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9)

99화

* * *

휴블린 공작저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듯 마차는 가문의 인장을 수수한 갈색 천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마차의 주인은 원래부터 방문이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시게, 베네로사 후작.”

응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휴블린 공작이 인사를 건넸다.

마차의 주인, 베네로사 후작은 공작의 맞은편에 앉은 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건국제 이후로 처음이군.”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열흘 만이었다.

황실의 눈을 피하고자 사용인을 최소화한 응접실에는 미리 준비해 놓은 간단한 다과가 갖춰져 있었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잠시 침묵하던 휴블린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세네카 소공작이 번역했다던 경전을 읽어 보았는가?”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망설이던 후작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 누가 신의 말씀을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그대를 불렀는지도 짐작했겠군.”

“…….”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이 얼마나 독실한 신자였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렇게 정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내 평생에 킬리언이 처음이었으니까. 사람 자체도 꼿꼿한 대나무처럼 올곧기 그지없는 성정이고.”

“세네카 소공작이 이레알 어를 독학으로 배웠다는 것도 이미 유명한 사실이죠. 구교파 귀족이라면 세네카 공작의 아들 자랑을 듣지 않은 이가 없을 테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미미하게 끌어올렸던 후작의 얼굴에서 다시금 웃음이 지워졌다.

“……그런 소공작이 무려 경전을 거짓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 테고요.”

“세네카 소공작은 차라리 자신을 해치면 해쳤지, 결코 제 신념을 배반할 인물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 경전을 번역하여 신의 말씀을 온 세상에 알리고 스스로 구교파를 나갔어.”

잠시 말을 멈춘 공작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대도 짐작하고 있지 않나.”

“…….”

후작은 대답 없이 앞에 놓인 냉차를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삶의 근간을 본인의 입으로 대놓고 부정할 용기는 아직 없었다.

“……지난 건국제 이후, 녹셰에 드레인 대공비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무거운 말을 속으로 삼키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내심 마음이 불편했던 공작도 바뀐 화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대공비에 대한 학대는 사실이던가?”

“네, 사실이었습니다. 녹셰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대공비는 현 셀루리아 후작의 동생인 할리아 르 셀루리아와 한 천민 남성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마 셀루리아의 혈통에 천한 피가 섞이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던 후작가에서 대공비를 학대한 것 같습니다.”

“……펠리페 그 망할 작자가 제 누이동생의 재산에 눈독 들였던 거로군. 조카를 혼인 시장에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생각도 한 모양이고.”

제 조카를 통해 득을 보기로 마음먹었으면, 제 조카의 결함도 곱게 품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이를 간 휴블린 공작이 냉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분을 내는 공작을 짧게 응시한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직접적인 구타는 없이 정서상의 학대로 일관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대공비께서 학습에 두각을 드러내자, 15세 무렵부터는 레틸기스 즙까지 꾸준히 먹였다고 해요.”

“……레틸기스?”

공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레틸기스 열매는 먹으면 점점 생각이 둔해지고 머리가 멍청해지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장기간 섭취하면 급기야는 자아를 잃고 다른 사람의 말만을 기계처럼 따르게 하는 독이었다.

자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나’임을 포기한다는 것. 긍지 높은 귀족으로서는 가장 절망적인 모욕이었다.

“……아무리 비천한 피가 흐르고 있다 해도 그렇지, 누이동생의 딸이 아닌가.”

품어 주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거둬서는 안 됐다. 레틸기스 즙을 먹이다니, 어떻게 제 친조카에게 반송장처럼 살게 할 수가 있나?

휴블린 공작이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냉차를 몇 모금 들이켠 후작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건국제에서 조카의 뺨을 내리친 가문입니다. 얼마나 대공비를 업신여겼으면 황제께서 계시는 축제에서조차 조카에게 손찌검을 하겠습니까.”

“황가를 사돈으로 두었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공작이 다시 눈을 뜨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테이블 위로 살짝 몸을 숙인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도, 사돈의 편을 드는 것 같고.”

“……셀루리아에서 대공비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였다는 걸 황가에서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대공비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실임에도, 황제께서는 대공비께 정말 뺨을 맞았냐고 하문하셨지요. 대공비께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으니.”

후작이 녹색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때, 응접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 세멜라입니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긴장해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던 휴블린 공작이 긴장을 풀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도록.”

“카스텔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세멜라 남작이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도록.”

허락이 떨어지자, 세멜라 남작이 카스텔 후작을 응접실 안으로 안내했다.

평소에 즐겨 하는 화려한 머리 모양이 아닌, 그저 하늘색 머리카락을 수수하게 하나로 묶기만 한 카스텔 후작의 모습은 이 방문이 공식적인 방문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수상한 기척이 느껴져서 따돌리느라.”

후작이 자리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휴블린 공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감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것 같군.”

“모임을 열지 않았는데도 감시를 한다는 건,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는 뜻이고요.”

베네로사 후작이 눈동자를 내리깔며 덧붙이자, 카스텔 후작이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황실은 대놓고 대공가를 압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국의 방패마저 그렇게 억압당하는데, 그보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우리 개개인을 감시하는 것쯤이야 가소롭지요.”

신랄한 평가에 휴블린 공작과 베네로사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신랄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응접실을 맴돌았다. 그 침묵 가운데에서,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로서 황제를 세우신다고 하였지.”

두 후작의 시선이 공작에게로 향했다.

공작의 느릿한 목소리가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최근 들어, 이런 의문이 들더군.”

“…….”

“황제의 뜻이, 정말 신의 뜻일까.”

순간, 두 후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구족이 멸해도 할 말 없는 소리였다. 기묘한 긴장감이 응접실의 공기를 팽팽하게 당겼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겨우 억누른 베네로사 후작은 떨리는 손을 뻗어 천천히 냉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스륵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신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지요.”

건국제에서 황제와 황후가 대공비를 입막음한 것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이는 곧, 공작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

제 앞에 놓인 냉차를 단숨에 마셔 버린 카스텔 후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운 찻잔의 표면을 쓸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피엔 황자께서, 건국제에 참석하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베네로사 후작의 눈동자와 휴블린 공작의 눈동자가 모두 카스텔 후작에게로 향했다.

카스텔 후작이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책임지고 사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피해자를 입막음한 누군가보다 훨씬 ‘정의’에 가까웠다.

……그분이 백치만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중얼거린 사람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세 명인지, 그도 아니면 속 안에서만 흐르고 만 말인지 알지 못했다.

자유롭지 못한 티타임은 평소보다 이르게 파했다.

의구심과 정의감은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마음속 일렁임으로 남았다.

* * *

첫날 이후로, 나는 요 두어 달 동안 꾸준히 신교의 성전에 방문해서 아이들을 만났다.

곧 다가올 황가의 공격을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기도 하고.

참고로, 초반 한 번은 세이룬도 같이 방문했었는데, 만나기만 하면 벌어지는 세이룬과 바네사의 신경전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이후로는 나 혼자서만 방문했다.

‘……세이룬이 멀쩡히 있는 사피엔도 죽일 듯이 노려보긴 했지만, 사피엔이 대처를 잘해 준 덕분에 곤란한 상황은 피했지.’

물론 저택으로 돌아와서 세이룬을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지만, 자기 질투가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데 내가 어떻게 혼을 내!

그래서 아예 혼낼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세이룬은 저택에 떨어뜨려 놨는데, 그 이후로 평화가 찾아온 것을 보니 잘한 선택인 듯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휙휙 바뀌는 마차의 창문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황가는 대체 언제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을 심산인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신교파 귀족들에게 투자 명목으로 자금을 대 주면서 숨통을 틔워 주고 싶었지만, 그런다면 황가가 행정권을 무기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국가의 경제 성장이 멈추는 건 당연히 황가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테고, 황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체사를 통해서 무슨 꿍꿍이인지 캐 보려고 해도, 방음이 잘 되는 방에 황족끼리만 똘똘 뭉쳐서 대화를 나누는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갈 빈틈조차 보이지 않아 불가능했다.

‘그냥 사이좋게 자멸하자는 건가.’

내가 황가를 상대로 치킨 게임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아니다. 아무도 기권하지 않아서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나는 죽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치킨 게임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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