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어지간히도 똥줄이 탔나 봐요. 바네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쪽도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 모양이에요. 어차피 걸러질 걸 뻔히 알면서 왜 계속 불필요한 희생을 늘리는 건지. 황가는 사람 목숨이 장난감인가.”
“아무래도 장난감으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세금으로도 장난을 쳤잖아요?”
차갑게 입꼬리를 비튼 바네사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한숨처럼 중얼거린 나는 눈을 내리깔고 내 앞에 놓여 있는 후원금 사용 명세서를 내려다봤다.
구입한 물품 내역은 이전과 같았지만, 그에 사용된 금액은 이전 금액보다 1.5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나흘 전, 빈센트는 내게 황가에서 기존의 세금 정책을 공격적으로 변경했노라고 알려 왔다.
나라의 화폐 유통을 묶어서 경제 성장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고육지책인 이 정책은 정확히 신교와 신교파만 겨냥한 공격이라, 구교파와 일반 평민들에게는 걷은 세금을 일정 기간 뒤 다시 돌려줌으로써 세금 인상이 불러올 반발을 최소화했다.
이에 더하여, 세금을 돌려줄 때는 ‘포상’ 형태로 지급했기 때문에 황가는 구교의 지지 하락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가라앉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호감까지 얻었다.
‘완전 조삼모사잖아. 아침에 3개 주고 저녁에 4개 줬더니 작게 준다고 화내서, 아침에 4개 주고 저녁에 3개 주는 거로 바꿨더니 좋아라 했다는 거.’
뭐, 당장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라에서 ‘상’으로 돈을 준다는데 싫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어쨌든, 이 때문에 나와 신교의 움직임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민심이 황가에 우호적으로 변했고, 현 상황에서 섣불리 금전을 움직이는 것은 세금만 왕창 뜯겨서 황가의 배만 불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업을 굴리고 있는 신교파의 중하급 귀족들은 자금 기반이 탄탄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황가의 장난질에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지 세력 기반이 위축되었는데 발이 묶이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명세서에 적혀 있는 총 금액란을 손끝으로 슬쩍 쓸었다.
이게 만약 구교의 후원금 사용 명세서였으면, 세금 인상으로 인해 더 사용된 금액은 황가로부터 포상 형태로 돌려받았겠지.
“이거 상당히 기분 엿 같네…….”
인류 문명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되어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 뽑기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다니, 엘리트층이 그걸 보고 얼마나 고까웠겠냐고.
“황가도 이건 시간만 벌 수 있는 임시방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진짜 공격은 차후에 등장하겠죠.”
바네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적절한 명분을 만들어서 드레인이나 신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려는 심산일 거예요. 물론 완전히 제거하는 건 어려울 테니 세력 약화를 목적으로요. 어쩌면 세대교체를 의도할 수도 있고.”
이렌텔의 이름을 유지하되 후계자만 바꾼다는 생각은 나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드레인 대공가와 신교의 껍데기는 유지하되, 그 알맹이를 그들의 입맛대로 바꾼다는 생각을 말이다.
아무리 드레인 대공가가 군력으로 제1인자의 위치를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대공가의 병력 대부분은 국경을 방비하는 데 치중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면에 나설 일이 없어서 그렇지 황가 또한 나름의 정예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가는 수도에서 드레인과 정면으로 맞붙어도 절대로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건 드레인의 기사들이 모두 수인족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가능한 판단이지만.’
어깨를 으쓱인 나는 점점 살벌해지고 있는 바네사의 표정을 보고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사피엔 황자 전하는 잘 지내고 계시나요?”
“네, 잘 지내고 계세요.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시고요.”
“……아이들과요?”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토록 티가 났나요, 대공비 전하?”
그 말과 함께 짓던 웃음에서 느껴진 오한이 아직도 생생한데, 음. 사피엔이 아이들과 잘 지낸다고…….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은 바네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제안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어차피 아이들을 보고 갈 예정이었으니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바네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 * *
“……그래서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 준 용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 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있는 방의 문을 열자, 동화책을 읽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따스한 햇살이 포근하게 밀려드는 공간과 조곤조곤한 어조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말은 정말인 듯, 사피엔은 아이들 속에 폭 파묻혀서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피엔이 읽어 주는 동화책에 어찌나 흠뻑 빠져 있었는지, 문이 열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네. 동화책도 실감 나게 잘 읽어 주고.’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는 사제 요한이 나와 바네사를 발견하고 입술을 달싹이려 했다. 나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소리 내지 말라는 내 뜻을 알아차린 요한이 복종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바네사와 함께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어가 아이들 뒤편에 살포시 앉았다.
따뜻한 공간에서는 여전히 사피엔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처럼 들려오는 동화책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사피엔을 살펴봤다.
아이들과 놀기 쉽게 하나로 묶어 내린 푸른색 머리카락은 햇살의 부드러운 빛깔이 엷게 번져 있었고, 사붓이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로는 황가를 상징하는 금안이 나긋하게 동화책을 훑고 있었다. 섬세한 미인의 하얀 얼굴에서는 나른한 여유가 배어났다.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물 흐르듯 들려왔다.
“……그러자 용이 말했어요. ‘저는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
모든 것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공간 속에서, 목소리 또한 느릿하게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무릎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이는데,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동화책을 읽는 붉은색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늘, 당신을 생각했어요.’”
사피엔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사피엔의 시선이 동화책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들이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나와 바네사를 발견했다.
“앗! 눈사람 공주님과 바네사 언니다!”
“눈사람 공주님, 바네사 누나! 언제 왔어?”
“언니들도 사피엔 오빠가 동화책 읽어 주는 거 들으러 왔어?”
아이들이 저마다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나와 바네사 곁으로 오도도 몰려들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당연히 너희들 보러 왔지. 다들 잘 지냈어? 세스는 저번에 팔 다친 거 다 나았고?”
“히히, 응! 봐 봐라. 이젠 하나도 안 아파!”
세스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팔을 짠하고 내밀었다.
그러면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꼭 칭찬을 바라는 멍뭉이 같아서, 나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축하해, 세스. 다음번에는 아프지 말자, 알았지?”
“응, 알았어!”
쓰다듬을 받은 세스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붕붕 끄덕이자, 주위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더욱 내게로 더욱 몰려들었다.
“앗, 나도! 나도 쓰다듬어 줘!”
“나도 축하해 줘! 나도 공주님 축하 받을 거야!”
“세스 부러워! 나도 다칠래!”
아우성치며 몰려드는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이리저리 휩쓸리기 바빴다.
“세라, 다친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겨우 정신을 붙들며 옆에 앉은 바네사에게 눈빛으로 구원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바네사는 예의 그 온화함과 인자함을 곁들인 뻔뻔한 얼굴로 내게 생긋 웃어 주기만 할 뿐, 내 열렬한 눈빛에는 전혀 대응해 주지 않았다.
힘내세요, 에리카.
그렇게 입 모양으로 속삭이면서.
‘이, 나쁜…….’
그래, 본인 고통 아니다 이거지. 아무리 온화함과 인자함을 곁들여 봤자 결국엔 이신아가 만들어 낸 교황이라 이거지.
내가 그렇게 아이들의 성화에 시달리며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세라, 네가 다치면 공주님은 무척이나 슬퍼하실 텐데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사피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라에게 물었다.
세라는 내가 슬퍼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지 충격받은 얼굴로 휙 사피엔을 돌아봤다.
“고, 공주님이 슬퍼해요……?”
“그럼, 공주님은 세라를 좋아하시는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면 슬프니까.”
“아…… 그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럼 나 안 아플래.”
“잘 생각했어, 세라.”
사피엔이 다정하게 웃으며 세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칭찬과 쓰다듬을 받은 세라가 행복하다는 듯 헤헤 웃었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그게 아닐 텐데……?’
그때, 문득 사피엔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금안이 곱게 휘어졌다. 대놓고 내게 보내는 웃음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도 마주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황자 전―”
“사피엔이에요. 제 이름.”
“……네?”
그걸 누가 모르나?
이상한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사피엔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덧붙였다.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모두가 그렇게 하거든요.”
그러면서 아이들을 눈짓하는 행동에, 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이들 앞에서 ‘황자 전하’니 ‘대공비 전하’니 하며 예를 차리는 것은 딱딱하게 보이겠지.
“네, 사피엔. 안녕하세요.”
이름으로 바꿔 부르며 다시 인사하자, 그제야 사피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오랜만이에요, 에리카.”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인사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