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39)

90화

‘게다가 드레인의 시조인 고대 용의 맹약에 따라 드레인 가문은 황가를 갈아치울 수 없으니, 현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더욱 사피엔에게 접근할 터.’

큰 것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칼릭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유도한 카리에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서렸다.

‘에리카, 너의 그 건방진 태도는 얼마 가지 못할 거야.’

카리에는 앞에 놓인 물잔에 비친 제 눈동자를 응시했다.

당연히, 에리카보다 커서, 에리카를 눌러 버려야 하는 이의 것이었다.

* * *

황태자가 별궁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것은, 사피엔이 앞뜰에서 꺾은 벚꽃 핀 가지를 침실 꽃병에 막 꽂아 넣었을 때였다.

“황자의 지위씩이나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 고작 꽃가지를 방 안에 장식하는 일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구나.”

문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던 칼릭스가 비웃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칼릭스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한 사피엔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화, 황태자 전하…….”

어벙하게 눈을 깜박이며 칼릭스를 쳐다보던 사피엔은 이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제 이복형은, 황가를 뜻하는 자신의 금색 눈동자를 지독히도 싫어했으니까.

두려움에 물든 금안이 사피엔의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가려지고 나서야 몸을 바로 한 칼릭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사피엔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이 침실인가? 쯧, 여전히 별궁은 천한 것이 지내는 곳처럼 누추하기 짝이 없군. 너에게는 이 같은 곳에서 지내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곳 또한 황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네…….”

“아, 하긴 너는 태생적으로 미욱하고 아둔하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구나.”

“죄송합니다…….”

칼릭스는 이곳의 누추함과 더러움이 마치 사피엔이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말했지만, 두 사람 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사피엔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칼릭스의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 그의 움직임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껏 더럽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2층으로 올라온 적이 없는 칼릭스가 예고도 없이 2층을 찾았다. 다른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다가 방 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자금을 발견해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테이블의 의자로 곧장 걸어가 앉은 칼릭스는 오만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사피엔을 바라봤다.

“뭐 해?”

“네……?”

“손님이 왔으면 차를 대접해야지. 내가 이런 기초적인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야 하나?”

칼릭스의 입술이 심기가 상한 듯 차갑게 비틀렸다.

두어 번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사피엔은 뒤늦게 말을 이해한 것처럼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다! 죄, 죄송해요. 금방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사피엔은 허둥지둥 몸을 돌려 침실을 뛰쳐나갔다. 중간에 문짝에 발을 부딪쳐 구르듯 넘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라던 대로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전히 방에서 나온 사피엔은 곧바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제센.”

“네, 네, 황자 전하.”

“너는 지금 당장 침실로 가서 황태자를 감시하도록 해.”

사피엔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제센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꾸벅 고개를 숙인 제센은 서둘러 침실을 향해 갔다. 그 뒷모습을 짧게 지켜보던 사피엔은 고개를 돌려 주방으로 걸어갔다.

고급 차가 있을 리가 없는 사피엔이 준비한 차는 당연히 보리차였다.

그리고 그것을 예상한 칼릭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사피엔을 향해 던져 버렸다.

챙그랑, 사피엔의 바로 옆에 떨어진 찻잔이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흠칫 어깨를 떨며 옆으로 주저앉은 사피엔의 머리맡으로 칼릭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지금, 감히 이 나라의 황태자인 내게 이따위 것을 먹으라고 내온 것이냐?”

“그, 그게 아니…….”

“아니면, 나를 기만하기 위해 내온 것이냐?”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사피엔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런 게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거슬린 칼릭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발로 사피엔의 어깨를 차서 넘어뜨렸다.

“윽…….”

“태생부터 더러운 주제에 눈치도 없으면 입이라도 닥쳐. 죽여서 닥치게 만들기 전에.”

짓씹듯 으르렁거린 칼릭스가 테이블 위 꽃병에 꽂혀 있던 벚꽃 가지를 거칠게 빼내서 부러뜨려 바닥에 던져 버렸다.

“왜, 꽃이라도 가까이하면 네 존재의 역겨움이 조금이라도 사라질 성싶더냐?”

“…….”

“헛소리. 네놈이 아무리 온갖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까이하더라도, 이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고 몸을 깨끗하게 씻더라도 너의 그 역겨움은 절대로 씻어지지 않을 거다.”

칼릭스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주저앉은 사피엔을 내려다봤다.

이토록 모욕을 받았는데도, 사피엔은 분노하거나 피하는 법 없이 그저 앉아서 두려움에 가득 차 벌벌 떨기만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중얼거린 칼릭스가 이내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건국제가 시작되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네? 거, 건국제요……?”

처음 듣는다는 듯, 사피엔이 떨던 것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릭스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황자라는 것이 건국제도 모르다니, 가관이로구나.”

“죄, 죄송합니다…….”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여 열리는 축제다. 그날 사람을 보낼 테니, 이번에는 너도 그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거라.”

칼릭스의 말에, 사피엔은 그것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칼릭스가 덧붙였다.

“……정말이지 멍청해서 못 봐 주겠구나. 너에게 보낸 사람에게 네게 예법과 약간의 기본 상식을 가르치라 일러둘 터이니, 혹여라도 연회장에서 황실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달달 외우도록 해.”

마치 너의 의견 따위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통보한 칼릭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더러운 곳에 단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칼릭스는 그대로 곧장 침실을 나섰다. 그때까지 계속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사피엔은 제센이 다가와 어질러진 공간을 치우기 시작하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가 창가로 다가서자, 막 별궁을 나서는 칼릭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피엔은 소름 돋을 만큼 서늘한 눈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칼릭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따위 거?”

그거, 대공비가 감사하며 마셨던 차야.

사피엔의 붉은 입술이 묘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손끝은 주먹을 쥐어 가렸다.

감정은, 이미 철저히 짓밟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 * *

건국제가 다가왔다.

나는 마침내 한스를 곱지 않게 처리하고 얼굴에 광이 오른 포카와 레비나의 시중을 받으며 치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황가에서 예의에 밥 말아 먹은 드레스는 도착하지 않았네요.”

“괜히 아쉽기도 해요. 그쪽에서 어떤 드레스를 가져다주든 최고급 땔감으로 예쁘게 태워 줄 자신 있는데.”

포카와 레비나가 재잘거리며 내 얼굴에 각종 화장품을 발랐다. 물론 화장품이라고 하는 것들은 절반이 곱게 빻은 보석 가루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화장은 ‘순수하고 가녀린 천사님’ 콘셉트에 맞춰서 진행됐다.

하얗게 백분을 바른 얼굴의 양 뺨에는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복숭앗빛 크림을 연하게 덧발랐다. 눈가에는 진주 가루를 연하게 바르고 입술에는 루비 가루를 바르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한 포카와 레비나는 곧장 표적을 바꿔서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는 반만 틀어 올려 헤어바인으로 고정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했다.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흰색 리본을 헤어바인에 달고, 같은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팔찌로 치장을 마무리한 뒤 거울을 보자, 순백의 하얀 실크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거울 너머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이 천사병 콘셉트의 마지막 날이니까.’

드레스는 순수하고 가녀린 천사처럼 보일 수 있도록 티 하나 없이 새하얀 원단으로 제작된 것을 입었다.

양옆으로 걷은 드레스 자락은 커다란 다이아몬드로 장식으로 고정해서 엉덩이 뒤에서 다소 끌리는 트레인을 만들었고, 드러난 페티코트는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은실로 무척 자잘하게 엮어 치장했다.

한마디로, 그냥 드레스에 돈을 처발랐다는 얘기다.

“비전하, 베일 정리해 드릴게요.”

마지막으로 포카가 내 어깨에 달린, 길게 끌리는 베일 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과는 별개로 어깨에서부터 길게 늘어뜨려진 베일은 흰색의 투명한 모슬린에 작은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은사로 세심하게 엮은 것인데, 예쁘긴 하지만 무척이나 얇고 투명해서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바로 찢어질 것 같아 다소 불안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움직이기 힘들지 않게 그렇게 길지는 않다는 것일까.

“비전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요.”

내게 새하얀 깃털이 달린 천사풍 부채를 쥐여 준 레비나가 문 쪽을 흘끗하며 내게 속삭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돌아봤다.

“세이……!”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누추한. 인간. 세상에 웬. 선남 한 분이. 강림을…….

흑단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어 내린 세이룬은 내 드레스와 한 세트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장식된 새하얀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릎까지 오는 순백색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하얀 옷자락이 꼭 선남의 날개옷처럼 보여서, 나는 얼굴을 굳히고 그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망토를 끌어당겨 내 품에 가뒀다.

“……에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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