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39)

87화

* * *

늘 차분하고 고요하던 황태자비궁에 소란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찾아왔다.

“카리에, 카리에―!”

마치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흐트러진 차림에 멍하니 풀린 동공으로 다짜고짜 황태자비궁에 들이닥친 델레미아는 발작하듯 제 딸의 이름을 불러 댔다. 성혼식 이후론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그 이름을.

하지만 지금 델레미아가 애타게 찾는 황태자비는 건국제 준비를 위해 황후궁에 가 있는 상태였다. 궁의 사용인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황태자비의 어머니를 내칠 수도 없고, 예법에 어긋나기에 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셀루리아 후작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

“뭐? 진정? 너 지금 감히 내게 진정하라 명령했느냐? 나는 셀루리아의 안주인이자 이 나라 황태자비의 어머니다!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한 것이야?!”

한 시종이 황태자비의 부재를 알리기 위해 델레미아에게 말문을 열었지만, 이미 에리카의 폭언에 분노해서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델레미아는 거칠게 시종을 밀어 버리고는 신발로 그의 손을 밟았다.

“아아악!”

“네가― 한낱 황궁의 시종 따위가 감히 나를 무시해?!”

손에 가하는 발의 힘이 더욱 세졌다.

시종의 비명 소리는 더욱 커졌고, 주위에 있던 다른 사용인들은 단단히 화가 난 후작 부인을 말리느라 쩔쩔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궁의 주인인 카리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건국제 준비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오던 카리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화, 황태자비 전하!”

“황태자비 전하!”

한순간에 모든 사용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딱 봐도 엉망진창인 상황에 절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카리에는 곧장 제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일단 발을 거두세요.”

카리에가 부드럽게 손을 뻗어 델레미아의 팔을 붙들며 말하자, 제 딸의 목소리에 반색한 델레미아가 반짝 고개를 들어 카리에를 쳐다봤다.

“카리에, 마침 잘 왔다. 이 건방진 시종이 나를……!”

“어머니, 보는 눈이 많습니다.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보는 눈이 많다’는 말에, 델레미아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서둘러 발을 떼자, 옆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사용인 두어 명이 서둘러 쓰러진 시종을 일으켜 세웠다.

‘그 어느 때라도 감정적으로 사고하는 법이 없던 어머니께서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다니…….’

막무가내로 폭력을 쓰는 일은 고사하고, 성혼식 후로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높여 대하지 않은 적이 없던 델레미아가 말이다.

대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싶어 카리에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차 두 잔과 간단한 핑거푸드를 내오렴.”

“네, 비전하.”

후작저에서 데려온 직속 시녀 에밀리가 카리에에게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에밀리가 떠나고 나서 카리에는 남아 있는 사용인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함구하거라.”

“예, 비전하.”

사용인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궁의 눈은 너무나 많기에 전부 입막음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어느 정도 응급 처치가 되었을 것이다. 카리에는 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델레미아에게 말했다.

“들어가도록 하죠, 어머니.”

* * *

카리에가 향한 곳은 중앙 응접실이 아닌 간이 응접실이었다.

간이 응접실은 내밀한 공간인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기에, 중앙 응접실보다 말이 흘러나갈 확률이 더 낮았다.

에밀리와 다른 시녀 한 명이 다과를 세팅하는 동안, 델레미아는 잔뜩 흥분했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경거망동으로 인해 비전하의 위신에 금을 낸 점, 사죄드립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카리에의 말이 끝나자마자 티타임 세팅이 완료되었다.

에밀리와 시녀가 트롤리를 밀며 응접실을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카리에가 곧장 물었다.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인가요?”

“……에리카, 그 망할 것이.”

“에리카? ……아아, 한스에게서 온 보고 때문에 오늘 그 애를 만나고 오신다고 하셨죠. 그 애가 또 멍청한 짓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였나요?”

잔뜩 굳었던 카리에의 얼굴이 반쯤 풀렸다.

나직이 숨을 내쉬며 제 앞의 찻잔을 집어 들던 카리에는 이어진 델레미아의 말에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레틸기스의 효력이 사라졌습니다.”

“……네?”

한순간도 상상치 못했던 말에 카리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를 생각하듯 얼굴을 완전히 구긴 델레미아가 짓씹듯 읊조렸다.

“저더러, 위아래도 몰라보고 대거리를 하는 발칙한 사람이라더군요. 감히―….”

“……하지만 분명, 그 애는 15살 때부터 꼬박꼬박 레틸기스 즙 섞인 물을 마셔 왔잖아요. 그 물밖에 주지 않았으니 마시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그, 그건…… 제 지능은 그 애가 어떻게 세뇌에서 풀렸는지를 궁금해할 정도로 높지 않으니, 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카리에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제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은 정상적이라면 절대로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한 델레미아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나저나 비전하, 그 망할 것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우리를 속인 것이었으면 어떡하지요? 분명 대공가에서도 이를 알고 있을 텐데, 이를 빌미로 셀루리아를 비롯한 구교파를 옥죄려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카리에는 굳은 얼굴로 델레미아의 기색을 꼼꼼히 살폈다.

분명 델레미아에게서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델레미아는 억지로가 아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 말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때, 베이센 소공작의 티파티에서 나한테 선물이랍시고 레틸기스 청을 줬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세뇌당해 있는 멍청한 꼭두각시가 감히 반기를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버린 일이었다.

정말로, 저한테 맛있었던 음료니까 우리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어 하는 마음에 준비한 선물이라 생각해서.

“카리에, 이거 봐 봐. 예쁘지?”

“너 줄게. 너 예쁜 거 좋아하잖아.”

그때의 그런 보잘것없는 마음으로 말이지.

들고 있던 찻잔을 꽉 움켜쥔 카리에가 나직이 물었다.

“어머니, 혹시 대공가에서…… 레틸기스 즙을 드셨나요?”

분노로 떨리는 손 때문에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었지만 아픔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델레미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전하께서는 제가 그 멍청한 것들이나 먹는 것을 먹었을 것 같으십니까?! 저는 그따위 것은 절대로 먹지 않― 윽…….”

화내듯 소리치던 델레미아가 불현듯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놀란 카리에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저 머리가 아픈 것뿐입니다.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애써 얼굴을 펴는 제 어머니를 보면서, 카리에는 다시금 꽉 주먹을 쥐었다.

레틸기스 즙을 먹었냐는 질문에 두통을 느끼는 것은 세뇌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감히…… 어머니께 레틸기스 즙을 먹이고 세뇌를 시켜?’

그것도, 에리카 그 애를 결혼시키기 전까지 무탈하게 키워 준 제 외숙모에게 말이다!

“……제가 직접 대공가에 방문하여 에리카와 만나 보도록 하겠어요.”

카리에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역시, 그 뱀을 죽였을 때 에리카도 뒤이어 곧바로 죽여 버렸어야 했다.

뭔가를 찾겠다고 온 집 안을 뒤집어엎는 에리카에게 아무리 가문 사람들의 신경이 쏠려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 * *

봄볕이 더욱 따사로워진 4월의 초순.

오늘은 아이들을 보러 신교의 성전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성전에 처음 방문한 뒤로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이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아이들과 부쩍 친해진 상태였다.

‘물론 내가 아이들과 급속도로 친해진 데는 첫날 보인 눈물과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는 바네사의 공이 더 컸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바네사를 흘끗 쳐다봤다.

기민하게 내 시선을 눈치챈 바네사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리카?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두 번째로 성전에 방문했을 때부터, 바네사의 요청에 따라 나와 바네사는 서로 비전하나 성하가 아닌 이름을 부르기로 약속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세이룬이 삐지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스로타와 이름을 부르기로 했을 때보다도 더 단단히 삐져서 풀어 주는 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나는 내심 바네사와 더 친근해진 것 같아서 기뻤다.

바네사를 볼 때면 왠지 신아가 떠올라서, 더 기뻤던 걸지도.

어쩐지 반짝반짝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바네사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뇨, 그냥 쳐다봤어요.”

“후후, 제가 예뻐서?”

“확실히 엄청 예쁘시기는 하죠.”

“고마워요, 에리카. 에리카도 엄청 예뻐요.”

바네사가 살포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 온화하면서도 인자한 미소에 왠지 신아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나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내가 신아의 절친이라고 해도 그렇지, 온화와 인자를 곁들인 이신아라니. 이건 선 넘은 거 아니냐…….

“그런데, 저한테 보여 주고 싶다고 한 곳은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생각을 환기할 겸 해서 나는 바네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네사는 등산할 때 단골로 듣는 말을 대답으로 내놓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아, 네…….”

당신이 생각하는 ‘조금’과 내가 생각하는 ‘조금’이 부디 같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 바네사와 함께 성전의 중앙 건물인 본전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 주고 나오던 내게 바네사가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보여 주고 싶은 곳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네사는 그곳을 나에게 보여 줄 생각에 신이 나는지 저도 모르게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행히 내가 생각하는 ‘조금’과 바네사가 생각하는 ‘조금’이 일치한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얼마 걷지 않아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속삭인 바네사가 문을 활짝 열었다.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바네사가 연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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