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어쩐지…… 대공비께서 셀루리아 영애셨을 적에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교계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줄이야…….”
“이전에 성혼식 연회 때도, 대공비께서 후작 부인의 뒤를 따라 걸으시면서 왠지 주눅 들어 보인다고 제가 그랬었잖아요…….”
“학대로도 모자라서 협박으로 대공가 재산을 빼돌리려고 하다니, 세상에…….”
“대공께서 아직 어리시니 대공비를 앞세워 드레인을 집어삼키려던 수작이었네요. 그래 놓고서는 여태껏 뻔뻔한 얼굴로 신을 섬겼다니…….”
“구교파도 별거 아니었네요. 고고하고 정대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 결국 한 게 뭐야. 힘없고 순수한 조카를 학대했잖아요…….”
웅성거림은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잔뜩 벌게진 후작을 흘끗 본 나는 연기를 계속하면서 회장 안을 죽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리에가 안 보이네.’
후작 부인이야 지금 일이 너무 커져 버린 바람에 테라스에서 못 나오고 있다고 치더라도, 카리에는 칼릭스와 함께 소란을 보고 이쪽으로 와 보는 것이 옳았다. 황제와 황후가 부재한 홀에서 소란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황태자와 황태자비였으니까.
그런 내 의문을 읽은 듯, 세이룬이 상체를 숙인 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에리카가 후작 부인을 따라가고 나서,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찾아와 제게 사피엔 황자를 미끼로 내보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에리카가 테라스에서 나오면서 소란이 일자,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끌고 황급히 홀의 2층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고요.”
“……아아.”
뭐, 등장한 줄도 몰랐던 사피엔의 존재는 놀랍지 않았다.
연회장에 출입할 때, 보통 신분이 낮은 자들은 입장 시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그것을 이용하여, 예로부터 입지가 낮은 황족은 조롱거리가 되기 위해 입장 언급조차 없이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왕왕 존재했다.
‘그나저나 카리에, 상황을 대강 눈치채고 직접적인 불똥이라도 피하려는 심산인 모양이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일순 멈칫했다.
카리에가 칼릭스를 데리고 휴게실로 이동했다고?
“그럼 사피엔 황자는……”
어디 있어? 내가 질문을 다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드레인 대공비께서, 제 사돈 가문에게 학대를 받으셨다고요?”
불현듯, 인파들 사이에서 한 남자의 미성이 들려왔다. 충격을 받은 듯 가늘게 떨리고 있는 주제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준 곳에는, 예상했던 대로 사피엔이 파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피엔의 얼굴을 모르는 어린 영애와 영식들은 사피엔이 누군지 몰라서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고, 사피엔을 아는 귀족들은 저마다 헛숨을 삼키거나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선명한 금안 가득 눈물을 머금은 사피엔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던 그는 이내 죄인처럼 푹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제가……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사돈 가문의 잘못을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도 황가의 일원이니, 그 잘못에 대해 자유로울 순 없으니까요…….”
“금안…… 혹시, 사피엔 황자 전하……?”
완전히 숙여 버린 고개를 작게 끄덕인 사피엔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여전히 붉은 내 뺨을 바라봤다.
또렷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륵 떨어져 내렸다.
“이제…… 이제 더는 걱정하지 마세요, 비전하.”
그가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물론, 아무리 속삭였다고 해 봤자 근처의 귀족들에게는 똑똑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족의 지위에 걸맞은 공명정대한 성품을 지니신 분들이세요. 비전하께서 겪은 불의를 결코 좌시할 분들이 아니니, 분명 비전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그렇게 덧붙인 사피엔은 죄책감을 못 이기는 것처럼 몸을 돌려 도망치듯 사라졌다. 비밀리에 연회장에 잠입해 있던 대공가의 비밀 호위가 사피엔의 뒤를 쫓았다.
설마 멍청한 황자의 입에서 저런 또박또박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귀족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으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동받은 얼굴로 점점 멀어져 가는 사피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물론 감동받은 얼굴 따윈 당연히 연기였다. 선동과 날조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질에 감동받을 정도로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았다.
‘사피엔, 진짜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금 사피엔은 한 번의 연기로 두 가지 이득을 획득했다.
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천사’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선량한 이미지를 획득했다. 어리숙함과 선량함은 꽤 어울리는 조합이니 이미지는 비교적 잘 먹혀들었을 것이다.
둘.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게 ‘악을 벌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 줌으로써, 악, 즉 셀루리아를 처벌하지 않을 때 느껴질 실망감이 더욱 고조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황가는 절대로 셀루리아를 처벌할 수 없어.’
오늘로부터 며칠 이내로, 세네카 공작 가문이 구교파에서 벗어나 중립을 선언할 테니까.
구교파의 견고한 기둥 중 하나로써 지대한 영향력을 미쳐 왔던 세네카의 중립 선언은 구교파 내에 해일과 같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 해일이 육지에 남길 상흔은 하루 이틀로 잠재워질 수 없을 터.
그런 상황에서 황가가 또 다른 중심축인 셀루리아를 버린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사피엔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시간이 다소 길어졌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저를 보게 했다.
“그 입에 발린 말이 그리도 감동적이셨습니까.”
“네에, 감동했어요……. 저, 사과란 거 처음 받아 본 거거든요. 그런 건 책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중얼거린 나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세이룬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최대한 열심히 눈빛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세이룬, 이거 연기야! 알지? 나 진짜로 감동받은 게 아니라 연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모르면 안 돼!’
“……하.”
내 간절함이 통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세이룬이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저는, 사피엔 그자가 싫습니다.”
그가 내 귓가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를 바라보시면, 투정 부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텔레파시가 통했다!
나는 세이룬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웃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내 뒷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세이룬은 곧이어 상체를 바로 세워 나를 떼어 냈다.
그가 나를 곧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사죄는, 앞으로 질리도록 받게 되실 겁니다. 부인님께 마땅히 사죄를 올려야 하는 자들에게서요.”
“전하…….”
“그러니, 황자의 사과에 너무 감동하지 마세요.”
차분하게 말한 그가 다시 내 왼뺨을 쓰다듬었다.
고위 귀족답지 않은 상냥함과 애틋함에 동요한 귀족들이 얼굴을 붉히며 이쪽을 흘끔거렸다. 세이룬의 폭로와 사피엔의 사죄로 인해 회장 안 공기가 한결 느슨해진 까닭인지, 귀족들의 발그레한 시선은 이전보다 한층 노골적이었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시종의 보고를 받고 온 모양인지, 휴게실에서 내려온 황제와 황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빽빽하게 운집해 있던 귀족들이 두 사람을 향해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길을 텄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받은 뒤, 귀족들이 터 준 길을 따라 천천히 나와 세이룬 앞으로 다가왔다.
황제의 차가운 눈동자가 내 왼뺨에 머물렀다가, 나를 감싸고 있는 세이룬을 향했다가, 마지막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셀루리아 후작에게 닿았다.
황제의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내가 읽었을 정도면 대부분의 귀족들도 읽어 냈다는 말이 되겠다.
황제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눈치챈 귀족들은 불똥이 튀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는 눈치만 봤다.
“소란의 중심에 대공비가 있는 듯하군. 뺨을 맞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황제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귀족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대공비의 뺨이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붉게 부었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당사자에게 묻는다?
‘이 일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없던 일로 못 박을 생각인가 보네.’
지금 황제는 내가 셀루리아 후작 부인에게 뺨을 맞은 사건을 공개적으로 불식시킴으로써, 대공가가 공식적으로 항의할 명분을 차단해 버리려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닐 수 없다.
‘하긴, 황가로서는 군력과 재력을 양손에 움켜쥐고 있는 대공가에게 명분마저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겠지.’
무리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순수하고 심약하나 눈치는 밥 말아 먹은 ‘천사병 에리카’는 황제의 저의 따위 하나도 모른다. 갑자기 캐붕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황후가 생긋 웃으면서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다른 이들의 시선은 교묘하게 가린 채, 황후의 입 모양이 벙긋거렸다.
착한 사돈. 도와줘야지.
안. 맞.았.다.고. 해.
‘……하.’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천사병 에리카’는 황후에게 불려 가서 레틸기스 즙을 먹었다.
캐붕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천사병 에리카’는 황제와 황후의 뜻에 따라 맞지 않았다고 거짓을 고해야 한다.
황후의 입 모양을 읽은 세이룬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그의 팔을 꽉 붙들며 멈춰 세웠다.
‘어차피 오늘로 천사병 에리카는 종결이니, 한 번쯤은 저들의 뜻에 놀아나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가, 애써 미소 지으며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뺨을 맞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