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9)

86화

위안을 얻은 적이 없으니, 정확히 어떤 위안을 얻는 건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고 남들이 느끼는 게 거짓이 되지는 않는 법이니까.

내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세이룬의 입술이 천천히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저는 에리카의 솔직한 모습이 좋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며, 그가 내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어리광 부리는 커다란 짐승처럼 내 품을 더욱 파고든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게는 당신을 감추려 하지 마세요. 제게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면, 마치 당신이 제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져 무섭습니다…….”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나는 웃으면서 세이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가 기분 좋은 것처럼 그르렁거리듯 웃으며 내 어깨에 뺨을 비볐다.

집무실에 감도는 봄 내음이 따뜻했다.

* * *

드디어, 한스가 셀루리아에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지금 나와 단둘이 드레인 대공저의 중앙 응접실에서 마주 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

“반갑구나, 에리카. 내가 저번에 특별히 선발하여 보내 줬던 하인이 너를 잘 보필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방문했단다.”

포카와 레비나가 다과를 세팅하는 동안 후작 부인은 누구보다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방긋 미소 지은 나는 이제 거칠 것이 없기에 과도한 사극체 말투를 아무렇게나 입에 올렸다.

“아아, 그러하시옵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아니, 후작 부인.”

“어머나, 망극이라니. 별것 아니니 그리 과도하게 예를 차릴 것 없단다.”

후작 부인은 화나서 달려온 와중에도 내 발연기는 마음에 쏙 들었는지 얼굴을 흡족하게 폈다.

내 사극체 말투에 담긴 비꼼을 알아챈 건 오히려 찻잔을 세팅하던 포카와 레비나였다.

“푸흡…….”

“큼, 크흠…….”

후작 부인이 왜 왔는지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흡족하게 누그러져 있던 후작 부인의 고운 미간이 일순 꿈틀거렸다.

“……너희는 왜 웃지?”

“아, 갑자기 바보 같은 사람이 생각나서요.”

“심기를 거슬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인.”

포카와 레비나는 전혀 미안해하거나 주눅 들지 않은 채로 꾸벅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그 건성인 태도가 눈에 들어왔는지, 후작 부인이 이를 으득 갈았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대공가의 사람들은 참으로 건방지구나.”

“아, 그러하시옵니까, 후작 부인. 어머나 이를 어쩌나.”

나는 놀란 척 눈을 땡그랗게 뜨고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 반응을 본 후작 부인은 이내 선심 쓰듯 얼굴을 누그러뜨리고는 막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문이 부리는 사용인들의 성품은 곧 안주인의 역량을 나타내는 법이거늘, 사용인들이 이 모양이니 다른 귀족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어. 하지만 이 외숙모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돌아가기 전에 저 버르장머리 없는 사용인들을 휘어잡는 법을 직접 선보여 주마.”

순간, 포카와 레비나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먹잇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번뜩였다.

나는 어쩐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저보다 더 격이 높은 대공가의 사람들을 직접 휘어잡겠다니.’

이건 뭐, 하극상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나는 목 끝까지 치민 ‘님 미쳤어요?’를 가까스로 집어넣은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부인, 어찌 귀한 몸을 직접 움직이려 하십니까. 일일지구부지외호라, 혹시라도 부인의 옥체와 정신 건강에 해가 될 일이 있을까 심히 저어되옵니다.”

“일일…… 지구…… 부……?”

처음 듣는 소리인 모양인지 후작 부인이 슬쩍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도 아는 것을 모른다고 티 내고 싶지 않은 듯 애써 아는 척 턱을 치켜들었다.

“그, 그래. 네 걱정이 가상하여 이번만은 특별히 참고 넘어가 주마. 네 사용인들은 너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야.”

부러 어깨에 힘을 준 후작 부인이 고고한 표정으로 말하자, 포카와 레비나가 다시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어.’

본인더러 대놓고 ‘범 무서워할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저격하고 있는데도 못 알아차리고 홀로 멋있는 척, 네가 아는 걸 내가 어떻게 모르겠냐는 척 잔뜩 거드름 떨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누구더러 멍청하다는 건지 알 수 없네요.

“……또 웃어?”

그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의도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후작 부인이 얼굴을 완전히 구기며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듯 얼른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 너무 화내지 마세요. 불연지돌연불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인의 지고한 뜻을 녹여 낸 말과 행동에 제 사용인들이 느낀 바가 어찌 없을까요. 제 사용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부인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차차 나아질 터이니 부디 심려를 거두세요.”

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봤어? 내 사용인들이 왜 웃겠어, 너의 멍청한 말과 고고한 척하는 행동에 익살스러움을 느껴서 못 참고 웃어 버린 거잖아.

이번에야말로 폭소를 터뜨릴 것 같았는지, 포카와 레비나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부들거리면서 트롤리를 밀고 서둘러 도망치듯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혔다.

드디어 응접실 안에 나와 후작 부인만이 남았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해 있던 후작 부인은, 보는 눈이 모두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멍청한 것.”

아까 전 일 때문에 심기가 단단히 상했는지, 들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후작 부인이 씹어 뱉듯 중얼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네가 그렇게 멍청하니까 그들이 제 주제도 모르고 바득바득 기어오르지 않느냐. 내가 어려운 명령을 내렸더냐? 너 16살까지 들었던 기본 교육은 귓등으로 처들었어? 하도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정말로 지능이 퇴화하기라도 한 것이냐? 아무리 천민의 피가 반이나 섞여 있다 해도 그렇지, 어쩜 이렇게까지 멍청할 수가 있어!”

“…….”

“내가 한스의 말만 들으면 된다 하지 않았더냐. 한스의 말만 그대로 따라 하면! 이건 아무리 정신머리가 모자라도 이렌텔 어만 배우면 할 수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그것도―”

“정말이지, 천박하고 오만불손한 어휘를 사용하시네요, 후작 부인.”

이제 더는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앞에 놓인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나긋하게 말하자, 열변을 토해 내던 후작 부인이 일순 멈칫했다.

카리에와 꼭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뭐…… 뭐?”

“구교파 중심 세력가의 안주인이면서, 어쩜 이렇게 예의범절도 모르고 왈왈 짖어 대는지……. 하긴, 그렇게 발칙하니까 윗사람도 몰라보고 대거리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뭐, 뭐? 대거리?”

그 누구에게서도 감히 들어 보지 못한 말에 당황했는지, 후작 부인은 한동안 버퍼링이 걸린 듯 버벅거리며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이 당연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냐는 얼굴로 갈색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시선을 들어 올려 후작 부인과 시선을 맞췄다.

“감히, 일개 후작 부인 따위가, 일국의 대공비인 내게. 지금. 대들고 있잖아요. 이게 대거리가 아니면 뭐겠어요?”

“너…… 너? 너, 너……!”

“제발 사람 좀 잘 가려서 상대하세요. 적어도 공인이 되신 따님께 누가 되지는 말아야죠?”

나는 권태로운 권력가처럼 나른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멍청한 마리오네트라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쏟아지는 폭언에 당황한 후작 부인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어이쿠, 토마토가 친구 하자고 덤벼들겠어요.’

기가 막히고 코도 막히고 뇌혈관까지 막혀 버린 모양인지, 제대로 말도 못 하는 후작 부인의 새빨간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한 나는 이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차는 입에 맞으세요?”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후작 부인이 경계 어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의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쓸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카리에 편으로 보냈던 레틸기스 청은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직접 이렇게 대접해 봤거든요. 맛은 은근 괜찮죠?”

“뭐……?”

“저한테 레틸기스 즙 많이 먹였잖아요. 혼자만 먹기 아까운 맛이라 공유하고 싶어서요.”

“이…… 이 천한 것이 감히―!”

이번에야말로 거세게 동요한 후작 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들린 큰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가 단숨에 들어와 나를 향해 덤벼들려고 하는 후작 부인을 제압했다.

나는 턱을 괴었던 느긋하게 팔을 풀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개 후작 부인아.”

“이, 미천한 것이…… 으읍!”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던 후작 부인의 입이 레비나에 의해서 우악스럽게 틀어막혔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핏발 선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어떻게 세뇌에서 풀렸는지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지능은 그런 걸 궁금해할 정도로 높지는 않으니까.”

“……!”

“음, 이렇게 말하면 세뇌가 되는 건가요? 제가 누군가를 세뇌하는 건 처음이라서 많이 어색하네요.”

저는 매번 당하는 처지였거든요. 그렇게 덧붙이며 생긋 웃은 나는 한 손가락으로 후작 부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제발 약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스트레스 좀 풀지 마세요. 진짜 추하고 못나 보이니까.”

“……! 으읍……!”

후작 부인이 모멸감을 느끼는 듯 내 손가락이 닿는 얼굴을 힘껏 비틀었지만, 지금껏 펜만 들었던 사람이 인간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인족의 힘을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아까보다 배는 더 붉어진 후작 부인의 얼굴을 찬찬히 감상한 뒤, 비웃듯 말했다.

“포카, 레비나. 후작 부인 돌아가신다. 배웅해 드리렴.”

“읍, 으읍……!”

“가시죠, 후작 부인.”

“저희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몹시 정중한 말과 그렇지 못한 행동으로 후작 부인을 질질 끌고 나갔다.

나는 후작 부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끌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목 닦아 놓으셔야겠네요.”

이것만으로는, 아직 한참이나 더 부족하거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