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하지만 자칭 ‘셀루리아는 너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줬다’던 카리에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미, 미쳤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심한 말?”
순간, 입술 끝이 차갑게 비틀렸다.
내가 예전에 셀루리아 가에서 받았던 대접 그대로 해 주겠다는 말이. 심한 말이란다.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나는 여전히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카리에의 하늘빛 동공을 직시했다.
“어이가 없네. 카리에, 내가 너를 잡아 죽이겠다고 했어? 아니면 비참한 노예 생활이라도 시켜 준다고 했나? 아니. 나는 그저 내가 받았던 대접을 한 치의 다름없이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고 했을 뿐이야.”
“…….”
“내가 받은 대접이 네 말대로 정말 최고였다면 너는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셀루리아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제 말실수를 인지했는지, 카리에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방어적인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말은 통해서 다행이네. 나는 아메바로 하향 수정할 뻔했던 카리에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으면서 비웃었다.
“원하는 거? 넌 지금 내가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걸로 보여?”
“…….”
“카리에, 잘 들어. 상처란 건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야. 지우개로 쓱싹쓱싹하면 바로 지워지는, 그런 단순한 것으로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단다.”
“…….”
“나는 네가 죽은 뒤에도 네가 한 짓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너는 내 샤샤를 죽였으니까. 그건 결코 되돌릴 수도, 아물 수도 없는 상처거든.”
나는 시선을 내려서 내 오른 손목 안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았다.
지금은 세이룬이 곁에 없으니까 피어 있지 않은 게 당연한데.
그런데도.
텅 빈 손목을 보는 순간, 문득, 샤샤를 잃었을 때의 그 끔찍한 절망감이 트라우마처럼 나를 덮쳐 와서, 나는 떨리는 손을 황급히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줄곧 평이했던 숨결이 조금 거칠어졌다.
“……그런 상처를 가진 내가, 그 상처를 준 너네한테서 뭔가를 받아 내면. 과연 기쁘고 행복할까?”
나는 아직도 가끔 악몽을 꿨다.
악몽 속에서, 샤샤에게만 셀레스를 먹였던 카리에는 이제 세이룬에게도 셀레스를 먹여 죽였다.
사지가 결박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무력감 속에서 죽어라 발버둥 치다 지쳐 오른 손목을 내려다보면, 항상 예쁘고 수줍게 피어 있던 은색 꽃문양은 영영 지워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가끔 잠든 세이룬의 코밑에 손을 대 보아야 안심하는데.
“―원하는 게 뭐냐고?”
“…….”
“정말로 말하면, 들어주지도 않을 거잖아.”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카리에를 비웃었다.
철저히 무너져 오물 속에서 헤매다가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으라고 해 봤자, 저 이기적인 작자들이 ‘네 알겠습니다’하고 해 줄 리가 없지 않나.
“무, 무슨…….”
내 말에서 섬뜩함을 느꼈는지 카리에가 움찔거렸지만, 말끔히 무시한 나는 다시금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뒤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너네의 엿 같은 소리 듣고 있느라 진짜 힘들었거든. 이젠 그만들 짖어 대고, 앞으로는 사람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
그러고는 시선만을 움직여 카리에를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너, 그래 보여도 황태자비잖아. 황태자비 정도 되면 적어도 기본적인 이성과 지성은 갖추고 있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되지?”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시선에 열받은 건지, 순간 카리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화가 난 것처럼 간간이 입술만 달싹이는 카리에를 흘끗한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를 불렀다.
“황태자비께서 환궁하신단다. 배웅해 드리렴.”
“네, 비전하.”
“알겠습니다.”
카리에는 흡사 연행되듯 비틀거리며 나갔다. 왠지 힘없어 보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극도로 화가 난 게 아니라, 뭔가 충격받은 모습 같은데…….’
하지만 가해자의 충격 따위 피해자가 고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의아한 마음을 곧장 털어 버린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갑자기 세이룬이 보고 싶어서 못 참겠다.”
만나면, 가장 먼저 손목에 피어날 꽃문양부터 확인해야지.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생각을 하자,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났다.
나는 실실 웃으며 지금쯤 세이룬이 있을 연무장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상전의 꽁냥꽁냥을 보게 될 기사들은, 음, 미안하지만 잠시 눈 좀 감고 있으라고 해야지 뭐.
* * *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똑똑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시종장이 조용히 고했다.
“……황태자비가?”
이 시각이면 늘 그랬듯, 곧은 자세로 서류 업무를 보고 있던 칼릭스는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에 슬쩍 미간을 좁혔다.
곧 다시 말끔하게 미간을 편 그는 읽던 서류를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에 있지?”
“일단 응접실로 모셔 두었습니다.”
“알았다.”
칼릭스는 곧장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냉수가 들어간 물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카리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황태자비 카리에 르 이렌텔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기별 없이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칼릭스의 말에 카리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물잔을 찾아 쥐는 카리에를 잠시 바라보던 칼릭스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칼릭스의 물음에, 물잔을 꾹 쥐고 있던 카리에가 일순 어깨를 흠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에리카를 만나고 왔어요.”
“혹시, 대공이 또 그대에게 무례를 저질렀나요?”
칼릭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리에는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공은 만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럼…….”
칼릭스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러운 듯 입술을 사리물은 카리에가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비……?!”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한 칼릭스가 서둘러 손을 뻗어 카리에의 뺨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눈물이 그칠 기미 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오자, 결국 손을 거두고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카리에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눈물을 닦는 카리에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칼릭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공비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카리에는 누가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리에는 천천히 손수건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에서 다시금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에리카가…… 달라졌어요. 지난날 저와 나눈 우정은, 부모님께서 주신 그 온기는…… 정말로, 그 대공이란 남자에 눈이 멀어서 모두 잊어버렸나 봐요…….”
순간, 칼릭스의 금안이 슬쩍 가늘어졌다.
다시 눈물을 닦느라 그것을 보지 못한 카리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에리카의 행보가 모두 대공가에게 이용당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들인 줄 알았어요. 착하고 순진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대공가에 가서 본 에리카는, 제가 지금까지 알던 에리카가 아니었어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어 가던 카리에가 일순 멈칫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몹시 거슬렸다.
에리카와 셀루리아의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카리에의 미묘한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칼릭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토록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이었으니…… 충격이 클 것 같군요.”
“…….”
“하지만 비,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해요. 그대도 알다시피 대공가의 행보는 구교파에 적대적입니다. 게다가 대공은 감히 황족인 그대에게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죠. 이는 대공가가 구교파를 적대시하는 것을 넘어서 황가를 업신여기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칼릭스는 지난 성혼식 연회 때, 비밀리에 마련한 자리에서 대공이 오만한 얼굴로 하대를 했다는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 서늘한 빛을 품었다.
칼릭스가 말하는 동안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카리에는 시선을 슬긋 내리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뭔지는 잘 알고 있어요. 분명, 에리카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대공가의 무례를 단죄하지 못할까 저어되는 것이겠죠.”
“…….”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에리카가 배신한 것이 저와의 우정뿐이라면 몰라도, 부모님의 온정을 배신한 것은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카리에의 단호한 말에, 일순 칼릭스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셀루리아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장기 말로는 아쉽게 되었지만, 그래도 드레인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장기 말을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좋았다.
‘이것으로 셀루리아의 눈치 볼 것 없이 드레인 대공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군.’
분명 오늘 카리에의 말은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득이 되는데, 굳이 그 말의 진위를 들춰 낼 필요는 없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마세요. 외면당한 셀루리아 후작 부부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대공가가 반드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칼릭스는 카리에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드레인을 멸문시키고 그 휘하의 군력을 황가 밑으로 흡수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국방력이 약해질 것이기에 불가능했다. 그러니 차라리 에리카를 이용하여 드레인 대공가가 감히 황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것이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한데.’
잠시 고민하던 칼릭스의 뇌리에 불현듯 사피엔이 스쳤다.
현재 득세하고 있는 구교파와 황족들을 적대시하는 자에게, 제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멍청한 사피엔이라.
참으로 그럴싸한 미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