로 끝났다. 괴물을 마주한 얼굴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비워진 잔에 다시 압생트를 따랐다.
그렇게 두 번째 판과 세 번째 판도 무승부로 끝나고, 네 번째 판의 세 번째 잔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초록 가발이 테이블 위로 엎어졌을 때에서야 게임은 끝났다.
원래 정해져 있던 결말대로.
나는 매끄럽게 웃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세이룬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승리를 축하해요. 약속대로 제게 술잔을 건넬 수 있는 기회를 당신에게 드리죠.”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입꼬리를 휘어 웃은 그가 내 손을 붙잡아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뻐요.”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희열과 부러움 섞인 시선이 나를 좇았다. 나는 세이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프레이야 홀의 테라스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테라스로 들어갈 때까지도 여유로운 나른함을 잃지 않고 있던 나는 세이룬이 붉은 휘장을 완전히 내리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 이게 웬 생고생이…… 우왓?!”
순간, 내 몸이 바로 뒤에 있던 소파 위로 넘어갔다.
폭 하는 부드러운 소파의 감촉이 등을 감쌌다. 쓰러진 내 위로 상체를 겹친 세이룬의 은빛 가발이 빛의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해서 두 눈을 깜박이며 나를 공격한(?) 세이룬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세이룬?”
“…….”
세이룬은 대답 없이 나를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