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왠지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세이룬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나를 불렀다.
그 부름이 마치 왜 망토를 가져가냐고 묻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망토를 내 품으로 더욱 바짝 당기고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안 돼. 안 줄 거야.”
“네?”
“선남님은 이미 나랑 결혼했잖아. 그러니까 절대로 못 떠나. 날개옷도 못 줘.”
누구 좋으라고 순순히 날개옷을 줘? 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어벙하게 눈을 끔벅거리고 있던 세이룬이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을 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누가 할 소리를…….”
바닥을 긁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이룬이 손을 내리고 나를 보았다.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시선에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을 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이룬이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가 예쁘게 웃으며 내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고 머리가 인지했을 때, 불현듯 느껴진 따끔한 감각에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
“에리카의 날개옷은 제 옷처럼 가져갈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니까요.”
나를 달래듯, 방금 따끔했던 그곳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세이룬이 내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가 단정하게 내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나는 뿌듯하게 웃음 짓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멍청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
날개옷과 내 목이 따끔한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이해 가지 않은 내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헉! 대공 전하!”
내 목을 본 포카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포카의 반응에 덩달아 내 목을 확인한 레비나도 흡사 뭉크의 ‘절규’처럼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쥔 채 외쳤다.
“대공 전하! 곧 건국제에 참석하셔야 하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대체 뭔데. 뭔데 반응이 이런 거야…….”
두려워진 나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며 거울을 바라봤다가 안고 있던 날개옷을 툭 떨어뜨렸다.
깊게 파인 목선을 가진 드레스는 유행에 맞추느라 파틀릿을 덧대지 않아서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 목덜미 왼쪽 아래에, 세이룬이 만들었을 붉은 자국이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오늘 내 콘셉트는 ‘순수하고 가녀린 천사님’이다.
‘돌았…….’
잠시간 머리가 작동하지 않아서 멍하니 그 자국만 바라보고 있는데, 세이룬이 배시시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날개옷을 가져갈 수 없다면, 부인님께 제 흔적을 새겨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든 그 표식을 보고 찾아갈 수 있도록.”
“…….”
아 그렇습니까.
나는 눈을 흐리게 떴다. 거울 너머로 레비나가 부지런히 내 목에서 목걸이를 빼낸 뒤 대신 하얀 리본을 감아 주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콘셉트 ‘순수하고 가녀린 천사님’을 사수할 수 있었다.
* * *
낮의 건국제는 정말로 별거 없었다.
그냥 화이트 홀에서 귀족들이 모여 황제와 황후와 구교 교황의 연설을 듣고, 박수 치고, 이번에 결혼한 황태자 부부가 곱게 꾸며진 마차에 올라 수도를 한 바퀴 돌면서 대중의 흥분을 돋웠다.
그러다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고, 그렇게 밤의 건국제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드레인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안내인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잔잔한 바이올린 소리를 배경으로 홀 안에는 나와 세이룬의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들려왔다.
얼마 정도 걷던 세이룬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결국 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세이룬의 날개옷이 반동으로 인해 한들거렸다.
사용인이 들고 있던 트레이 위에서 스파클링 와인 두 잔을 고른 세이룬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한 잔을 건네주었다.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입맛에 맞으실 듯하여.”
옅은 노란빛이 도는 와인은 갓 따라진 것을 증명하듯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서 와인 잔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전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데, 한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에리카.”
다가온 사람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에스로타였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에스로타는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의상과 장신구도 화려하거나 위엄 있다기보다는 다소 수수하고 단정한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에스로타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에스로타! 공작님이 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아…….”
“직접 만나서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에스로타의 몸이 좋지 않아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도 안색이 별로 좋지 못하신데,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전 괜찮아요. 그리고 보내 주신 선물과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감사해요.”
에스로타의 인사에, 나는 “별말씀을요”하고 대답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실은, 그 선물은 빈센트와 체사에게 알아서 에스로타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골라 보내 달라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선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에스로타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혹시 내 과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순진한 척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안내인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회장 안에 있던 모든 귀족이 양쪽으로 물러나 허리를 굽혔다. 나도 적당히 다른 귀족들을 따라 우르르 등장한 황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연회장의 상석까지 걸음을 옮긴 황제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만 고개를 들도록 하시오.”
귀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봤는데, 왜인지 황제는 내 옆에 서 있는 세이룬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예전 성혼식 때 내가 저한테 고개를 숙였다고 좋아하던 카리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뭔가 한심했다.
‘그런데, 세이룬은 대체 황제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고작 고개를 숙인 걸 가지고 황제가 좋아하는 거지?’
……눈이 저절로 흐리게 떠지는 것으로 봐서, 분명 모르는 게 약일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쓸데없이 긴 황제의 건국제 연설 제2번을 얼마나 흘려듣고 있었을까, 드디어 오늘 연회를 마음껏 즐기라는 상투적인 말을 끝으로 연설이 끝났다.
황제와 황후는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이유로 황족 전용의 휴게실로 향했다. 황제 부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귀족들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우리 주위로 한 무리의 귀족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어머, 베이센 공작 각하께서도 여기에 계셨군요.”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듯한 베네로사 후작 영애가 에스로타와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곧장 나를 돌아봤다.
영애가 생긋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비전하, 지난번 공작 각하의 티파티 때 뵈었었지요? 베네로사 후작가의 카넨시아입니다.”
그 인사를 시작으로, 귀족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사를 들으며, 나는 의아해서 절로 굳으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줬다.
‘……에스로타에게 온 게 아니라 나한테 온 건가? 세이룬이 내 옆에 있는데 이렇게 거리낌 없이? 구교파 귀족들이?’
귀족들은 세이룬의 무감정한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지,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나와 에스로타 주위를 감싸듯 에워싸고 있었다.
일단 나도 내 콘셉트에 맞춰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모두들 만나서 반가워요. 안 그래도 티파티 이후로 줄곧 뵙고 싶었는데…….”
내가 수줍은 듯이 말하자, 베네로사 영애도 부채 끝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빙긋 웃었다.
“저도 얼마나 비전하와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 몰라요. 지난 성혼식 연회 때도 비전하께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 무식한 신교파 귀족들이 우르르 떼로 몰려드는 바람에 밀려나 버렸지 뭐예요.”
“맞아요. 사이비 주제에 어떻게 감히.”
“그 뻔뻔한 낯짝으로 비전하께 접근할 수 있는지, 정말.”
세피로나 쌍둥이 영애 영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베네로사 영애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이비…….’
눈이 자꾸 흐리게 떠지려고 했다.
가까스로 흐린 눈을 피한 나는 천사 콘셉트답게 험담을 못 하는 심약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저, 그런 말들을 하면…….”
그분들이 상처받으실 거예요. 내가 듣기에도 ‘쟤 어디가 모자라냐’ 싶을 정도로 내 콘셉트에 완벽히 들어맞는 대사를 치려던 순간이었다.
“에리카, 여기에 있었구나.”
마치 이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나에게로 걸어왔다.
내 천사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무참히 박살 내다니, 정말이지 저 인간은 쓸모라곤 일도 없으면서 민폐만 무량대수였다.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안으로 삼킨 후, 쭈뼛거리는 얼굴로 셀루리아 후작 부인을 돌아봤다.
“후, 후작 부인…….”
“에리카, 내 사랑스러운 조카. 우리 사이에 예법은 굳이 지킬 필요 없다고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잖니.”
섭섭한 듯 눈썹을 늘어뜨린 흐린 후작 부인이 슬쩍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얼굴을 찌푸린 세이룬이 당장 손을 뻗어 후작 부인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에스로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무례하군, 셀루리아 후작 부인.”
에스로타가 서늘한 눈으로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그 시선을 직접적으로 받은 후작 부인은 물론, 근처에 있던 다른 구교파 귀족들까지 흠칫 떨 정도로 싸늘한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