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리자,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아이테 측 소규모 사절단이 비밀리에 이렌텔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추측하기로는, 이렌텔과 아이테를 왕래하는 상인을 통해 황가가 아이테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 같습니다.”
“아이테 공화국에서? ……황가가 아이테와 접촉했다고?”
아이테는 이렌텔과 적대국이잖아?
그것도 아이테가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이렌텔과 더 사이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먼 산을 찾았다.
나라의 반란 세력을 때려잡겠다고 적국을 끌어들이다니, 이것이 바로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것인가.
‘하긴, 지금 황가에게 선택지가 얼마 없기는 하지. 반란 세력인 우리에게 처형당하고 나서 사피엔을 통해 이렌텔의 명맥을 유지할 것이냐, 아이테를 끌어들여서 반란 세력인 우리를 몰아내고 아이테가 이렌텔의 국정에 간섭하도록 할 것이냐. 이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하니까.’
뭐, 말을 들어 보니 황가는 후자를 선택한 것 같지만.
황가는 아이테를 끌어들이더라도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좀 가소로웠다.
‘내부 반란 세력도 진압 못 해서 외세를 끌어들이는데, 외세라고 제대로 몰아낼 수 있을 리가.’
내가 여전히 먼 산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이,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이테가 황가와 협력했다면 일은 이전보다 까다로워질 것입니다. 이렌텔의 내정에 간섭할 명분을 얻게 된 아이테는 분명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맞아. 그러겠지. 어떤 바보 둔팅이가 그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겠어…….”
나는 과거를 떠올리듯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힘 없고 말 잘 듣는 황제 하나인데, 아이테가 갑자기 여기에 끼어들게 되면 상당히 곤란했다.
‘왜냐면, 엄청 귀찮게 될 테니까!’
이미 황제를 갈아 치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커진 판이었다. 여기서 국제전으로 일을 더 키우고 싶진 않았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세이룬이 왠지 반짝반짝한 눈으로 물어왔다.
“에리카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물론 제가―…”
“응, 아니야.”
나는 단칼에 답한 뒤,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황족이 그쪽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쪽에도 황족이 있으니까, 황자를 이용해서 아이테를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테 입장으로서는 내정 간섭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선 손을 잡을 세력은 반드시 이렌텔의 정권을 틀어쥔 세력이어야 했다. 사피엔이 아이테 측에게 본인이 차기 황제임을 충분히 어필해서 아이테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이후 아이테의 간섭은 드레인의 군력으로 충분히 쳐낼 수 있었다.
“만약 끝까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이 사절단만 조용히 제거해야겠지. 아이테도 명분이 없으니 조용히 덮는 수밖에 없을 거야.”
물론 이로 인해 아이테가 앙심을 품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황제가 된 사피엔이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고.
“그렇습니까…….”
세이룬이 시무룩하게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고운 모양의 눈꼬리가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미인계: 수심편’에 넘어갈 뻔했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외쳤다.
“참, 세이룬! 그리고 황자 주변에 감시를 한 명 붙였으면 좋겠는데!”
테이블까지 탕 내려치며 버럭 소리치자,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낸 세이룬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역시, 황자가 에리카에게 이상한 짓을 했습니까?”
그 장미처럼 화사한 웃음에서 지독한 살기를 읽어 낸 나는 순간 찔끔해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음, 나는 그냥, 저번에 세이룬이 황자를 조심하라고 했었잖아? 옛말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했으니까, 세이룬의 말대로 황자를 경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야!”
하하,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눈물을 3L 흘렸다.
이 허접한 변명 뭔데. 이 같잖은 횡설수설 뭔데!
‘하지만 역시 저 어마어마한 살기로 봐서는, 진실을 말하는 즉시 사피엔 자식은 바로 세이룬 손에 끔살당할 것 같다고!’
사피엔은 아직 죽으면 안 된다.
나는 필사적으로 세이룬에게 내 말이 진실임을 피력했다.
내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동안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세이룬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역으로 황자에게 비밀 호위를 하나 붙이겠습니다. 아직 황자는 살려 둬야 하니까요.”
“…….”
들켰다. 나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대신, 그가 황위를 계승하고 난 후에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으응?”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에리카. 그저, 다시는 그 과분한 흑심을 감히 내보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뿐이니까요. 그가 황제로서 나랏일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세이룬이 다시금 화사하게 웃었다. 가시에 손을 찔리면 곧바로 죽어 버리는 독 장미처럼, 예쁘게 짓는 웃음이 오싹하리만치 섬뜩했다.
나는 그 섬뜩함에 밀려서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피엔, 잘 가라.’
그러게 양심에 맞게 살았어야지.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알아서 멀쩡한 황제로 만들어 줬을 텐데, 사리 판단 잘할 것 같던 사람이 왜 그러냐 진짜.
내가 그렇게 신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인이 될 쓰레기에게 묵념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타한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두 분 전하, 타한입니다.”
“아, 들어와.”
나는 반색하며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타한은 곧장 우리에게로 걸어와 고급스러운 서신을 하나 내보였다.
“황가에서 온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설마 이렇게 빨리 보내올 줄은 몰랐는데.
작게 중얼거린 나는 얼른 초대장을 받아 페이퍼 나이프로 겉봉을 열었다.
화려하게 적힌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내용은 단출했다. 오늘 저녁부터 가면무도회가 황궁의 프레이야 홀에서 개최되니, 초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가면무도회는 총 3일간 진행될 예정으로 참석하는 자들은 그동안 황궁에서 머물게 된다는 말까지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내용을 읽은 내 얼굴에 아름다운 썩소가 그려졌다.
“오늘 저녁? 그냥 지금 당장 튀어오라는 거잖아? 그것도 대놓고 황궁에 사흘간 구금하겠다고? 황가가 이젠 아주 막 나가기로 작정했나 봐?”
마리오네트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구박데기에게 뒤통수 거하게 맞고 나서, 정신과 함께 예의도 영영 닿지 못할 곳으로 던져 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처럼 심기가 상한 듯 입꼬리를 비튼 세이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쪽에서 대응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우리의 손발을 묶어 놓은 채로 신교와 신교파를 칠 생각인가 보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도착할 시간도 벌면서. 겸사겸사.”
던지듯 초대장을 내팽개친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어쩌겠어. 위에서 까라는데 까야지.”
내 복수 계획의 핵심은 명분이었다. 고작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당일에 줬다는 무례만으로는 멀쩡한 황제를 갈아치울 명분의 ‘명’조차 되지 않았으니, 이 거지 같은 초대를 거절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황가에게 명분을 들려 주는 꼴이 될 테니까.
‘……하, 갑자기 열이 확 받네?’
순간, 당장이라도 세이룬의 말대로 그냥 확 다 뒤집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끓었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답게 그 충동을 차분히 내리눌렀다.
잠깐의 충동으로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 오후 6시니까, 당장 출발하더라도 시간이 빠듯하겠네.”
그래도 늦어서 대놓고 황가에 뻗대는 건 좋지 않았다.
“세이룬, 황가의 군사 움직임을 잘 주시해 줘. 황가가 움직이는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주고.”
“알겠습니다, 에리카.”
세이룬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나도 옅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가 볼까.”
* * *
준비하고 왔다면 좀 많이 열받을 뻔했다.
“귀하신 분, 이것은 황제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가면과 의상, 그리고 가발입니다. 지금부터 단장을 도와드릴게요.”
내 시중을 담당하게 된 사용인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의상 세트를 훑어보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세이룬과 헤어져서 여성 귀족 전용으로 마련된 별궁의 방 한 곳에 들어갔다. 물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별궁 안으로 들어가는 귀족들은 모두 가리개를 착용한 채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야 했다.
‘정말 서로가 누군지 먼저 발설하기 전에는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게 해 놨네.’
그리고 나와 세이룬도 쉽게 만나지 못하도록 말이지.
내가 갈아입은 옷은 내가 그동안 사교계에서 입었던 청초한 스타일의 옷과는 전혀 다른, 관능적이면서도 무척이나 화려한 붉은색 옷이었다.
가발 또한 사랑스럽다거나 단정하다는 느낌보다는 원색적인 느낌이 강한 주황색이어서, 붉은 장미와 루비로 장식된 검은 가면까지 착용한 내 모습은 기존 ‘에리카’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마치 팜므 파탈을 떠오르게 했다.
특히 눈동자 색깔도 가린답시고 가면의 눈 부분에 검은 레이스까지 덧대었기 때문에, 기존의 내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은 하얀 피부밖에 없었다.
‘진짜 완전히 다른 사람이네.’
이 정도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거나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지극히 증오하는 사람이거나.
“귀하신 분, 여기.”
마지막으로 사용인이 건네주는 부채를 받아 들고 나서, 나는 안내인의 시중을 받아 프레이야 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