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음악 좋아하시잖아요. 그럼 여기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바네사가 나를 데려간 곳은, 본전의 예배당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오케스트라 공간이었다.
물론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와 같은 이동할 수 있는 악기들은 없었지만, 이동할 수 없는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해 있었다. 특히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는 오르간의 위엄은 뭐, 그냥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이곳의 건반 악기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나는 홀린 듯이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게 하프시코드란 말이지…….”
전체적인 모양은 피아노와 닮았지만 흰색과 검은색이 반전된 2단 건반을 가지고 있는 이 하프시코드는 윗면과 겉면 등이 무척이나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하프시코드의 검은 건반으로 손을 슬금슬금 가져가며 바네사의 눈치를 봤다.
“저, 이거 눌러 봐도 돼요?”
“하하, 당연히 되죠. 그러라고 여기에 데려온 건데.”
웃음기 어린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마치 어린이날 선물을 잔뜩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로 건반을 톡 눌러 봤다.
하프시코드에서는 피아노와는 다른 챙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누르는 건반의 감각이 새삼 신기해서,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바네사, 저 방금 하프시코드 처음으로 만져 봤어요.”
“그런가요.”
“오르간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에요.”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바네사를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바네사는 마치 귀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오르간은 안 만져 볼 건가요?”
“음, 오르간은…… 너무 복잡해 보여서 그냥 안 건들려고요…….”
저렇게 복잡하게 생긴 걸 잘못 건드렸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물론 수리비는 지불하면 그만이지만, 저 커다란 걸 고칠 때까지는 앞으로 예배 시간에 오르간을 못 쓸 거 아니야.
일부러 눈을 흐리게 뜨고 먼 산을 찾자, 쿡쿡 웃은 바네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그녀가 비밀을 알려 주듯 소곤거렸다.
“저, 에리카에게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당장은 못 드리지만, 완성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과거 황후에게 처음으로 불려 갔을 때 황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너무 귀한 거라 공수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공수해 오면 꼭 주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불현듯, 온화하게 웃고 있는 바네사의 모습이 황후를 골탕 먹이려는 나와 겹쳐 보여서 괜히 으스스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팔을 문지르며 생각을 전환하고자 얼른 입을 열었다.
“바네사에게 선물을 받고만 있을 수는 없죠. 저도 뭔가 보답으로 해 드리고 싶은데, 원하시는 거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
“뭐든지, 가능하나요?”
한 번쯤은 예의상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바네사가 왠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로, 내가 황후에게 한 것처럼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다시금 오싹해지려는 등에 애써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그렇다면, 당신의 음악을 제게 가장 먼저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네사가 냉큼 말했다.
무슨 소원이 나올지 몰라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일순 어벙하게 눈을 깜박였다.
“……네?”
“에리카의 연주나 나중에 에리카가 작곡하실 곡 같은 것들이요. 저한테 가장 먼저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징징이 대공 전하께 저보다 먼저 들려드리는 것 정도는 특별히 눈감아 드릴게요. 그렇게 덧붙인 바네사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말간 은빛 눈동자가, 문득 신아의 눈동자와 겹쳐 보였다.
“내 서포트가 정 부담스럽다면, 앞으로 네가 직접 작곡할 곡은 나한테 가장 먼저 들려준다는 조건을 달든가. 그러니까, 네가 과제로 제출할 곡이나 취미로 작곡할 곡 같은 거 말이야.”
일순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서, 나는 꽉 쥔 주먹을 치맛자락 뒤로 숨겼다.
“……왜,”
“네?”
“왜 그런 걸 원해요? 더 좋은 걸 요구해도 되는데.”
깊게 잠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내 질문이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네사는 이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에리카의 음악이 궁금하니까요.”
“…….”
“궁금하고, 듣고 싶어요. 그냥 그뿐인데 뭔가 더 이유가 필요하나요?”
“…….”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따스함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신아의 여주인공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신아를 닮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요동치는 감정을 어느 정도 갈무리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물을 받게 되면,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바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래요? 어떤 노래인가요?”
직접 만든 노래라고 대답하자, 바네사가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빨리 들을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리카.”
“과제곡? 정지상의 ‘송인’을 모티브로 작곡했다고? 김해수 너 딱 기다리고 있어. 교수님과 상담 빨리 끝내 버리고 바로 튀어 와서 들을 거니까.”
환하게 웃고 있는 바네사의 얼굴 위로, 비장한 얼굴을 한 채 집을 나서던 신아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멍한 얼굴로 바네사를 바라봤다.
‘내가 그날 너한테 나와 그 집에 같이 가 달라고 했다면, 나는 약속대로 너에게 노래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찰나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갔더라면, 오히려 신아까지 화를 입었을 테니까.
“……저도 기대할게요, 바네사의 선물.”
울렁이는 마음을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린 나는 바네사를 따라 빙긋 웃음 지었다.
그래도 ‘신.로.줄’에 빙의한 덕에 신아의 딸내미 같은 존재에게나마 그 노래를 들려줄 수 있게 됐으니, 이만하면 잘된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 * *
즐거운 일이 끝나면 짜증 나는 일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신교의 성전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네사와 데이트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에 웬 불청객이 중앙 응접실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게 무려 황태자비 전하라 내쫓을 수도 없고 말이지.’
현관에서 다른 하인들에게 카리에의 침입, 아니, 방문을 전해 들은 나는 외출복 차림 그대로 1층의 중앙 응접실에 들어섰다.
비밀리에 잠깐 궁을 나온 모양인지, 카리에는 수수한 갈색 클록에 시녀들이 주로 입을 법한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카리에를 흘끗한 나는 클록을 벗어서 포카에게 건네고는 느긋하게 걸어가 카리에의 앞에 앉았다.
“말도 없이 이렇게 불쑥 내 집 안에 들어와 있다니, 이 정도면 무단 주거 침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는걸.”
심드렁한 얼굴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며 입을 열자, 내 말을 듣고 일순 움찔한 카리에가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로 변했구나, 너.”
“변한 건지, 아니면 이게 본 모습인지는 알아서 생각하고.”
“본 모습? 아니, 본 모습은 절대로 아니야. 원래 너는―….”
울컥하며 뭐라고 말하려던 카리에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 위화감이 조금 거슬렸지만, 굳이 귀찮게 캐물을 정도로 궁금하거나 거슬리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용건이나 말해. 나 바빠.”
“……어머니께, 레틸기스 즙을 드렸더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카리에가 나직이 읊조렸다.
나는 “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드렸지. 내가 저번에 너한테 레틸기스 청도 주면서 말했잖아? 맛있어서 너희도 꼭 먹어 봤으면 한다고. 나만 먹기엔 너무 아깝잖아.”
“…….”
“물론 좋은 거니까 나한테 준 거겠지? 좋은 건 서로 나누며 사는 게 인정이란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비꼬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하자, 부들거리고 있던 카리에가 테이블 위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네가, 네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동안 너를 거둬 준 우리 가문에게?”
카리에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 말이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내 입에서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감히?”
입가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얼굴을 서늘하게 굳힌 나는 팔짱을 풀고 카리에에게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뒤 그녀의 턱을 잡아챘다.
카리에와 눈을 똑바로 맞춘 내가 씹어뱉듯 읊조렸다.
“셀루리아가 나한테 어떤 대접을 했는지 잊다니, 벌써 노망이라도 난 건가?”
내 눈동자를 보고 일순 흠칫한 카리에가 재빨리 제 턱을 붙들고 있는 내 손을 쳐낸 뒤 뒤로 몸을 물렸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자, 곧 정신을 차린 카리에가 내게 겁먹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는지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이…… 이래서 사람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네가 우리 가문에서 홀대라도 당했으면 지금 이렇게 대공 전하와 결혼이라도 할 수 있었겠니? 다른 귀족들 붙잡고 물어봐. 네가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우리 가문에서 홀대받은 적이 있었는지! 우리 가문은 네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해 줬다고!”
“하…….”
나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뱉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아니, 저 궤변을 일일이 지적하고 있는 게 오히려 더 멍청한 짓일지도.
“……카리에.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 지금 입으로 똥을 싸고 있잖니.”
“뭐…… 뭐? 똥?”
“아, 저런, 너 지금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모양이구나……. 음, 이럴 때는 역지사지만 한 게 없지. 카리에, 딱 4년만 대공가에서 지내볼래? 내가 예전에 셀루리아 가에서 받았던 대접 그대로 해 줄게.”
말해 보고 나니 꽤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빛내며 카리에를 바라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말 딱 내가 받았던 대접만큼만 해 주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