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84)화 (84/139)

84화

* * *

황궁에서는 건국제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인 3월 하순의 어느 날.

셀루리아 후작 가문에서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보내 준 하인인 한스가 왔다.

지난 성혼식 연회에서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답답해서 못 봐 주겠는 내게 직접 붙이겠다고 통보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뭐라더라, 해수가 처리할 안건에 최종 서명할 때 곁에 대동하고 있으랬나?

“그럼 비전하, 최근에 해수의 이름으로 결재했던 서류 좀 보여 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내게 저런 발칙한 언사나 찍찍 내뱉고 있는 거지.

세이룬과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내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던 한스는, 내가 포카와 레비나랑만 같이 있게 되자마자 곧바로 예의를 엿 바꿔 먹었다.

‘이젠 참…… 놀랍지도 않다…….’

흐린 눈을 뜬 나는 내 앞에서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후작 부인이 내 자존감과 자존심을 열심히 후려쳐서 감히 꼭두각시로서의 내 본분을 잊지 않게 하도록 하라고 했겠지. 아무리 후작 부인의 명령으로 저런 짓거리를 하는 거라 할지라도 용서할 마음은 물론 없지만.

‘저런 거에 가담하는 사람 중에서, 완전히 심취하지는 않더라도 은근히 즐기지 않는 사람은 없단 말씀.’

저런 걸 전혀 즐기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저렇게 열심히 명령을 수행하지도 못한다.

내 뒤에 시립해 있던 레비나와 내가 먹을 다과를 내려놓던 포카가 미친놈 보는 듯한 눈으로 한스를 쳐다봤지만, 한스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보는 눈이 둘이나 있는데 바로 본색을 드러내다니.’

어쩌면 하인 둘의 말 같은 건 셀루리아에 벌벌 기는 나의 비호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를 가문을 휘어잡는 안주인으로 보는 건지, 비루먹은 꼭두각시로 보는 건지 둘 중에 하나만 골라…….”

“예?”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전하께 드리지 않은 서류가 어디에 있나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소심하게 대답하면서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중에서 적당한 내용을 담은 서류들을 꺼낸 나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 여기 있어.”

“어디 봐요.”

어이없어서 굳어 버린 포카와 레비나를 깔보듯 흘끗한 한스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서류를 휙 채갔다.

그러고는 자기가 무슨 관리자라도 된 것처럼 서류를 살피는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레비나가 다소곳하게 다가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비전하, 저 사람은 죽이면 안 되는 건가요……?”

“응, 그런 거 아니야…….”

흐린 눈으로 타이르며 고개를 젓자, 레비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소리 없이 물러났다.

나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물러나는 레비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여우 수인인 포카보다 토끼 수인인 레비나가 유독 칼을 쓰고 싶어 하곤 했다.

‘피 속성 토끼, 뭐 그런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스를 바라보자, 서류를 넘길수록 점점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서류철을 탕 소리 내며 내려놨다.

“정말이지…… 대체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셀루리아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무려 5년간이나 신교에 후원을 하겠다고 하다니! 그리고, 이 근본도 없는 자기 투자 건은 대체 뭡니까? 명망 있는 셀루리아의 사람으로서 정통 있는 명품을 가까이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런 가짜에 투자할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이후로도 혼자서 열심히 화를 내던 한스는 마지막을 거나한 한숨으로 장식하면서 머리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신교로의 후원은 기간을 1년으로 줄이세요. 보통 종교 관련한 계약은 1년 단위니까 변경은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이 근본 없는 자기에 투자한다는 계약은 당장 해지하도록 하세요. 아시겠어요?”

“음…….”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는데. 내가 당연히 제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한스는 “응”이라 잘못 듣고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포카와 레비나를 쳐다봤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직속 하인이란 것들이 제 주인을 닮아서 어벙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지를 않나……. 아무튼 너희, 앞으로 내 명령을 잘 따르도록 해. 내 명령이 곧 비전하의 명령이니까.”

“…….”

“…….”

레비나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는 포카마저 내게 빤한 눈동자로 물어왔다.

저 새끼, 정말로 죽이면 안 되는 거냐고.

‘아직은 안 돼…….’

나는 아련한 눈으로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한스를 죽이면, 셀루리아에서든 혹은 셀루리아의 보고를 받은 황가에서든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드레인을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다.

아니, 주의 깊게 지켜보기만 하는 건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둘 중 어느 쪽도 드레인을 탓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분명 셀루리아는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중들라고 보내 준 하인’을 드레인이 죽였다며 온갖 난리 블루스를 칠 테고, 황가는 얼씨구나 좋다 하며 셀루리아의 편에서 드레인을 헐뜯을 것이다.

‘아아, 보인다 보여.’

나는 눈을 흐리게 뜨고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경전 작업이 끝나지 않은 마당에 쓸데없는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스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대역이 또 올 텐데, 그때마다 계속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한스는 셀루리아 사람들에게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미끼이기도 했다.

‘에스로타도 내가 과거 셀루리아에서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당에, 보안을 요하는 경전 번역본 출간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기만 하면 굳이 셀루리아의 저 엿 같은 가스라이팅을 더 들어주고 있을 필요는 없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스를 통해서 셀루리아 후작이나 후작 부인이 이쪽으로 직접 나를 만나러 오게 하는 쪽이 가장 깔끔했다.

‘결론적으로, 한스는 얼마간 더 이 저택에서 목숨을 연명해 줘야 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 한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그럼 전 숙소에서 한숨 자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제가 말한 대로 서류 내용 고치고 계세요. 다시 올 때까지 안 고쳐져 있으면 바로 셀루리아에 보고할 겁니다.”

마치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어린아이를 겁주는 것처럼 으름장을 놓은 한스는 곧 기지개를 켜면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한스가 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던 포카와 레비나는, 달칵 하고 문이 도로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나를 돌아봤다.

“나중에 저 새끼가 필요 없어지면,”

“저 새끼는 저희한테 주세요.”

밑도 끝도 없는 요청에, 나는 어벙하게 눈을 끔벅였다.

“응? 저 새끼를 달라고……?”

내 물음에, 두 사람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대체 뭐 하려고?”

의아해서 물어보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화려한 마지막을 선사해 주려고요.”

“환생해서도 절대 잊지 못할 마지막이요.”

“으응…….”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야, 너는 절대로 곱게 죽지는 못하겠다…….

왠지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 와서 슬쩍 팔을 문지르고 있는데, 밖에서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보좌관 빈센트 하르센입니다.”

“아, 어서 들어오세요.”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저절로 들떴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들어온 빈센트는 곧장 내게로 걸어와 보고서를 내밀었다.

“경전 번역본의 인쇄가 모두 완료되어 보고드립니다.”

“와, 그 많은 권수를 전부?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아무리 어마어마한 자본과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과 대공령의 인력을 투입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보고서에는 그동안의 진행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보고서를 훑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포카와 레비나에게 한스를 줄 날이 머지않았네…….”

중얼거림을 들은 두 사람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순진한 빈센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빈센트, 음. 그런 게 있어.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어느새 서점의 전국 지점에 경전 번역본이 모두 입고되었다.

한스는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같잖은 말을 막 내뱉고 다녔다.

“비전하, 정말 제대로 못 하세요? 이거 고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며칠을 끌고 있어요!?”

“이건…… 그러니까,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대공 전하께서 동의하지 않으셔서…….”

“아, 진짜 답답해 뒈지겠네. 비전하, 이 사안의 최종 결정은 온전히 비전하의 몫이라고요. 대공 전하가 동의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고요!”

“하지만…… 나 따위가 감히 어떻게 그래…….”

“아아아악!”

물론 그 같잖은 말들은 모두 나의 ‘소심한 척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하기’ 공격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행동하시면, 정말로 가주님께 보고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아시겠어요?”

“어머나, 무서워라…….”

한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내게 경고를 날렸고, 나는 호달달 하는 척을 하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아니, 이 자식은 지금이 며칠째인데 아직도 후작한테 보고를 안 하고 있냐고.’

이쯤 되면 근무 태만으로 내가 먼저 후작한테 꼰지르고 싶을 정도다.

‘네가 빨리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보고를 해야 그 사람들이 빡쳐서 날 찾아오지……!’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스는 지금 제 딴에는 나한테 기회를 준답시고 선심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선심도 받는 사람이 고마워해야 선심이다.

‘이 눈치 없는 자식아, 네놈의 개소리 좀 안 듣고 싶으니까 빨리 보고해라, 진짜…….’

그렇게 애꿎은 서류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똑똑 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