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하는 거지만, 만약 그때 샤샤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나도 모르는 우울증에 걸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그들의 학대는 나한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지만, 그렇다고 그 학대가 내 정신에 아예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너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실패라는 희박한 확률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어.”
그때의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이 그나마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샤샤의 존재는, 내가 동질감을 느끼면서 내 모든 것을 마음껏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마치, 그 어느 날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줬던 신아처럼.
물론 신아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친구라기보다는 구원자에 더 가까웠지만.
‘아, 대화 흐름이 왜 여기로 새 버렸지?’
주제를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상념을 떨쳐 낸 나는 이내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말이 이렇게 새 버렸네. 아무튼 세이룬,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혈혈단신으로 반역을 도모하고자 한 것도, 황자가 나를 보는 눈빛이 불순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냥 기우일 뿐이니까.”
“하지만…….”
세이룬이 서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쐐기를 박았다.
“정말 괜찮다니까. 별것도 아닌 거에 아까운 신경을 쏟을 바에야, 복수 다 끝나고 뭐 하고 놀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겠다.”
* * *
……그렇게 말했던 과거의 나. 뒷짐 지고 머리 박아.
‘뭐? 사피엔은 사리 판단이 멀쩡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나름 고지능을 가진 동물이야?’
응, 다 개소리였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사피엔을 쳐다봤다.
“저 귀엽다고 했잖아요. 그렇죠, 에리카?”
“에리카는 귀여운 사람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저는 안 좋아해 주나요? 드레인 대공보다 더 귀여워질 자신 있는데.”
지난 사흘간, 사피엔은 꾸준히 내게 그리 말해 왔다. 마치 내게 ‘너는 내가 귀엽다고 했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세뇌라도 하는 것처럼.
이 정도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저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빈말을 잘한다고? 기쁨의 역치가 현저히 낮은 거라고?
웃기는 소리. 저건 그냥 불륜을 조장하고 있는 개수작이 아닌가!
“전하.”
지금 내가 저 불륜 꿈나무를 마주하고 있는 장소는 인적이 드문 성전의 후원이었다.
내가 굳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피엔을 불러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래 보여도 그는 황궁에서 처세술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만큼의 사리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긴 했으니, 그만두라는 의사를 명확히 하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비밀 호위인 레이븐이 근처에서 나를 지키고 있으니 가능한 결정이기는 했지만.
당장 황가에서 언제 무슨 공격을 터트릴지 모르는데, 이런 쓸데없는 일을 키워서 감정과 신경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어떻게 지난 세월 동안 황궁에서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지금 사피엔이 하는 짓은 감정에 휘둘리는 무뇌아 같은데.’
감히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트롤짓을 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짜 내분이라도 일으키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세이룬을 사랑하는 내 감정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든가.’
갑자기 살의가 들끓어 올랐다. 나는 무언가를 치고 싶어서 울고 있는 주먹을 애써 꽉 쥐며 잇새로 씹어뱉듯 상대방을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사피엔은 내 살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사피엔이라고 불러 주셔야죠, 에리카.”
“눈치 없는 척하지 마세요. 지금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고 싶어서 발악하는 중이니까.”
그제야 사피엔의 얼굴에서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나는 팔짱을 끼며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제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아실 테고, 제가 제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고 계실 테고.”
“…….”
“그런데 왜 자꾸 저한테 쓸데없이 오해만 살 말을 하실까요?”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열이 확 치받았다.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쥐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피엔이 슬긋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왔다.
“황후가 되고 싶지 않나요?”
“……뭐?”
“제가 아는 당신은, ‘전하’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서요. 상당히 구미가 당기실 것 같은데.”
뭐가 어쩌고 어째?
입을 열면 쌍욕이 나올 것 같아서 다급히 입을 다물었는데, 말문이 막힌 나를 보고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사피엔이 다시금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황후로도 만족 못 하실 것 같으면, 황제도 괜찮아요. 황후는 제가 하면 되니까.”
“……황자, 전하. 저는―”
“에리카는 사실 대공과는 복수를 위해서 정략으로 결혼한 거잖아요. 정략으로 맺어진 결혼이 정략으로 파기된다는 데 문제 될 건 없지 않나요?”
“저기요?”
“전 에리카가 마음에 들어요. 에리카의 유능함, 상냥함, 날카로움, 숨겨진 상처, 그 모든 게. 저랑 정말 잘 맞을 것 같은데.”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다물고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에리카, 머리가 아프신가요?”
사피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저 망할 입이 개소리를 멈췄네.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저, 멍청한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진짜, 계획에 필요한 장기짝만 아니었으면 세이룬에게 암살 의뢰하고도 남았다.
나는 나를 차분히 응시하고 있는 사피엔의 금안을 노려보면서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했다.
“특히, 자기 감정 컨트롤 못 해서 공과 사 구분 못 하고 일 망치는 거. 진짜 경멸해요.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이잖아요. 제 말,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죠?”
“…….”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대업을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전하.”
거절은 당연하고, 그 거절로 인해 앙심을 품고 대업을 그르치지 말라는 소리였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는 사피엔의 푸른빛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리깔렸다.
나는 기세를 몰아서 사피엔이 더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완전히 못을 박았다.
“다시는 이런 뭣 같은 소리, 안 들었으면 좋겠네요. 저 불륜 진짜로 경멸하거든요. 기본 상식과 예의범절을 엿 바꿔 먹은 짓이잖아?”
“…….”
“부디 제가 일국의 주인이 될 분의 인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나는 차갑게 일갈한 다음 휙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사피엔은 두 달이 넘도록 나를 동료가 아니라 결혼 상대로 보고 있었다는 거지? 멀쩡히 결혼한 나를?’
와, 미친 새끼. 그래도 이쪽 면에서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잔뜩 오른 열은 쉬이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피엔의 멍청한 소리에 잔뜩 빼앗긴 기운은 돌아올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더러운 기분으로 아이들을 더 볼 수는 없으니, 오늘은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세이룬, 보고 싶어…….”
바네사와 어영부영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마차에 올라 창에 이마를 박고 중얼거렸다.
가자마자 내 충전기 세이룬에게 잔뜩 어리광이나 부려야겠다.
물론 지금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면 사피엔은 분명 머지않아 변사체가 되어 나타날 테니, 이유를 적당히 각색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피엔에게 감시를 하나 붙여야겠어.’
필요하니까 처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 신뢰를 잃은 장기짝을 그냥 두기에는 불안했다.
나는 휙휙 바뀌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 *
초여름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고즈넉한 후원을 감쌌다.
바람결에 따라 길게 흔들리는 제 머리카락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사피엔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에리카가 있던 자리를 아무 표정 없이 응시했다.
불현듯, 사피엔의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서늘한 눈동자가 에리카가 걸어간 공간을 천천히 훑어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에리카의 모습이 사라진 곳에 시선이 닿았을 때, 사피엔은 고개를 기울이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황위를 준다고 했는데, 왜 안 넘어오지?”
지금껏 보아온 사람 중에서, 권력에 관심 보이지 않은 사람은 처음인데. 멍하니 중얼거리던 사피엔은 이내 피식 웃었다.
하긴, 자신에게 대공비는 늘 처음이었다.
“혹시 이 궁의 주인이신가요?”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하늘을 좋아하세요?”
자신의 궁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은 것도,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한 것도, 제게 무언가를 좋아하냐고 물어본 것도. 모두. 대공비가 처음이었다.
처음이잖아. 처음이니까.
처음이라서.
“……그래서, 궁금해졌는데.”
당신은 뭘 좋아하는지.
당신의 약점은 무엇인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알고자 했던 것들이, 대공비와 연관되는 순간 그 이유를 달리했다.
그토록, 내게 당신은 처음이라서.
다시금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껏 응시하고 있던 인적 없는 공간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사피엔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가슴에 대었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그는 아직 잘 몰랐다.
이 감정은, 대체 어떠한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감정인지.
“……그냥, 그런 의문이 들어요.”
잠시 침묵하던 사피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은 왜 대공 옆에 있는지.”
내 곁에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사피엔은 몸을 돌려 후원을 벗어났다.
다시금 불어온 바람이 빈 후원을 감쌌다.
* *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다소 진지해 보이는 세이룬의 얼굴이었다.
“에리카,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가와 관련한 정보야?”
기대감 가득한 내 물음에,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활짝 웃은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세이룬과 함께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나는 다과도 물린 채 세이룬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인데?”
“아이테와 맞닿아 있는 국경을 지키고 있는 제1기사단에서 전해 온 보고입니다.”
“……제1기사단에서 전해 온 보고라고?”
황가와 관련된 정보가 왜 국경에서 전해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