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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39)

101화

“……네?”

“당신은 나중에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원하신다면 특별히 귀엽다고 해 드릴 수 있어요.”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서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고, 굳이 원한다면 해 준다.

앞으로 나와 세이룬을 대신해서 황제로 뼈 빠지게 일할 사람에게 이 정도 특별 대우는 해 주는 게 예의겠지.

내 비장한 말에 잠시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던 사피엔은 이내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하하…… 에리카는 정말로 빈말을 못 하시네요.”

“……귀엽다고 해 드릴 수 있다니까요?”

빈말해 줄 수 있다니까?

내 말에 사피엔은 대답 없이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웃기만 했다.

내가 흐린 눈을 뜰 때까지 계속 웃기만 하던 그는 한참 뒤에서야 겨우 웃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황금빛 눈동자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귀엽다고 해 주세요.”

“진짜로요?”

“네. 빈말로라도 에리카에게 듣고 싶어서요.”

그가 채근하듯 속삭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까지 원한다니까.’

빈말로라도 귀엽다는 말이 듣고 싶다는데, 얼마나 귀엽다는 말이 듣고 싶었으면 그러겠냐고.

“귀여워요, 사피엔.”

……물론 말만 해 줄 수 있다고 했지, 어조까지 진짜인 것처럼 꾸며 낼 수 있다고는 말 안 했다.

목소리가 국어책을 읽듯이 무척이나 딱딱하게 나갔지만, 사피엔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기뻐요, 에리카.”

“기쁠 것까지야…….”

나는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볼을 긁적거렸다.

고작 이런 게 기쁘다니, 빈말을 잘하는 건지 기쁨의 역치가 현저히 낮은 건지 헷갈린다.

* * *

아이들과 놀아 준 뒤 저택으로 돌아와 마차에서 내리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세이룬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셨습니까, 에리카?”

“오늘도 마중 나와 준 거야?”

나도 활짝 웃으며 세이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를 폭 껴안았다.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린 그가 애교부리듯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며 속삭였다.

“오늘도 에리카를 가장 먼저 마중하고 싶었으니까요.”

“하하, 그게 뭐야.”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세이룬과 함께 볕 좋은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포카와 레비나의 시중을 받아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곧장 세이룬이 기다리고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많이 기다렸어?”

최대한 빨리 씻고 갈아입었는데도 벌써 테라스의 테이블에는 티타임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서둘러 자리에 앉으며 묻자, 세이룬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많이 기다렸어요.”

“아…….”

“하지만 괜찮아요. 전 기다리는 데 익숙하니까.”

그가 쓰게 웃으며 다시 내게로 눈을 맞췄다.

붉게 물든 그의 눈가와 흐릿한 미소가 절색의 외모와 만나서 굉장히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잠시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던 나는 이내 허둥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타르트를 세이룬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여기! 이거 세이룬이 먹어!”

“에리카……?”

“음, 여기 앞 정원에 오케스트라를 부를까? 아니다. 그건 너무 빈약하니까, 여기 옆에 있는 펠리아 호수에 커다란 배 띄워 놓고 수상 음악회를 열자.”

“에리카.”

“아니면, 세이룬은 기사니까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고 화려한 검을 제작해 줄까? 그도 아니면 섬을 사 줄 수도 있어. 이름은 ‘샤샤’로 지으면 딱 좋을 것 같다. 물론 내가 앞서 말한 거 다 해도 되고. 흠, 또 뭐가 좋으려나…….”

뭐를 해 주면 세이룬의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 되려나.

해 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으려니, 맞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턱을 괸 채 목을 울려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세이룬.”

“에리카만 제 옆에 있어 주면, 전 그것으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걸요.”

세이룬이 나른하게 속삭이며 눈을 곱게 휘었다.

잠시 홀린 듯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서질 듯 주먹을 꽉 움켜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미성년자 아니야.”

“…….”

“내가 가진 돈, 이제 내 뜻대로 마음껏 쓸 수 있어.”

“…….”

“네가 원하는 거 다 해 줄 수 있어. 너한테 해 주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그러니까 말해 줘.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열의에 타오르는 눈동자로 세이룬을 바라봤다.

내 눈에서 진지함을 읽은 세이룬이 나른하게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정말로, 제가 원하는 것 다 들어주실 수 있나요?”

“응, 뭐든. 전부.”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세이룬을 바라봤다.

곤란한 듯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가 이내 결심한 듯 내게 시선을 맞췄다.

“사피엔 황자를 경계해 주세요.”

“응, 알았…… 응?”

예상한 궤도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는 요구에 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라고?

“그자는 그저 두고만 볼 자가 아닙니다.”

“……그 황자가 왜?”

“부인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불순하니까요.”

차마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세이룬이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치를 떨 듯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의 모습이 어쩔 수 없이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하하…… 우리 샤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지, 질투만이 아닙니다. 뭔가 일을 칠 것 같은 불길한 자입니다. 예감도 좋지 않아요.”

세이룬이 억울한 것처럼 내게 말했다.

나는 계속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속 안으로 삼켜 내고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세이룬, 지금까지 봐 온 황자는 사고 판단이 멀쩡한 사람이야. 자신이 황제가 되더라도 드레인 가문과의 친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텐데, 그런 멀쩡한 사고 판단으로는 감히 대공가를 건들 수 없어.”

“하지만…….”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로 그 험난한 황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면 얼마나 사리 판단이 잘 되는 사람이겠어. 최소한의 생각이 있어도 감히 그럴 수 없는데, 똑똑한 사람이니 더더욱 그럴 수 없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나는 이어 덧붙였다.

“지가 무슨 아메바도 아니고 말이야.”

“…….”

“우리 대공님, 대공님은 용님이라서 인간이 못 미더운 모양이신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나름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고등 동물이랍니다. 그렇게 저능하지 않아요~”

나는 상체를 기울이고는 손을 뻗어 아래로 축 처진 세이룬의 눈꼬리를 살살 문질렀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쉰 세이룬은 내 손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는 에리카는, 고작 조그만 뱀 하나를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내 손 위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렸다.

서러움 가득한 그 말에, 나는 간질거리는 손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샤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반역을 결심한 거야. 무모하게 목숨을 걸지 않았어.”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게 이혼을 권유하셨잖아요.”

“물론 나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미처 내가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사적인 복수에 아무 관련 없는 제삼자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도 그 확률을 감수하려 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당시 손에 쥐신 카드가 금전뿐이었으니, 에리카가 싫어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반역을 도모하셨을 테지요.”

세이룬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꾹 깨물며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의 말에, 일순 멈칫한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쓰, 쓰레기통!”

“주, 죽었으니까 버려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렇게 내뱉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너를 꺼내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 끔찍한 느낌을, 그 순간을, 생명이 빠져나가 차갑게 식어 가던 너를,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샤샤, 내가 말했지? 나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도 말해 줬었나?”

불현듯,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부서질 듯 아파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자, 흠칫 놀란 세이룬이 곧장 내 손을 놓아주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그가 금방이라도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하고 대답한 나는 내 앞에서 식어 가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엄마가 죽었어. 나를 위해, 본인의 전부를 희생했던 우리 엄마가.”

“…….”

“복수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어. 하지만 법도, 권력도 모두 내 편이 아니었어. 그때 나는 돈도 힘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복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옆에 있던 소주병을 깨서 엄마를 죽인 아빠를 죽이는 것뿐이었어.”

“…….”

“하지만 나보다 힘도 체구도 우위인 아빠가 그냥 두고만 봤겠어? 엄마를 찔렀던 칼로 나도 죽였지.”

나는 한차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에 이어 말했다.

“만약에, 이번 삶에서 내가 아무런 돈도 없이 그냥 구박데기에 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 자리에서 카리에를 죽여 버렸을지도 몰라.”

“……에리카.”

“너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샤샤’는 나에게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였거든. 내 진심을 전하고, 진심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어.”

나는 내 눈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푸른빛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세이룬을 마주 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금빛 은빛 눈동자가 깊은 일렁임을 머금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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