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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39)

100화

‘뭐, 제 목숨과 권력 귀한 줄 아는 황가가 모든 것을 걸고 불확실한 것에 베팅한다는 말도 좀 웃기긴 해.’

아무튼, 이 긴 일련의 요지는 그거다.

대체 언제 공격을 감행할 거냐고 징징거리는 거.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나는 한국에서 유명했던 노래 가사를 힘없이 흥얼거리면서 마차의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맞은편에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내 흥얼거림을 듣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마차는 익숙하게 에이리트의 도로를 달려서 성전에 도착했다.

나는 포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근 두어 달 동안 이곳에 올 때마다 늘 그랬듯, 마중 나와 있던 바네사가 활짝 웃으며 나를 폭 껴안았다.

“어서 와요, 에리카!”

“환영해 줘서 기뻐요.”

“어떻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봐도 봐도 이렇게 기분이 벅차오르는데.”

발그레하게 볼을 붉힌 바네사가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간질간질한 감정과 떨떠름한 감정이 공존하는 기분으로 볼을 긁적였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정말 이신아랑 똑같기는 한데…….’

킬리언은 저걸 보고도 진짜로 질투심이 안 생긴다고? 세이룬은 오늘도 ‘미인계: 수심편’으로 나를 성전에 못 가게 하려다 실패했는데?

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아이들이 지내는 방 앞에 다다랐다. 명세서를 확인하는 것은 저번 주에 이미 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똑같은 걸 볼 필요는 없어서 생략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자신들이 알고 있는 동요를 사피엔에게 열심히 가르쳐 주고 있던 아이들이 반색하며 이쪽을 돌아봤다.

“앗, 눈사람 공주님! 바네사 언니!”

“눈사람 공주님 왔다! 바네사 누나도 왔어!”

“언니들 보고 싶었어!”

아이들이 와다다 뛰어와 나와 바네사에게 안겼다.

나는 잔뜩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모두 보고 싶었어. 잘 놀고 있었어?”

“응! 나 사피엔 형에게 노래 가르쳐 주고 있었어!”

미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옆에서 바네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노래?”

“음,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밥 먹고 옷 갈아입고 책 챙겨서 선생님 만나는 노래!”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가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줬는데 웃으면 실례다, 에리카. 참아라.

옆의 바네사도 나와 사정이 같은지, 잠시 어깨를 떨며 아무 말이 없던 바네사가 이내 말끔한 얼굴로 생긋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우리 미키. 잘했네.”

바네사의 칭찬을 받은 미키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나는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사피엔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왜 저렇게 빤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지?’

처음 몇 번이라면 우연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마주친다면 우연이라고 하기 힘들지 않나.

내가 그 의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전이었다.

금세 눈꼬리를 휜 그가 인사하듯 내게 생긋 웃어 보였다. 의문을 구체화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계속되는 눈 마주침이 뭔가 찝찝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찝찝한 건지 딱 잘라 정의할 수 없어서 나는 일단 묻어 두는 쪽으로 경로를 틀었다.

뭐,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종류의 심각한 일이었다면 사피엔이 진작 말을 했겠지.

“미키, 혹시 에리카와 나한테도 노래 가르쳐 줄 수 있어?”

마침 바네사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미키에게 물었다. 나도 은근슬쩍 그 옆으로 다가가서 기대하는 눈빛으로 미키를 바라봤다.

“하지마안…….”

말꼬리를 늘린 미키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서 근처의 아이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시선을 받은 아이들도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누나들은 이미 아는 노랜데…….”

“배울 필요가 없는걸.”

“시시하다고 할 거야.”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우리가 재미없을까 봐 걱정해 준 것 좀 봐.’

아이고, 대견해라.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내가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는 동안,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바네사가 “아!” 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우리도 너희들과 함께 노래를 가르쳐 주면 되겠다!”

“와, 좋아! 난 찬성!”

“눈사람 공주님이랑 바네사 언니랑 같이 가르친다!”

아이들이 아군이 생긴 것처럼 좋아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다시금 사피엔과 눈이 마주쳤다.

사피엔이 황금빛 눈동자를 곱게 휘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에리카 선생님.”

“아, 네…….”

“물론 바네사 선생님도요.”

“물론이죠. 자, 얘들아. 그럼 어떤 노래 가르쳐 줄 거니?”

바네사가 다정하게 묻자, 미키 옆에 있던 벨라가 한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나 그거! 비가 그치고 날아가는 나비를 축복해 주는 노래!”

“앗, 좋아!”

“나도 좋아! 그걸로 하자!”

아이들이 저마다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들의 웃음은, 언제 봐도 보기 좋았다.

* * *

점심을 먹고, 아이들이 하나둘 낮잠을 자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바네사는 추기경 루시엘의 급한 부름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나는 사피엔, 요한과 셋이서 자기 몫의 이불과 베개를 꼬옥 품에 안고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잠자리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눕자, 나와 반대쪽에 앉아 있는 사피엔이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곤조곤 물었다.

“얘들아, 자장가 불러 줄까?”

응, 하고 아이들에게서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와신상담하고 있는 황자가 부르는 자장가라.’

가장 끝 쪽에 누운 세라의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사피엔을 바라봤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세스의 곱슬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사피엔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있는지

토독토독 작은 소리 들려와요

아이들이 이 자장가를 가르쳐 줄 때 아기를 재우듯 불렀기 때문일까.

자장가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텐데도, 잠자는 아이를 위해 노래하는 음색은 다정하면서도 고요했다.

쉬잇, 비 님 살금살금 내려 주세요

새벽달 걸려 있는 뜨락 나무 위

작은 아기 새가 아직 코 자고 있답니다

“사피엔 혀엉…… 이제 잘 부른다…….”

잠에 취해서 멍하니 중얼거린 세스가 방긋 웃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노곤노곤 눈을 깜박이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나긋하고 잔잔한 노랫소리에 스르륵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자장가 박자에 맞춰서 세라의 가슴께를 토닥이던 나는 문득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잘 부른다고 하는 건, 저번까지는 못 불렀다는 뜻이잖아.’

내 웃음소리를 들은 사피엔이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그렇게 못 부르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이 깰까 봐 염려되었는지,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변명했다.

그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것 같아서,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네, 믿어요.”

“……정말이에요.”

“믿는다니까요.”

“…….”

사피엔이 어쩐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세이룬이나 바네사라면 모를까, 굳이 귀찮게 진심이라고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완전히 잠이 든 세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가다듬어 준 뒤 손을 물리는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사피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카는, 드레인 대공과 사이가 좋은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내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별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시선으로 사피엔을 잠시 바라보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서로 죽고 못 사는걸요.”

“아……. 보통 고위 귀족은 정략혼이 흔하잖아요. 사이가 좋다니, 뭔가 신기하네요.”

사피엔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에리카는 드레인 대공이 왜 좋나요?”

“귀엽잖아요.”

“……네?”

대화 주제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세이룬으로 옮겨 가자 갑자기 대화 의욕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세이룬이 얼마나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깜찍한지 알려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예 몸까지 그에게로 돌리고는 흥분해서 속사포로 빠르게 뱉어 냈다.

“사피엔도 저번에 봤잖아요, 우리 세이룬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저는 처음 봤을 때 정말로 하늘에서 선남이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비단결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 별빛처럼 반짝이는 금빛 은빛 눈동자! 거기다가 앵두를 닮은 붉은색 입술은 얼마나 예쁘게요?”

“……아.”

“정말로, 이 세상 모든 미인에 관한 수식어는 전부 세이룬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요. 성격은 뭐, 말할 것도 없이 귀여움이란 단어가 그냥 성격으로 화했죠. 사람이 어쩜 그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진짜로, 경국지색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황제였다면 이미 국정은 세이룬 손에서 놀아나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세이룬을 생각하자 갑자기 막 행복해졌다. 내가 웃음을 주체 못 하고 실실 웃고 있으려니, 잠시 침묵하고 있던 사피엔이 다시금 물어왔다.

“에리카는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나요?”

“……음, 그렇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사피엔이 생긋 웃으면서 또 물었다.

“그럼, 저는요?”

“네?”

“저는 안 귀엽나요?”

그가 뻔뻔하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피엔은 나의 복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장기짝이었고, 굳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천사병 연기를 할 때처럼 그의 기분에 완전히 맞춰 줄 필요는 없으니까.’

내 안에서 적절한 타협을 마친 나는 비장한 얼굴로 사피엔을 마주 봤다.

“귀엽다고 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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