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39)

97화

정도의 대명사로 유명한 세네카 소공작이 직접 번역했다고 알려진 경전의 이렌텔 어 번역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쉬운 어휘로 서술되어 있어서 평민이라도 글만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레알 교를 믿는 평민들은 신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보고 싶은 마음에 저마다 번역본을 구매해 읽었고, ‘성스러운 신의 말씀은 세속의 언어로 더럽히지 말자’는 교단의 암묵적 합의를 아는 귀족들도 겉으로는 구매하지 않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모두 번역본을 사들여 읽었다.

암묵적 합의 같은 구닥다리를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한발 더 앞설 수 있는 정보를 포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에 따라 경전의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경전과 구교 교황의 설교 간의 괴리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면서, 사람들, 특히 구교파 내에서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하급 귀족들이 구교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신교에 대한 지지도는 점진적으로 상승했는데, 이렌텔 내의 이레알 교는 구교 아니면 신교였으므로 구교가 흔들리자 상대적으로 신교가 단단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세네카 공작 가문이 이렇게 곧장 구교파로부터 돌아설 줄은 몰랐는데.’

에스로타는 세사르의 3층 다실에 홀로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창밖에서는 봄을 맞아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들이 아무런 시름 없이 거리에 하늘하늘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세네카 소공작은 제국에서 올곧음의 대명사로 유명한 만큼 가문 내에서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그런 소공작이 구교의 타락이라는 명분으로 구교파를 나와 중립으로 설 것을 주장하는데, 세네카 공작이 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구교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무려 제 친조카를 학대하지 않았는가.

물론 황실이 나서서 수습한 덕분에 공식적으로 셀루리아의 학대는 발생하지 않은 것이 되었지만, 그간 대공비의 기묘한 행동을 종합할 때 셀루리아가 학대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를 감싸 주려는 구교파의 실질적 수장인 황실과 구교에 대한 반감만이 더 커졌을 뿐.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사피엔 황자에 대한 묘한 소문이 번져 가고 있었다. 바로, 사피엔 황자가 실종되었다더라는 내용의 소문이었다.

셀루리아의 학대 사실을 황실이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기 시작한 황자의 실종 소문은, 분노한 드레인 대공이 황자와 접촉할까 우려한 황실이 한발 앞서 황자를 제거한 것이라는 또 다른 소문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셀루리아 학대 은폐로 추락한 황실의 이미지가 더욱 실추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구교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있는 거지?’

날 때부터 구교를 믿고, 구교만이 정도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오지 않았는가.

에스로타가 테이블 위에 얹은 손에 꽉 힘을 주었을 때, 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문하신 밀크티와 오이 샌드위치입니다.”

“들어와.”

에스로타가 짧게 허락을 내뱉자, 트레이를 든 직원이 안으로 걸어왔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직원은 빠르고 정확한 손동작으로 홍차를 진하게 우리기 시작했다.

진하게 우린 홍차에 설탕과 적당량의 우유를 섞은 직원은 뒤이어 오이 샌드위치를 세팅한 뒤 곧장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에스로타는 느린 동작으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정신만 사나워지는 저택에서 나와 달콤한 것을 들이켜니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각하, 세레스 아케넨입니다.”

“……들어와.”

에스로타는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보좌관 세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스로타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레스를 노려보았다.

“잠시 머리 좀 식히겠다고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각하. 하지만 당장 확인하셔야 하는 사안이라. 부득이하게 지금 보고드리는 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경정예산안?”

세레스가 건네는 서류철을 받아 든 에스로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산은 작년 말에 모두 부족함 없이 편성되었을 텐데?”

“황가의 시책이 갑자기 변경되었습니다. 조세가 급격히 상승하였는데, 화폐 유통과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특히 심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당초에 정했던 본예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세레스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듣던 에스로타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규제?”

저 규제가 누구를 겨냥한 규제인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서류철을 꽉 움켜쥔 에스로타의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가 뜬 에스로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상전을 불렀다.

“각하?”

“귀택할 거야. 세레스, 너는 도착하면 곧장 집사에게 공작저를 정리하라 이르도록 해. 그다음엔 영지의 성에 전갈을 넣도록 하고.”

“전갈이라 하시면……?”

세레스의 눈동자가 파문 일듯 흔들렸다.

길게 흘러내린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한 차례 정리한 에스로타의 녹금빛 눈동자가 세레스를 향했다.

“정계를 떠나 영지로 내려가 은거할 예정이니, 준비해 놓고 있으라 전해.”

“예?”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반문한 세레스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세레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에스로타는 클록을 입고 후드를 쓴 뒤 다실 밖으로 나갔다.

결제는 세레스에게 맡긴 뒤 세사르 밖으로 나가려던 에스로타는 문득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에 시선을 주었다.

고풍스러운 액자에 담겨서 세사르의 1층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은, 얼마 전 대공비가 스레인 화백에게서 구입했다고 알려진 ‘위대한 타할린 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였다.

“……영웅의 말로치고는, 정말 보잘것없네.”

멍하니 중얼거리던 에스로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때는 위대했다던 저 배의 초라한 모습이, 어쩐지 구교의 미래와 겹쳐 보였다.

* * *

베이센 공작 가문이 구교파에서 나와 중립으로 전향했다.

일전에 빈센트에게서 전해 들었던 황실의 귀여운 수작질이 까맣게 잊힐 만큼, 베이센의 중립 선언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왜? 에스로타는 대체 왜 중립으로 돌아선 거야?”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방금 에스로타에게서 온 서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빤히 서신을 바라봤자 에스로타의 속마음이 읽힐 리가 없었다.

“구교의 신자로서 자랐기 때문에 구교를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와 함께 싸워 줄 수 없어서?”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미안한 거냐고 대체.

에스로타가 구교를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구교가 세상의 진리라 믿고 자라왔을 텐데, 그 사고를 어떻게 단기간에 뒤엎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로 볼 때, 나와 함께 싸워 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오히려 구교를 공격하려는 나와 대적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킬리언처럼 변수가 생기지 않고서야, 뼛속까지 구교의 신자인 에스로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뭐…… 나야 에스로타와 칼을 맞대지 않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멍하니 중얼거린 나는 다시 손에 들린 서신을 읽어 내렸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긴 맞는 듯, 서신에는 여전히 베이센은 구교파에서 나와 중립으로 전향한 뒤 영지로 내려가 은거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의 고통을 알면서도 함께 싸워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뭔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네.’

에스로타에게 보낼 답신을 적어서 타한에게 건넨 나는 뒤이어 포카와 레비나의 시중을 받으며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건국제 이후 처음으로 내가 외출하는 날이자, 신교의 성전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건국제 연회 이후부터 열흘간, 뭔가에 충격받기라도 한 것처럼 대공저에만 콕 틀어박혀 지내던 나는 첫 외출로 신교 성전에서 후원하는 아이들을 보러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 행보는 사람들에게 대공비가 어렸을 적 학대를 받았던 기억 때문에 본인처럼 학대받은 아이들을 후원하고, 그 아이들을 돌보러 가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후원하는 아이들에게서 어렸을 적 본인의 모습을 겹쳐 보는 대공비가, 아이들을 돌봄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고.

그들은 그런 나를 동정할 테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바가 없지는 않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짐작은 틀렸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겹쳐 보기 때문에 그 애들을 후원하거나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건 많이 아픈 거니까.

그런 엿 같은 고통은 나만 겪어도 충분하니까. 그 애들은 겪지 말라고.

단지 그걸 바라는 마음에서.

‘학대당한 애들을 후원해 주고 도와준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가진 상처가 치유되겠어. 그냥 한 명이라도 내가 느꼈던 고통을 안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거지.’

어깨를 으쓱인 나는 레비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바람이 불어와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나는 창밖을 보며 흩날리는 여린 꽃잎들을 응시했다.

지금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저 바람은, 한때 나뭇가지에서 꽃을 피웠을 봄바람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입 안 한 구석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 * *

“에리카! 보고 싶었어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바네사에게 끌어안겼다.

예상보다도 격한 환대에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푸스스 웃으며 바네사를 마주 안았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바네사.”

“그렇게 말해 주니 기뻐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아이들도 에리카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를 품에서 떼어 놓은 바네사가 빙긋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나는 바네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입구에서는 곧바로 아이들을 보러 갈 것처럼 말했지만, 우리가 향한 곳은 교황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늘 그랬듯, 후원금의 사용 명세서를 내게 건네준 바네사는 내 맞은편에 앉자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요 열흘간 평소보다 세작이 배 이상 증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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