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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82)화 (82/139)

82화

이마에 커다란 혈관 마크가 생긴 나는 파들거리는 입꼬리로 간신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둘 다 안 착하단 말이죠? 이걸 어쩌나, 나는 내 첫 오페라를 안 착한 사람과 보고 싶지 않은데~ 그냥 다른 적당한 사람을 찾아야겠네요~”

두 사람의 표정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아, 아니에요! 음, 저 착해요! 저 완전 착한 사람이에요, 비전하! 저 교황이잖아요. 저처럼 착한 사람은 드물걸요?”

바네사가 황급히 고개와 두 손을 내저으며 말을 뒤집었다.

어마어마한 눈으로 바네사를 노려본 세이룬도 재빨리 말을 바꿨다.

“에리카의 남편이 착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착하게 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지만, 나는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세이룬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세이룬, 당신은 나한테만 착했잖아…….’

무척이나 편들어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그냥 너를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네 성격이 좋다고 거짓말할 수 있겠어.’

나는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것뿐인데, 어떻게 수학까지 좋아하겠냐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에리카―….”

“어, 음,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착하다는 거네요, 그렇죠?”

나는 서글프게 나를 바라보는 세이룬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을 돌렸다.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바네사와 침울하게 어깨를 축 내려뜨린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다시금 손뼉을 짝 쳤다.

“그럼 됐네요. 셋이서 제 첫 오페라를 보러 가도록 하죠. 특별히 제가 보여 드릴게요.”

“네?! 아니, 잠깐―”

“저는 싫습니다!”

바네사와 세이룬의 얼굴이 한순간에 팍 구겨졌다.

다시금 서로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는 둘을 빤히 바라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착한 성인은 타인을 배척하지 않는데.”

“…….”

“어라, 설마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건가요? 음, 아무래도 셋이서 가면 세네카 소공작께서 소외감을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그냥 이렇게 넷이서 오페라를 보면 되겠다. 어때요? 세네카 소공작, 괜찮죠?”

“영광입니다, 비전하.”

내가 바네사와 세이룬을 조련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던 킬리언이 단정한 동작으로 내게 인사했다.

이 이상의 마찰은 오히려 더 불리한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드디어 했는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바네사와 세이룬의 시선이 떨어졌다.

드디어 찾아온 평화에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럼 제 첫 오페라는 이렇게 넷이서 보는 것으로 하죠. 불만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볼까요?”

“……아뇨, 비전하. 비전하의 말씀인데 불만 같은 게 있을 리가요.”

“……부인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바네사와 세이룬이 소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 * *

“……그래서, 사피엔 황자 전하께서도 뜻을 함께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나는 현 상황을 짧게 정리해서 바네사와 킬리언에게 알려 주었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바네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황자 전하께서 얼간이 연기를 하고 계셔서 경계 대상이 아니지만, 그 연기가 일의 마무리까지 계속 이어진다면 분명 전하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문제가 생길 겁니다. 얼간이를 황제로 추대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바네사의 말에 이어 킬리언도 말을 보탰다.

“또한, 황자 전하께서 어수룩한 연기를 계속하신다 할지라도, 대공가와 신교파가 점점 이를 드러낼수록 황가 측에서는 황자 전하를 눈엣가시로 여겨 제거하고자 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여지가 있는데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저는, 4월에 있을 건국제 직후 황자 전하를 비밀리에 대공저로 모시고자 해요.”

“―싫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줄곧 침묵하고 있던 세이룬이 불현듯 강하게 말했다.

우리의 대화를 덮어 주고 있던 레치타티보도 순간적으로 집어삼킬 만큼 크고 단호한 목소리여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룬을 바라봤다.

“세이룬……?”

“……싫습니다. 집에, 외간 남자를, 들이는 건. 싫어요.”

그가 치를 떨면서 한 글자씩 끊어 뱉듯 말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서둘러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잠깐만, 외간 남자를 들이는 거라니― 절대 아니야! 이건 그냥 필요한 사람을 눈 닿는 데 안전하게 두는 것일 뿐이야.”

“…….”

“세이룬, 우리 집 아주 많이 매우 넓은 거 알지? 얼마 전에는 스레인도 손님방에서 머무르기 시작했잖아.”

나는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최대한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세이룬은 이번만큼은 고집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사피엔 그자는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구밀복검 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 음험한 자가 에리카와 한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냥 그자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만큼 싫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옅은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일렁였다.

그 눈물에 덜컥 숨을 멈춘 나는, 일단 알겠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두 손을 뻗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자, 내 손을 제 손으로 감싼 그가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내 손에 제 뺨을 비볐다.

그런 세이룬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바네사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 저도 우리 순진하고 귀여운 비전하를 속이 시커머신 분과 같이 지내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황자 전하는 저희 신교의 성전에서 모시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킬리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바네사에게 물었다.

바네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성전에는 이미 몇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머무를 뿐만 아니라, 교황의 사적 공간에 대한 보호도 매우 철저한걸요. 킬리언도 잘 알잖아요.”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날 믿어 줘서 고마워요.”

“제가 당신을 믿는 것은 숨 쉬듯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바네사와 킬리언의 시선이 정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달콤했다.

명화를 찢고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저토록 달콤하게 웃음 짓고 있다니.

역시, 저들은 괜히 로판의 여주와 남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신아야, 네 자식들이 연애질한다…….”

신아에게서 말로만 들었던 인물들이 바로 눈앞에서 연애하고 있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져 멍하니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은 세이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에리카?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말해 줄게.”

어차피 여기가 소설(이려다 만 것) 속의 세계라는 걸 다 불어 버린 마당에, 세이룬에게 내 감상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한창 알콩달콩한 분위기에 젖어 든 두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기, 커플님? 연애 도중 방해해서 미안한데요, 아직 미팅이 안 끝나서요.”

“……아아, 말씀하십시오.”

아쉬운 듯 살짝 찌푸려졌던 미간을 반듯하게 편 킬리언이 나를 돌아봤다.

‘와아…… 칼 같은 예의와 고지식함으로 유명한 사람이 순간적으로 짜증을 주체하지 못해서 미간을 찌푸리다니.’

다른 거창한 이유도 아니고, 단지 바네사와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은 게 불쾌해서 말이다.

나는 일전에 킬리언이 로판 남주 맞냐고 의심하던 마음을 싹 접어서 휴지통에 처박아 버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진행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서, 소공작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경전을 번역해 주세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예상치 못한 듯, 두 눈을 몇 번 깜박이던 킬리언이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번역이라면……, 이레알 어로 된 경전을 이렌텔 어로 번역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네, 맞아요. 저는 이레알 어를 배울 수 없는 여건의 사람들도 경전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런 거라면, 저와 신교의 추기경들도 가능해요. 신교에도 이레알 어를 아는 지식인들이 꽤 있으니까요.”

내 말을 듣고 있던 바네사가 말을 얹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 번역 작업은 세네카 소공작께서 해 주셔야만 효과가 있어서요.”

“……아. 신교에서 번역한 번역서는 아무래도 신교파와 평민에게만 영향을 미치니까요.”

순식간에 경전 번역에 깔려 있는 내 의도를 파악한 바네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공작께서 번역하신 번역서는 구교파에게까지 공신력을 갖게 되겠죠. 구교파 내에서 세네카 공작 가문이 가지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소공작 개인이 가지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고요.”

“…….”

“그리고, 번역된 경전을 읽은 귀족들은 독해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구교의 모순에 대해 의심하게 되겠죠. 소공작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내 말을 듣고 있던 킬리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는, 구교파가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서서히 무너져 가기를 바라시는군요.”

“정확해요. 저는 저들이 선이라고 굳게 믿고 똘똘 뭉쳐서 우리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고 정의라고 믿었던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혼란을 느끼면서 서서히 무너져 가기를 원해요.”

물론, 이것만으로는 구교파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구교의 부패를 일소하여 쇄신하지 않는 이상, 구교파는 이전처럼 하나의 구심점을 매개로 단단히 결속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겠지.

그리고.

“구교의 이름 아래 스스로를 ‘선’과 ‘정의’라 믿을 수 있다니, 셀루리아에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잖아요.”

셀루리아가 스스로를 ‘악’인 드레인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영웅이라고 생각하며 죽는다면, 그것만큼 배알이 뒤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해자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를 영웅이자 피해자로 인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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