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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85)화 (85/139)

85화

“네! 어서 빨리 들어오세요, 전하! 내 남편! 내 낭군님!”

세이룬이다! 나는 서류에 박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두고 보세요.”

세이룬이 들어오기 전, 내 귓가에 살벌하게 속삭인 한스가 공손한 태도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세이룬이 들어왔다.

나를 담은 그의 금빛 은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부인님,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오늘 아침에도 봤잖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세이룬에게로 손을 뻗었다.

제게로 다가오는 내 손을 붙잡은 그가 내 손에 제 뺨을 대고는 눈을 내리깔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떨어져 있던 그 몇 시간이 제게는 영겁과 같이 느껴졌는걸요.”

“어리광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놀리듯 말한 나는 세이룬을 데리고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흘끗 돌아보니, 포카와 레비나는 진작 사라져 있었고 한스 또한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후다닥 집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한스가 완전히 나간 후 탁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 위에 털썩 앉아 세이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눈치 없는 한스 새끼, 제발 눈치 챙겨…….”

“그자가 아직도 셀루리아에 보고하지 않은 겁니까?”

세이룬이 속상한 얼굴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더욱 파고들었다.

“응, 완전 근무 태만이라니까. 월급 루팡이야, 아주.”

“저한테 한마디만 하시면 그자의 없던 눈치도 다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에리카.”

한마디만 해 주세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인 세이룬이 유혹하듯 나른하면서도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순간 혹해서 멍하니 세이룬을 바라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난 괜찮아. 저 거지 같음을 내가 참아 이겨 낼게! 사회생활의 고통도 내가 감내해 볼게!”

“……한마디만 하시면, 고통 같은 거 감내할 필요 따위 없는데.”

“그런 경험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야.”

“하지만 에리카는 그렇게 만들어진 피와 살이 이미 충분히 많지 않습니까.”

눈썹을 축 늘어뜨린 그가 순식간에 나를 끌어당겼다.

졸지에 나는 상체를 일으킨 보람도 없이 다시 세이룬의 품으로 안기듯 쓰러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흔적조차 남기지 않도록 제가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두 손으로 나를 받치듯 부드럽게 감싸 안은 그가 내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자가 보내야 하는 보고는 다른 이에게 보내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하인의 행방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으니, 그자는 행복을 찾아서 야반도주했다고 둘러대면 다른 이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에리카, 그자를 처리하라고 한마디만 해 주세요.

달콤한 속삭임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지만, 귓가에 닿아오는 세이룬의 숨결에 혼을 빼앗겨 버린 내 귀엔 말의 내용 같은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터질 듯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가 이미 나를 삼켜 버렸는데, 그런 게 어떻게 귀에 들어와.

“……요망해.”

“네?”

“누구 남편이 대체 이렇게 요망한 거야. 사람 설레게.”

세이룬의 품에 박혀 있던 고개를 반짝 든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슬긋 들어 올렸다.

바로 코앞에서 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세이룬이 급히 숨을 삼켰다.

“들려? 나 지금 심장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세이룬의 손을 잡아 내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꽤 두꺼운 옷 사이로도 박동이 느껴졌는지, 흠칫 놀란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손을 거둬 갔다.

“……이렇게, 저를 자극하시면…….”

“네가 먼저 날 자극했잖아.”

왠지 억울해져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삐죽이자, 하, 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저도 모릅니다.”

응? 하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술이 겹쳐졌다. 강인한 손이 내 뒤통수를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꽉 끌어당겼다. 부족한 숨을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세이룬에게 더욱 매달렸다.

한순간에 한스 자식 때문에 짜증 났던 기분 같은 건 모조리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많이, 느셨습니다.”

겨우 입술을 뗀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마주 속삭였다.

“네가 잘 가르쳐 준 덕분이잖아.”

“숨도 쉬실 수 있고.”

“네가 코로 쉬라며.”

그가 기분 좋은 듯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 뺨에 짧게 입술을 가져다 댄 그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에게 키스를 가르친 자가 저라서 기쁩니다.”

옅은 진동이 뺨에 닿아 와서 나는 간지러운 마음에 키득거렸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봄 햇살이 집무실 바닥에 어지러운 빛 자국을 그리고 있었다.

“근데, 세이룬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거야?”

나는 매끄러운 비단실처럼 흘러내리는 세이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질문에, 문득 세이룬이 흠칫 굳었다.

그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냥, 제 타고난 실력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얼버무리려는 기색에, 나는 매의 눈을 뜨고 세이룬을 바라봤다.

“아니? 나는 네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터득했는지 정말, 무척, 매우, 아주 궁금한데?”

세이룬이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까지 깨물어?’

대체 어떻게 배웠길래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 저렇게 난처해하는 건데!

내 눈에 서린 의심의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그 뒤로도 얼마간 더 안절부절못하던 세이룬이 이내 주저하는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제게 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책?”

“네. 부인께 사랑받는 남편들은 밤이 중요하다면서,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제가 잘해야 그대가 다른 놈팡이한테 한눈팔 일이 없으니 책을 잘 숙지하라고 하셔서…….”

“…….”

나는 차마 더 듣지 못하고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려 버렸다.

‘어머님! 대체 세이룬한테 무슨 소릴 하신 거예요!’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을 어지럽게 울려 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그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매일 혼자서 연습을……”

“크흠, 음. 아, 그나저나 여기엔 어쩐 일이야? 지금은 근무 시간이니까, 네 성격상 보고 싶다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 텐데?”

이대로 두면 낯간지러움의 한도를 초과할 것 같아,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세이룬은 바뀐 화제에 잘 따라와 주었다.

“우연히 하르센 보좌관이 부인님께 보고하러 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에리카가 보고 싶어 제가 대신 부인님께 보고를 드리겠다 했어요.”

“보고?”

“저번 달에 전국에 지점이 있는 대형 서점을 하나 인수했지 않습니까. 그곳에 번역된 경전들의 입고 작업을 모두 완료했다고 합니다.”

“아, 빨리 끝났네.”

순조롭게 끝난 작업이 기꺼워서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던 세이룬이 언제부터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 있었는지 모르겠는 책을 집어 들며 내게 내밀었다.

“이것이 인쇄된 경전의 견본입니다.”

“오, 잘 나왔네.”

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경전을 받아 들었다.

평민들도 쉽게 사고 소장할 수 있도록, 값싼 가격에 때가 타도 티가 안 나는 검은색 양장 표지를 주축으로 한 경전은 마치 소장본으로 제작된 양산형 판타지 소설 같…….

“커흠, 으흠, 어흠.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나 성스러움이 담뿍 느껴지는 책이 다 있담. 들고만 있어도 신의 은총이 느껴지는 것 같네.”

“에리카, 어조가 마치 책 읽는 것 같습니다.”

“…….”

세이룬의 웃음기 어린 말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킬리언과 바네사가 이레알 교를 믿으니까 신성 모독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본전도 찾지 못했다.

힘없이 경전을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놓고 있으려니, 세이룬이 은근슬쩍 나를 안아오며 물었다.

“에리카는 신을 믿지 않으십니까?”

“……원래 종교와 정치 얘기는 하는 거 아니랬어.”

그대는 지금 관계의 파국을 불러 올지도 모르는 금단의 대사를 꺼냈습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세이룬의 입 위로 가볍게 포갰다.

내 진지한 얼굴을 보고 웃음을 삼킨 그가 내 손바닥 위에 촉 입을 맞췄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제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맞춰 바꿀 수 있다고.”

“…….”

“혹시 의견 충돌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럴 일은 결코 없으니 에리카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내 눈을 가만히 맞춰 왔다.

그 빤한 시선에, 나는 그에게 잡혀 있던 두 손을 빼내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 세계관에서는 구교 아니면 신교를 믿는 것이 당연하니까, 내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이룬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바꿔 줄 수 있다고 했잖아.’

물론 나는 세이룬이 바뀌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내게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에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는 이유로 말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데굴데굴 굴리던 시선을 들어 그와 맞추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군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거든. ‘종교는 일반인에겐 진리고, 현자에겐 구라고, 권력자에겐 개꿀이다.’ ……음, 이거랑 같은 단어를 쓴 건 아닌데, 아무튼 비슷했어.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

세이룬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를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어. 어떤 사람은 분명 신을 믿으면서 위안을 얻을 테고, 그 위안은 거짓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면 대답이 되었으려나?”

물론 나는 신에게서 단 한 번도 위안을 얻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나 엄마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다른 건 바라지도 않으니 그 새끼 죗값만 치르게 해 달라고 천백 번도 넘게 신에게 빌었는데.’

결국 돌아온 건 집행 유예와 지적 장애인이 된 엄마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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