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내 대답에, 헛숨을 들이켠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이들은 분명 아까 전의 사피엔의 사과와 지금의 황제의 협박을 저울질하며 비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정의’에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겠지.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왼뺨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술. 맞아요. 술을 마셨는데, 갑자기 어지러워서 미끄러졌어요. 잘못해서 벽에 부딪혔는데, 이건 그때 생긴 상처예요.”
물론, 이 자리에서 내 말과 변명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만족스러움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뒤, 짐짓 염려가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많이 아파 보이는데, 황궁의 어의에게 보이는 것은 어떤가?”
“그 정도로 심한 부상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폐하.”
“신하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군주의 덕목이니 당연한 일이지.”
황제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개입은 모두 차단하겠다는 것처럼 황후가 곧장 입을 열었다.
“대공비. 그대가 아무리 괜찮다지만, 딸 같은 며느리의 사촌이 다쳤는데 내가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
황후가 안타까운 얼굴을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쥔 채로 말을 이었다.
“연회를 더 즐기는 것은 무리인 듯하니, 나와 함께 휴게실로 가 차를 한잔하는 것은 어떤가? 그대가 어의를 거절하니,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차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약차는 무슨, 황후가 대접하는 차라면 뻔할 뻔 자 아닌가.
‘황가는 셀루리아를 감싸기로 결정은 했지만, 아직 서로의 정보를 모두 공유하진 않은 모양이네.’
나에게 레틸기스 즙이 통하지 않는 것도 모르는 걸 보면 말이지.
속으로 비웃으면서, 나는 기쁜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도 되나요……?”
“내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토닥인 황후의 시선이 문득 내 옆에 있는 세이룬에게로 향했다.
“대공비는 내가 잘 다독일 터이니, 대공은 걱정 말고 연회를 더 즐기도록 하게.”
“싫―”
“갔다 올게요, 전하. 괜히 저 때문에 전하께서 연회를 즐기지 못하는 건 싫어요.”
얼굴을 찡그리며 거절하려는 세이룬의 손을 황급히 붙잡은 내가 얼른 입을 열었다. 맞잡아진 손을 꼭 쥐었다가 놓자,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나직이 한숨을 흘리며 천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남은 온기라도 최대한 오래 간직하려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쥔 세이룬이 속삭였다. 오늘따라 그가 유독 한숨을 많이 쉬는 것 같아 괜히 양심이 쑤셨다.
“네, 걱정 마세요.”
그래도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황후와 황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스쳐 가는 귀족 중 몇몇이 걱정이 담긴 시선을 내게로 던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런 건 하나도 보지 못한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 * *
“비,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카리에의 손에 이끌려 황족 전용 휴게실 중 한 곳으로 들어간 칼릭스가 자신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잘못 보지 않았다면, 분명 1층의 테라스 근처에서 일어난 소란은 대공비와 관련한 것이었다.
‘들리던 비명 소리로 미루어 보아서는, 대공비가 뺨을 맞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 소란을 통해 대공가의 약점을 얻거나, 대공비 혹은 대공 개인에게 짐을 지워 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 소란이 대공비에게 유리한 쪽이었다면, 그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이로울지 두 눈으로 직접 살피며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 테고.
‘아무래도 사용인을 거쳐 듣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카리에 역시 칼릭스의 생각을 모르지 않았다. 카리에는 구태여 말을 늘이기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칼릭스에게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전하, 부디 용서해 주세요. 대외에 알려진 대공비와 셀루리아의 친밀한 관계는 다 거짓입니다.”
“……뭐?”
칼릭스가 멈칫했다.
카리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셀루리아에게 에리카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저희 고모님이시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에리카의 아비가 누구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신분이 낮은 자이겠군요.”
칼릭스의 금안에 이채가 서렸다.
셀루리아의 사랑받는 조카딸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한때 수도의 뜨거운 감자였다.
셀루리아에서 에리카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 한 번, 그리고 에리카의 뛰어난 학습 실력이 수도를 휩쓸었을 때 다시 한번.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에리카의 아버지가 낮은 신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구교파의 정통 가문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셀루리아의 아가씨가 삼류 애정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셀루리아 측에서 사람을 풀어 에리카의 아버지는 몰락 귀족이거나 신교파의 귀족 중 한 명이라는 소문을 교묘하게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신분이 낮은 자였다니.
“……낮은 자가 아니라, 천한 자입니다.”
입에 담기도 수치스럽다는 듯, 카리에가 드레스 자락을 꽉 쥐며 칼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헛웃음을 삼키던 칼릭스도 그 말에는 순간 놀랐다.
대공비의 아비가 평민이란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천민이었다고?
“하. 셀루리아에서 기를 쓰고 숨길 만하군.”
대공비의 아버지가 천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대공비만 매장되는 것이 아니라 대공비의 어머니인 할리아의 명예까지 함께 매장된다.
그뿐만일까? 할리아를 잘못 교육시키고 이를 막지 못한 셀루리아의 명성도 어느 정도 타격을 받는다.
잠시 관자놀이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칼릭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대공비를 제거했으면 되지 않나요?”
“……하지만 에리카는 고모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흔적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제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카리에는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이 대답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칼릭스도 카리에도 알고 있는 바였다.
‘물론, 결혼 시장에서 가질 에리카 르 셀루리아의 가치와 할리아 르 셀루리아의 개인 재산 때문이겠지. 출가한 사람의 재산을 가문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면 절차가 복잡해서 자칫 천민 연인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으니, 그냥 깔끔하게 대공비를 받아들인 거로군.’
그것을 제외하고는 에리카를 살려 둠으로써 얻을 이득은 없었으니 말이다.
자체적으로 의도를 추론한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방금 발생한 소란은 대공비와 셀루리아의 갈등와 관련해 발생한 것이겠군요. 그대가 나를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으니, 셀루리아에 불리한 소란이겠고.”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짐작하기로, 오늘 어머니께서 에리카와 독대를 하기로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카리에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카리에의 손을 가만히 응시하던 칼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숨길 필요도 없겠지요.”
“네?”
“대공비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였습니다.”
칼릭스의 말에, 일순 카리에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늘빛 눈동자가 재빨리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면서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이번 소란은 대공비를 입막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적어도 대공가에 명분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니까요.”
“……그건, 안 될 거예요.”
숨을 깊게 내뱉은 카리에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에리카가 15살일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줄곧 그 애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여 왔어요. 에리카의 말과 생각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줄곧 에리카를 마리오네트로 세뇌시켜 왔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네. 에리카 그것이 연기로 숨기고 있었어요.”
순간, 칼릭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에리카는 지금껏 순수하고 가녀린 척을 하면서 모두가 안심하고 방심하도록 일부러 유도했다는 뜻이 아닌가.
당했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인지한 순간, 칼릭스는 다급히 밖을 향해 외쳤다.
“……펜릴! 하네스 경!”
“예, 전하.”
“예, 전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과 친위대원 한 명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펜릴, 당장 두 분 폐하를 이곳으로 모셔오거라. 급한 일이니 한시라도 빨리!”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숙인 시종장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칼릭스의 시선이 곧바로 옆의 하네스 경에게로 옮겨 갔다.
“하네스 경은 사피엔을 비밀리에 감시하도록 해. 이 홀 안에 있을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하네스 경까지 밖으로 나가자, 휴게실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얼음을 물에 담근다면, 얼음이 금이 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집요한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깨고, 칼릭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레틸기스 즙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저도 몰랐습니다.”
카리에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셀루리아에 언질조차 없이 에리카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였다고.’
물론 그 대상이 에리카였으니 망정이지만, 황가가 에리카에게 레틸기스를 먹인 시점은 에리카가 셀루리아의 사랑받는 조카라 알고 있었을 때가 아닌가.
‘그래서 저번 티타임 때, 내게 대공비가 이용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떠봤던 것이로군.’
자신의 통제 밖에서 자신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하니, 순간 뒷덜미에서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도, 물밑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곳.
‘이런 곳이 황궁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손톱만 한 불안감이 가슴 속 밑바닥에 씨앗처럼 자리 잡았지만, 카리에는 내색하지 않고 표정을 말끔히 했다.
이곳은 황궁이었으니까.
* * *
황후가 내게 대접한 차는 늘 그랬듯 레틸기스 차였다.
여기에 약재도 여럿 섞은 모양인지, 차는 레틸기스 특유의 갈색빛이 아닌 그보다 더 짙은 갈색을 띠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여러 가지 상처 회복에 좋은 약재들을 블렌딩하여 우렸네. 그중에서도 약제사가 특별히 상성과 맛을 고려하여 배합하였으니 먹기에도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