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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83)화 (83/139)

83화

“……알겠습니다. 번역은 언제까지 하면 되는 겁니까?”

잠시 침묵하고 있던 킬리언이 수락했다.

빙긋 웃음 지은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경전 번역 작업은 각별한 보안을 요하는 작업이니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게다가, 이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기만 하면 굳이 셀루리아에 내 본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잖아?’

물론 대외적으로 전시한 내 천사 이미지는 계속 유지를 해야 했으니 본모습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내게 뒤통수 맞았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 없는 셀루리아에게만 슬쩍 드러내는 건 가능했다.

‘드디어 사장님 나이스 뒤통수 샷을 할 때가 도래한 건가……!’

갑자기 마음이 두근두근해져서 나는 냉큼 입을 열었다.

“3월까지는 모두 마쳐 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하신가요?”

“가능합니다. 그러면 번역 작업을 완료하는 대로 원고를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번에도 교황님 편으로 보내 주세요. 민감한 부탁일 수 있는데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킬리언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협력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감사 인사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여태껏 가깝게 지냈던 구교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니 심란하긴 하겠지.

바네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킬리언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 온기를 느낀 킬리언이 희미하게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왠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비어 있던 손에서 상냥한 온기가 느껴졌다.

흠칫 놀라서 돌아보자, 세이룬이 눈을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손,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그게 뭐야.”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여주와 남주가 꽁냥거리고 있는 게 부러워서 쳐다보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맞잡아진 손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게 가려진 휘장 너머로 가수의 맑은 소프라노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진실’을 노래하는 아리아였다.

* * *

황태자비궁의 중앙 응접실에서는 흑차 향기가 향긋하게 퍼져 나갔다.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비치는 창가의 테이블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릭스가 나긋하게 물었다.

“황궁 생활은 괜찮나요?”

“전하께서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시는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답니다.”

카리에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주 미소 지은 칼릭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정보다 일찍 오게 된 황궁이 낯설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곳에 적응을 잘 하더라도 친정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니 방문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하세요. 특히나 그대는 셀루리아 소후작으로서의 수업도 병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꼭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소리 없는 웃음이 흐르는 응접실의 공기는 무척이나 따사롭고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삭막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얼마간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얼마쯤 그렇게 시간을 보냈을까. 드디어 본론을 시작하듯 슬쩍 고개를 기울인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드레인 대공비와 그대의 사이가 무척이나 돈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의 존재가 괜히 두 사람의 우정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네요.”

드디어 나온 본론에, 카리에는 일부러 짓고 있던 미소를 살짝 흐렸다.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은 카리에가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방해라니요. 그때도 보셨다시피 에리카는 오히려 저와 전하의 결혼을 무척이나 기뻐했답니다. 2년 전, 제가 전하께 처음 청혼을 받았을 때도 마치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었는걸요. 다만…….”

“다만?”

카리에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리자, 칼릭스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카리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만, 드레인 대공께서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전하께서도 보셨잖아요. 대공은 저와 에리카가 손을 잡는 것도 불쾌하신가 봐요.”

“그것은 저도 보았습니다. 그때 대공께서 그대에게 했던 행동은 상당히 무례했어요.”

드레인 대공의 무례함을 은근히 드러내며 대공가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려던 카리에는 칼릭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무례하다’고 평하자 흠칫 놀랐다.

재빨리 당황을 갈무리한 카리에는 머뭇거리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저는 드레인 대공께서 에리카의 남편이고 대공가는 에리카의 시가이니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히려 에리카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더더욱 우려를 참을 수가 없어요.”

감정을 갈무리하듯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카리에가 이어 말했다.

“입에 올리기에는 민감한 말이지만…… 최근 드레인 대공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잖아요. 에리카가 갑자기 해수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신교에 후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은 작게는 황가와 셀루리아의 반목을, 크게는 구교파의 분란을 원한다고밖에 읽히지 않아요.”

“…….”

“에리카는, 천성이 맑고 선한 아이예요. 대공가에서 에리카에게 그런 것들을 하도록 강요한다면 에리카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토록 착하고 미련한 아이니까요. 그런 아이가 대공가에 있다면…… 에리카는 계속 대공가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대는, 대공비께서 이용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칼릭스가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문의 치부를 숨기는 데 정신이 팔려서 칼릭스의 질문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카리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요. 그 누가 친애하는 사촌이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아까의 의미심장한 기색을 말끔히 지운 칼릭스는 생긋 웃으며, 성혼식 전에 황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셀루리아는 대공비를 잘 구슬려 보겠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애하는 조카딸이 불쾌해하지 않는 선에서 살살 구슬려 보는 정도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잖아? 나는 그 정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그렇다면 어마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후작가 몰래 대공비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일 거야. 물론 적당량을 한 번만 먹여도 효과는 충분하다지만, 그래도 꾸준히 먹인다면 꽤 유용한 장기 말이 탄생하지 않겠어?”

결국, 황후는 대공비를 황궁으로 불러 레틸기스 즙을 먹임으로써 셀루리아 후작가와 드레인 대공가에 얽힌 장기 말을 손에 넣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대공비의 자아가 손상되었겠지만, 대의를 추구하려면 그 정도의 사소한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법이지 않은가.

셀루리아 후작가는 황가에서 대공비에게 레틸기스 즙을 먹였다는 것을 알면 분명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카리에는 에리카가 이용당하는 것이 싫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이 사실은 감추는 것이 좋겠어.’

분위기를 환기하듯,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칼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촌 언니를 위하는 그대의 우려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대와 그대의 사촌 언니를 위해 제가 도울 것은 없을까요?”

‘사촌 언니’라는 단어에 일순 멈칫한 카리에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황급히 테이블 아래로 내려 감췄다.

“……말씀과 걱정은 감사하나, 제 개인적인 일로 다망하신 전하를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선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의논해 보겠습니다. 에리카의 의견도 들어 보고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해 주세요. 저는 그대의 남편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릭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두 달 후면 건국제 준비로 인해 무척이나 바쁠 텐데, 그대의 심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씀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물론 도움이 필요하면 곧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덧붙인 카리에가 싱긋 웃자, 칼릭스도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마주 웃었다.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응접실 안에서는 셀루리아의 흑차 향기가 여전히 향긋하게 감돌고 있었다.

* * *

성혼식이 끝난 지 한 달 후, 에스로타는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이센 공작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원래라면 계승 전후로 티파티를 개최하여, 성혼식 때 다지지 못했던 사교계의 별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베이센 공작가의 권세 또한 흔들림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 줘야 했지만, 에스로타는 단지 황제에게만 약식으로 충성 서약을 바치고는 저택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오늘도 에스로타는 불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공작의 집무실에서 문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성혼식이 끝난 지 일주일 후에 녹셰로부터 도착한, 녹셰에 직접 방문할 정도로 간절히 원했던 에리카에 대한 S등급과 A등급의 정보가 담긴 문서였다.

그렇게 에스로타는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다.

에리카의 출생, 비천한 아비, 그로 인해 생겨난 후작 가문의 학대.

“……그것도 모자라, 레틸기스 즙까지 먹였다고.”

하, 하는 실소가 다시금 새어 나왔다.

아무리 천민의 피가 섞였다 하더라도 제 피 또한 섞인 친조카에게 레틸기스 즙까지 먹인 사람들이었다. 지난번 후작 가문으로 들여보냈던 첩자들이 얼마 버티지도 못한 채 제거됐던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에스로타는 후작 가문의 만행이 적힌 부분을 찢어 버릴 듯 노려보다가, 이내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구교파의 실세 중 한 곳으로, 예배일이나 연회, 회의 등에서 보았던 그들은 다정하지는 않더라도 정의를 아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래서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수없이 얼굴을 맞대며 교류해 오던 그 가문이.

입으로는 신의 사랑을 말하면서, 정작 벌여 온 행동은 소름 끼치도록 추악한 것일 줄은.

‘혈육의 정을 떠나서라도, 어떻게 신의 종으로서 신을 섬기며 한 사람의 자아를 완전히 파괴할 생각을 할 수 있지……?’

심지어,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실행하기까지 했다.

제 친조카에게.

에스로타는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책상 위로 상체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 구교파 인사들을 마주할 수 없었다.

셀루리아와 같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자신마저 경멸스러워졌으니까.

“……신께서는,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분이라 믿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신께서는 제 사촌을 그토록 악랄하게 핍박하는 자를 차기 이렌텔의 국모로 삼으실 수 있으신가.

“이제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멍하니 중얼거린 에스로타는 하인을 불러서 평생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벌써 며칠째,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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