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해 준 뒤 곧장 몸을 돌렸다.
뒤에서 후작 부인이 씨근덕거리며 내 뒤통수를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 같잖은 것에 기울여 줄 신경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연회장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태세를 전환해서 충격받은 척 몸을 비틀거렸다.
마침 근처에서 삼삼오오 떠들다가 나를 발견한 신교파 귀족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성혼식 연회 때 본 적이 있는 귀족들이었다.
“드레인 대공비 전하?”
“비전하, 혹시 어디가 미령하신…… 헉. 비전하의 뺨에……!”
“뺘, 뺨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새빨개요! 잠시만요, 제가 당장 얼음물을……!”
“맞기라도 한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맞은 게 아닌가요? 대체 누가 감히 이런 짓을!”
귀족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로 몰려왔다. 울음을 참듯 입술을 깨문 나는 애써 웃으려 노력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전하,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뺨이 이렇게나 붉게 달아오르셨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니―…”
연기에 한껏 심취해서 가련하게 어깨를 떨고 있는데, 문득 내가 나온 테라스 근처에서 한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에스로타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스로타의 녹금빛 눈동자가 파문이 일듯 흔들렸다. 상대에게 양해를 구한 에스로타가 재빨리 내 앞으로 달려왔다.
“에리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에스로타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바라봤다.
옅은 떨림을 머금은 손이 조심스럽게 내게로 뻗어 왔다. 손은 붉게 달아오른 내 뺨을 감싸려다가, 머뭇거리다가, 이내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미안해요…….”
에스로타가 작게 속삭였다. 녹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하다고? ……그보다 지금 우는 거야? 내가 뺨 맞았다고?’
뺨 맞은 건 난데 왜 우는 건 저쪽인데!
에스로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연기하는 것도 잊고 입술만 멍하니 달싹거렸다.
뺨 맞은 나보다 제가 더 아픈 얼굴로 눈물을 흘리던 에스로타는 다시금 ‘미안하다’고 중얼거린 뒤 도망치듯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에스로타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런 내 귓가로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에리카?”
순간, 주위의 공기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첼로의 독주에 차가운 공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공기를 가르고, 날 선 구두 소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미친, 망했네.’
에스로타 때문에 당황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쓰러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버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뺨 맞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던 과거의 나 죽어라. 어떻게 세이룬을 잊어버릴 수가 있냐고!
“에리카.”
아까 들었던 목소리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목소리는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혹시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가…….’
긴장을 풀려는 내 실없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짙은 살기가 홀 전체를 장악했다.
무형의 기운에 짓눌린 악사들이 연주를 멈췄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숨조차 쉬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가까이에 있던 귀족들은 물론, 먼 곳에서 떠들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도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여기에 서 있는 거 실은 나 아니에요…….’
……라고 현실 도피를 해 봤자, 정말로 도피가 가능할 리가.
억지로 정신 줄을 다시 붙잡은 나는 재빨리 만면에 울음을 삼켜 내는 표정을 다시 꾸며 냈다. 그러고는 내 앞에 있는 세이룬을 올려다봤다.
입꼬리를 들어 올려 억지로 웃어 보인 건 덤이다.
“전하.”
“…….”
“전 괜찮아요……. 정말로요.”
내가 말하는 동안, 세이룬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어떤 감정도, 심지어 아주 약간의 분노 조각마저도 없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은 그동안 내가 봐 왔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왼뺨에 가져다 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해인이 붉게 부어오른 뺨에 막 스며들려고 할 때, 본능적으로 그가 내 뺨을 치료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해인의 운용을 저지시켰다.
‘지금 치료하면 안 돼!’
갑자기 사라진 내 상처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증거가 날아가게 둘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나는 내 뺨에 닿으려던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은 다음 가련하게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괜찮다는 거, 정말인데…….”
치료가 막힌 세이룬이 나를 뚫어질 듯 응시했지만, 나는 깍지 낀 손을 더욱 꽉 움켜쥠으로써 내 의사를 피력했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던 세이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치 바닥을 긁어내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세이룬의 목소리에 흠칫한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살피던 것도 멈추고 얼른 다시 세이룬을 바라봤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꼬리를 차게 비틀었다.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
“그냥 애초에 다 죽여 버렸어야 했어요.”
“……전하?”
“그대가 뭐라고 말하든, 그대에게 해가 되는 건 그냥 다 죽여 버리고 그대의 발밑에 바쳤어야 했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이성을 잠식해 버린 광기가 어둡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눈 깜짝할 사이 예정하지 않은 반역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세이룬의 얼굴을 감쌌다.
“세이룬, 나 봐 봐. 정신 놓으면 안 돼.”
나는 다급히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자신의 두 손으로 내 두 손을 감싼 세이룬이 다정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마주 속삭였다.
“에리카, 저는 지금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당신 지금 눈이 맛 갔거든?’
제정신은 개뿔, 당장 터지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다. 나는 절로 흐려지려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그에게 못 박듯 속삭였다.
“계획에 변경은 없어. 알았지?”
“이후 처리할 일들이 복잡해질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 골치 아플 일들도 모두 처리해 드릴 테니.”
세이룬이 한층 화사하게 웃으며 나만 들리도록 속삭이듯 답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예쁘게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내용이 예뻐지지는 않는 법.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내가 원하는 건 똥을 최대한 덜 싸는 적법한 복수지, 낭자한 피바다 속에서 완성되는 복수가 아닙니다만…….’
제 복수할 권리 내세우겠다고 관련 없는 사람들의 행복할 권리를 짓밟는, 저 그렇게 답 없는 인간은 아니거든요…….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세이룬이 정말로 일을 벌여 버리기 전에 서둘러 다시 연기를 재개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전하……. 전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인지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은걸요.”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거라고 완전히 못을 박아 버리는 내 말에, 그린 듯한 웃음을 짓고 있던 세이룬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에리카.”
“정말이라니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세이룬의 손을 잡아 끌어온 뒤,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손바닥에 ‘폭로’라고 적었다.
그의 빤한 시선이 마치 뚫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시선에 조금 흠칫했지만, 나는 그래도 꿋꿋이 그를 마주 바라봤다.
이내 한숨을 내쉰 세이룬이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이번만입니다.”
“이번……?”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세계 지도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존하기는 아마도 어렵겠죠. 귓가에 나직한 속삭임이 더해졌다.
말을 끝낸 세이룬은 내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곧장 상체를 바로 세웠다.
내 왼뺨을 한 번 쓸어내린 그가 고개를 돌려서 아까 전부터 인파 속에 섞여 있던 셀루리아 후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셀루리아 후작은 내가 뺨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카를 아끼는 외숙부’ 이미지에 맞춰서 이쪽으로 달려왔지만, 세이룬의 살벌한 기색이 두려워 가까이 다가오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인파 속에 섞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셀루리아 후작은 세이룬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꽂히자 당황해서 흠칫 몸을 떨었다.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비튼 세이룬이 짓씹듯 말했다.
“이렇게나 추악하고 치졸한 가문이 엄중함과 강직함을 명분으로 황실의 사돈이 되었다니. 황실 사돈 문턱이 얼마나 낮은지, 타국 보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어. 그렇지 않나, 후작?”
“추, 추악이라니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얻어맞은 후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세이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작에게로 성큼 다가가 그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헛소리?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을 지금까지 계속 학대해 온 것이 추악하지 않으면, 대체 뭐가 추악하다는 거지?”
“무, 뭐……?”
“방금도 내 부인님은 셀루리아 후작 부인을 따라 테라스에 갔다가 손찌검을 당했다. 이런 공공연한 곳에서까지 손을 올리는데, 나와 혼인하기 전 건강을 핑계로 저택에 갇혀 있었을 때는 얼마나 더 심한 학대를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
“무, 무슨…… 마,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돼서 후작은 드레인 내부에 첩자를 심고 내 부인님께 대공가 예산을 빼돌리라 협박했나?”
부인님의 부탁으로 지금껏 계속 봐주고 있었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다 결국 부인님까지 상처 입히는군. 세이룬이 경멸조로 으르렁거렸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후작은 입술만 벙긋거렸고, 세이룬의 말을 들은 주위의 귀족들은 하나둘씩 부채와 와인 잔을 방패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그 고고하기 그지없는 셀루리아 가문에서 학대라니……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