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세이룬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공작 각하?”
후작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에스로타를 불렀지만, 에스로타는 별다른 첨언 없이 잡고 있던 손목을 던지듯 놓았다.
“……!”
태어나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을 모욕적인 행동에 후작 부인은 충격받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 후작 부인을 경멸스럽다는 듯 바라본 세이룬이 나를 제 뒤로 숨기며 차갑게 내뱉었다.
“제삼자가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라니, 셀루리아에는 예의범절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뭐, 뭣……!”
대놓고 면박을 들은 후작 부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흠, 이제 내가 나서야 할 차례인가.’
천사병 에리카는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지 않아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나는 후작 부인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전에 얼른 울 것 같은 얼굴을 꾸며 내고는 황급히 세이룬의 팔을 붙들었다.
“전하, 그러지 마세요. 셀루리아 후작 부인께서는 제 외숙모이신걸요.”
“……부인님.”
세이룬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외숙모께서는 그냥, 오랜만에 보는 조카가 반가워서 그러신 걸 거예요. 전 괜찮아요.”
“……하.”
잠시 나를 바라보던 세이룬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뭔가가 있다는 것을 대놓고 폴폴 풍겨 대고 있는 상황에, 주위에 있던 구교파 귀족들이 저마다 시선을 주고받았다.
좋아, 상황은 일전에 말 맞춘 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서 후작 부인을 바라봤다.
“외숙모, 괜찮으세요? 죄,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니란다, 에리카. 우리가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공간에서 내가 너무 격의 없이 대한 잘못도 있지 않니.”
후작 부인이 혈관 마크가 가득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계속 눈치 보듯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은 내 기색을 알아차린 후작 부인이 한층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에리카. 외숙모와 테라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니?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단다.”
대체 이번엔 또 뭔 말을 하려는지, 듣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프로 천사병러.
나는 조금 경계가 풀어진 것처럼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외숙모.”
“부인님.”
“에리카.”
세이룬과 에스로타가 딱딱한 얼굴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그리고 에스로타. 외숙모와 얘기 나누는 거잖아요.”
“…….”
나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는 세이룬과 입술을 꾹 깨무는 에스로타를 두고 몸을 돌려 후작 부인을 따라갔다.
* * *
에리카가 테라스의 휘장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어두운 얼굴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는 세이룬과 에스로타의 옆에서, 이곳으로 온 목적을 갑자기 후작 부인에게 빼앗겨 버린 구교파 귀족들은 흘끗흘끗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지금이라도 두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이로운 일일지 열심히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하고 말았다.
“드레인 대공. 아, 베이센 공작도 있었군.”
세이룬과 에스로타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들을 부른 사람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황태자 칼릭스였다.
“……베이센 공작, 에스로타가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에스로타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칼릭스와 그 옆에서 같이 걸어오고 있는 카리에에게 예를 올렸다.
미소 지으며 에스로타의 예를 받은 칼릭스가 세이룬과 에스로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사교계의 성신께서 드레인 대공과 함께 있었군.”
“대공비께 볼일이 있어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 대공비는 없는 것 같은데.”
“대공비께서는 조금 전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찾아와 함께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아아, 그렇군.”
칼릭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로타가 칼릭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무심한 시선으로 칼릭스와 카리에를 훑던 세이룬은 문득 그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에스로타에게서 세이룬에게로 시선을 옮기던 칼릭스는 세이룬의 시선이 향한 사람을 보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공작, 내가 공작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대공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럼 두 분 전하, 그리고 대공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에스로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인사한 후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칼릭스는 에스로타가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전에 아바마마께 듣기로, 대공은 용건만 간단히 전달하는 편을 선호한다고 했으니 바로 소개하겠습니다. 사피엔.”
칼릭스의 부름에, 연신 신기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던 사피엔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네, 네, 황태자 전하……!”
“앞으로 오거라.”
“네…….”
조그맣게 대답한 사피엔이 우물쭈물하며 세이룬의 앞에 와 섰다.
세이룬은 순한 얼굴로 자신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사피엔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칼릭스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이복동생인 사피엔 황자입니다. 이렌텔을 지키는 가문의 가주께서 아직 사피엔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 드립니다.”
칼릭스가 뭐라고 말하든, 세이룬은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귓가에서는 지난번 들었었던 에리카의 목소리만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세이룬, 혹시 사피엔 르 이렌텔 황자를 알아요?”
“그래서 저는, 4월에 있을 건국제 직후 황자 전하를 비밀리에 대공저로 모시고자 해요.”
순간, 사피엔을 보는 그의 얼굴이 마치 적을 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 * *
“그간의 일은 모두 보상하마.”
1층의 테라스에 들어서자마자 후작 부인이 툭 내뱉었다.
테라스의 난간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간 후작 부인은 빙글 몸을 돌리곤 고압적인 자세로 팔짱을 꼈다.
그녀는 이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애써 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너는 셀루리아의 명성에 해가 되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해. 셀루리아도 이제 많이 달라졌단다. 우리가 너에게 이렇게까지 하는데, 착한 조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후작 부인을 쳐다봤다.
이래서 ‘뒷목 잡고 쓰러진다’는 표현이 있는 거구나. 썩어 들어가는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후작 부인은 ‘너그럽고 배려심 깊은’ 제 말에 도취된 듯 눈을 아련하게 내리깔며 부채 끝자락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솔직히 셀루리아가 너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어가 있니. 의식주와 안전을 보장해 주고 좋은 시집 자리를 찾아 주었지. 수도 뒷골목의 빈민가에서는 하루에도 아사자가 여러 명 나온단다. 그에 비하면 너는 오히려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니?”
“…….”
“그렇지만 네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다니, 보상 정도는 해 줄 수 있단다. 보상을 받고 지난 일은 그만 넘기렴. 큰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구별할 수 있어야지.”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린지 모르겠다.
카리에에게 사람 간의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고 말한 지 한 달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부채 끝으로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건방지시네요, 셀루리아 후작 부인.”
“……뭐?”
“감히 가해자 주제에, 피해자에게 ‘우린 이제 변했으니 너도 그만 받아들이고 넘겨라’라고 강요하다니. 양심과 염치는 다 어디로 갖다 버리셨나요?”
“야, 양심? 염치?”
후작 부인의 하얗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후작 부인이 부르르 떠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관자놀이를 누르던 부채를 펼쳐 팔락거렸다. 하도 열불이 나서, 부채라도 부쳐야 좀 살 것 같았다.
“가해자가 정말로 변했는지 아닌지는 피해자인 제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가해자인 당신이 정하고 강요할 게 아니라요. 피해자가 그걸 판단할 동안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조신하게 저자세로 빌빌 기면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걸하는 거죠.”
“너…… 너!”
“감히 한 사람의 인권을 짓밟은 대가가, 설마 그 ‘보상’이란 이름의 코 묻은 조공품 정도밖에 안 된다고 믿는 건 아니죠? 당신, 그렇게 머저리는 아니잖아.”
순간, 눈앞이 번쩍하면서 왼쪽 뺨에서 지독한 얼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채를 부치던 손이 우뚝 멈췄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나, 방금 뺨 맞은 거야?’
남들의 시선과 명예를 그리도 신경 쓰던 후작 부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휘두르다니. 그것도 대놓고 보이는 곳에 말이다.
나는 손을 들어 손끝으로 뺨을 쓸어 보았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뜨거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셀루리아의 학대 사실을 이렇게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조용히 이렌텔 전역에 퍼지도록 하려고만 했는데, 알아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주다니. 이건 뭐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혀를 차야 하는지.
파르르 떨며 나를 노려보던 후작 부인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천한 년이, 어디서 감히 이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위아래도 모르는 역겨운 년.”
피식,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이번 웃음은 가소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나온 비웃음이었다.
나는 뺨 맞을 때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는.”
“…….”
“그런데 저는 이렇게 바꿔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나는 씩씩거리는 후작 부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손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행동은 몸을 베는 칼이라고.”
나는 들고 있던 부채로 후작 부인의 턱을 확 들어 보였다. 카리에의 눈동자와 꼭 같은 푸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려 흔들렸다.
나는 싱긋 웃었다.
“제가 이래 봬도 사연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제가 조금이라도 덜 잔인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게 그쪽한테 이로울 테니, 부디 새겨듣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