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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39)

96화

“감사합니다, 폐하.”

황후의 다정한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현재 나는 황족 전용 휴게실에 황후와 단둘이 대면하고 있었다. 황제는 내가 불편할 거라는 이유로 황후가 내보냈기 때문에 쫓겨나듯 다른 휴게실로 가야 했다.

내가 찻물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을 확인한 황후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내 시녀에게 오늘 소란은 간략하게 전해 들었네. 오늘 그대에게 닥친 ‘사고’는 심히 유감이야.”

나는 찻잔을 손에 쥐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줄곧 나를 응시하고 있던 황후의 분홍색 눈동자가 매끄럽게 휘었다.

“그런데 드레인 대공은 오늘 ‘우연찮게’ 발생한 사고를 그대의 친정 가문인 셀루리아의 탓으로 돌리지 뭔가.”

“…….”

“그대를 걱정하는 대공의 마음은 익히 이해가 가는 바이네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정황만으로 셀루리아를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아. 오늘 대공은 일방적으로 가문의 이미지를 폄하했네. 황실은 사돈 가문에 대한 대공의 무례를 좌시할 수 없어.”

잠시 한숨을 내쉰 황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도 내 사돈이고, 대공은 그대의 남편이지 않은가. 하필 테라스에서 셀루리아 후작 부인과 둘이 있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 그대를 끔찍이 아끼는 대공의 눈에는 그대의 사고가 후작 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네.”

말을 멈춘 황후가 문득 시선을 내려 아직 차가 많이 남은 내 찻잔을 응시했다.

“이런. 대공비에게 약차를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내가 말을 많이 하느라 찻물의 양이 아직도 그대로군. 그대는 부담 없이 차를 들도록 해.”

“아…… 배려에 감사드려요, 폐하.”

수줍게 미소 지은 나는 황후가 똑똑히 확인할 수 있도록 천천히 찻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황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내 사돈을 위하는 대공의 마음을 봐서, 나는 이 일을 관대하게 넘어가고자 해. 단, 착하고 상냥한 그대가 내 부탁을 몇 가지 들어주는 조건으로 말이야. 조건은 ‘실수’가 다시 되풀이되면 안 되기 때문에 붙이는 것이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네.”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진심으로 안도한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런 나를 만족스럽게 바라본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은 간단해. 오늘 대공의 발언으로 인해 귀족들은 셀루리아를 가녀린 조카딸을 학대한 파렴치한 가문으로 인식하겠지.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지 않나. 앞으로는 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말고, 혹여 다른 곳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거든 부정해 주게. 물론, 대공이 셀루리아 후작가를 모욕하는 것도 멈추게 하도록 하고.”

대공은 그대를 매우 아끼니, 그대의 말이라면 분명 들어줄 걸세. 황후가 그리 덧붙이며 말을 맺었다.

찻물을 홀짝이며 조건을 듣고 있던 나는 황후의 말이 끝나자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꼭 그리하도록 할게요.”

“고맙네. 상냥하고 착한 내 사돈.”

흐뭇하게 웃은 황후는 그제서야 제 앞에 놓인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였다.

“대공비 전하, 안에 계신지요.”

똑똑 소리와 함께 밖에서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이번 연회의 하이라이트가 찾아왔구나. 찻잔 뒤로 사악한 웃음을 삼킨 나는 발랄한 목소리를 꾸며 내며 입을 열었다.

“응, 있어!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문이 열렸다.

황후는 자신보다 아랫사람인 내 허락만으로 문이 열리자 심기가 상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한층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황후 폐하. 일전에 제가 폐하께 드리고자 하는 선물이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물론, 기억하고 있다마다.”

“이게 바로 그 선물이에요.”

열린 문으로 빈센트가 내게 다가와 하얀색의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를 건네주었다.

선물 상자는 오늘 나의 콘셉트처럼 하얀 리본과 보석들로 장식해 어딘가 순결하면서도 성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손에 들린 상자를 황후에게 내밀었다.

“이제야 폐하께 드릴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제가 폐하를 위해서 힘들게 공수해 온 귀한 선물이니, 부디 받아 주시겠어요?”

제 허락 없이 열린 문에 대한 불쾌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듯, 황후의 얼굴에 기대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내 안정을 핑계로 시녀와 시종도 모두 물린 까닭에 직접 제 앞의 찻잔을 옆으로 물린 황후는 차분한 손길로 내가 내민 선물을 받아 들였다.

“선물은 지금 풀어 보아도 되는가?”

“그럼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후의 곱고 단정한 손가락이 상자의 하얀 리본을 풀었다. 사륵사륵, 비단 스치는 나긋한 소리가 휴게실 안을 부드럽게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황후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 양장 표지에 금과 은, 흑진주와 블랙 다이아몬드로 고풍스럽게 장식한 책은, 책을 포장하고 있던 하얀 상자와 대조되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책……?”

“경전이에요.”

불현듯, 책장을 넘기려던 황후의 손이 움찔 멎었다.

나는 양손을 맞잡고 그 위로 턱을 괸 채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오늘 내가 천사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차림을 한 것은, 오늘이 천사병 콘셉트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경전……?”

“황후 폐하께서는 이레알 교를 무척이나 사랑하시잖아요. 하지만 이레알 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전을 읽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마음 아파서, 폐하께서 직접 읽으실 수 있도록 경전의 이렌텔 어 번역본을 구해 왔답니다.”

천사병 콘셉트가 끝난다는 것은 곧, 황가도 내 본모습을 알아차린다는 것.

즉, 내가 황가에게 정식으로 선전 포고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전을 손에 든 황후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렌텔 어, 번역본이라…….”

“물론 신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니, 내용에 오류가 있으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네카 소공작께서 직접 번역에 임해 주셨거든요.”

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지금 나는, 구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노라고.

제 손에 들린 경전의 표지를 천천히 쓰다듬던 황후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고, 순식간에 맑은 웃음소리가 휴게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 하하…… 세네카 소공작의 참여라.”

“네. 정말 감사한 분이시지요.”

“대공비가, 이토록, 사려 깊을 줄이야. 미처 몰랐군. 내 패착이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황후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저의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내 말을 들은 황후의 분홍빛 눈동자에 일순 살기가 어렸다. 나는 느긋한 얼굴로 그 눈동자를 맞받아쳤다.

며칠 전, 나는 빈센트에게 건국제 연회가 열리는 시각을 기점으로 이렌텔 어로 된 경전의 판매를 개시하도록 지시했다. 지금쯤 전국의 지점에서는 경전 번역본이 저렴한 값으로 한창 판매되고 있을 터였다.

황가는 이미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했다. 경전 번역본을 전권 회수할 수도, 번역본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을 테니까.

“……참, 깜찍한 연기를 했어. 대공비.”

여전히 웃음 서린 얼굴로 황후가 씹어뱉듯 말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황후의 눈동자를 태연하게 마주하면서 나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변변치 않은 재주가 황후 폐하께 웃음을 드렸으니, 전 그것으로 만족해요.”

아무렇게나 말을 던진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흘끗했다. 지금쯤이면 사피엔은 황궁 밖으로 무사히 빼돌려졌겠지.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리디아입니다.”

“들어와.”

황후가 짜증스럽게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리디아란 이름의 시녀는 곧장 황후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뢰기 황공하오나,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황후 폐하를 급히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황태자비와 같이 있는 황태자가, 말이지.”

여전히 웃음만은 잃지 않고 있는 황후의 날 선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웃음으로 답한 나는 보란 듯이 황후의 앞에서 약차를 모두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셀루리아와 나눌 이야기가 무척 많으신 듯하여, 저는 이만 물러나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말 없는 시선이 나를 집요하게 좇았지만, 나는 해맑은 웃음을 끝까지 유지한 채 황후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고는 휴게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니,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세이룬이 복도에 서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카.”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음 지은 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대가 돌려주신 날개옷을 입고 에리카를 찾아왔습니다.”

내게 그리 속삭인 세이룬이 칭찬을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 귀여운 사람. 피식 웃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나한테 남겨 놓은 표식을 쫓아 왔구나?”

“……네.”

얼굴을 붉힌 그가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나는 다시금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목에 남긴 표식을 통해 선남이 천사의 곁에 돌아온 것으로, 천사병 콘셉트는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7. 우상파괴자

건국제로부터 1주일 뒤, 세네카 공작 가문이 구교파에서 벗어나 중립을 선언했다.

청백하고 올곧기로 유명한 세네카의 구교파 탈퇴는 사교계는 물론,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청렴한 공작가가 몇백 년을 몸담고 있던 구교파에서 탈퇴하다니, 혹시 구교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닐까?’

발보다 빠른 항설이 실체 없이 이렌텔을 떠돌았다.

그 항설에 뼈대를 더해 준 것은 바로 전국 각지에서 싼값에 판매되는 경전의 번역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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