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상당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개수작이로군, 그 대사.”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어느 틈에 내 곁으로 다가온 세이룬이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짓씹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살벌하게 읊조렸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대사에 내가 흐린 눈을 뜨고 세이룬을 조용히 내 뒤쪽으로 보낼 즈음, 부지불식간에 나와 상대방 사이로 뛰어든 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대방을 제 뒤로 보호하듯 감췄다.
“제 연인에게 무슨 짓입니까, 대공 전하.”
킬리언이 옅은 살기까지 내보이며 세이룬을 노려봤다.
하, 하고 차갑게 숨을 뱉은 세이룬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대의 연인이 먼저 감히 내 부인님께 개수작을 부렸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잠깐, 잠깐만요.”
이대로는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서둘러 한 손을 높이 들었다.
내가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용호상박처럼 한 치의 물러섬도 없던 두 남정네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 정리부터 해 드릴게요, 세네카 소공작. 제가 저분, 그러니까 소공작의 연인분을 아는 사람으로 착각했어요.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뒤로 물러나려는데, 연인분께서 저한테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보신 게 다예요. 그걸 제 남편이 작업 멘트로 오해했고.”
“…….”
“세이룬도 알았지? 개수작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어진 내 말에, 세이룬은 마지못해서 상대방, 그러니까 바네사를 죽어라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세이룬이 물러나자 킬리언도 바네사 앞에서 물러나 그 옆에 섰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때까지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바네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에리카 르 셀루리아― 아니, 드레인 대공비 전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어쩐지 뜬금없게 느껴지는 질문이라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머뭇거리던 바네사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그대―”
“당신은, 세인트 바네사 교황 성하시지요?”
나는 다시 바네사를 노려보며 앞으로 나가려는 세이룬을 한 손으로 막은 뒤,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신교의 교황 성하를 처음 뵙는 것이랍니다. 이전에 뵌 적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할까요?”
“……네?”
내게로 천천히 다가온 바네사가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손을 뻗어 내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당신을 보면 어쩐지…… 그립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요.”
“…….”
“이신아……. 아까 저를 붙잡으시면서 ‘이신아’라고 부르셨죠. 제가 그 이신아란 분과 닮았나요?”
바네사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집요한 눈빛이 신아를 닮았다면, 그건 신아를 보고 싶어 하는 내 뇌가 만들어 낸 착각일까.
“……성하.”
“대답해 주세요. 이신아란 분은 누구시죠? 이름이 이국적인데……, 마치 해수란 이름처럼―…”
“바네사.”
세이룬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본 킬리언이 나직이 바네사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린 바네사가 아직까지 내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손의 떨림을 멈추고자 클록 자락을 꾹 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침착해 보이려고 애쓰는 겉모습과는 반대로, 속에서는 의문과 혼란이 가느다란 실타래가 설키듯 복잡하게 뒤엉켜 가고 있었다.
‘이신아라는 이름이, 이국적이라고 했어.’
바네사는 이신아를 모른다. 해수란 이름의 의미도 몰랐다.
‘그리고, 처음 보는 거잖아.’
원래의 몸 주인이었던 에리카와도, 에리카에 빙의해 버린 ‘나’와도.
분명, 처음 보는 것일 텐데―
‘―나를 보면, 그립고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고 했지.’
그리고 나는 바네사에게서 신아를 떠올렸다.
그것을 과연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에리카, 괜찮으십니까?”
나직이 들려오는 세이룬의 목소리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이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안색이 창백하신데.”
“아…….”
“몸이 좋지 않으시면, 만남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귀택할까요?”
“아니, 난 괜찮아.”
나는 세이룬의 손을 끌어내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나 하나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예전부터 잡은 약속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꽤 오래 잡아먹었네요. 음, 자리를 옮길까요?”
세이룬이 뭐라고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네사가 말했다.
“근처에 카나리아라는 이름의 오페라하우스가 있어요. 그곳의 박스석이 방음이 잘 되기로 유명하니 그쪽으로 옮기는 것은 어떨까요?”
* * *
“와아…….”
나는 박스석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보며 멍하니 감탄을 연발했다.
김해수와 지금 이 생을 통틀어서 처음 가 보는 오페라하우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그만 이곳을 비즈니스를 위해 방문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오페라하우스구나, 진짜 멋지다…….”
“오페라하우스는 처음이신가요?”
입고 있던 클록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놓던 바네사가 의외라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셀루리아 영애 때는 골방에 갇혀 있느라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대공비가 되고 나서는 복수에만 집중하느라 이런 곳에 온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아, 골방에 갇혀 계셨구나…….”
한순간,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바네사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비트는 것이, 영락없이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나오는 신아의 버릇이라서 나는 왠지 멍해진 얼굴로 바네사를 바라봤다.
그때, 바네사가 돌연 화사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전하의 첫 오페라는 제가 보여 드린 거네요? 티켓은 제가 샀으니까요.”
“네 첫 뮤지컬은 내가 보여 준 거다, 알았지? 두고두고 감사하게 여기고, 네가 작곡한 음악은 가장 먼저 나에게 들려주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들뜬 듯한 바네사의 목소리 위로, 불현듯 지난날 들었던 신아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뮤지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그날로 곧장 유명한 뮤지컬 티켓을 두 장 예매한 신아가 장난스레 거들먹거리며 했던 말이었다.
다음번에는 오페라도 보여 주겠다는 신아에게 오페라는 내가 보여 주겠다며 딱 기다리고 있으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이번 건 공연을 보러 온 게 아니니까 잊어 주세요. 제 첫 오페라는 다음에 제가 보여 드릴게요.”
신아의 여주인공이기 때문일까. 내가 처음으로 보는 오페라는, 내가 바네사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첫 오페라를 보여주기’를 거절당한 바네사는 말없이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차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당부하듯 말했다.
“꼭 보여 주셔야 해요.”
“그럼요.”
“그냥 오페라가 아니고 전하의 첫 오페라예요. 알았죠?”
“네에, 약속할게요.”
“……부인님의 처음을, 다른 이에게 약조하신 건가요……?”
박스석 밖에 나가서 직원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받아 들고 들어오던 세이룬이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건대 금방이라도 손에 들린 음식들을 툭 떨어뜨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서둘러 음식을 받아 들면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마, 말을 왜 그렇게 해! 이상하게 들리잖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냥 오페라도 아니고 부인님의 첫 오페라를,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 약조하셨잖아요. 그것도 오늘 생판 처음 본 남에게요…….”
세이룬이 서러운 목소리로 은근히 바네사에게 벽을 쳤다.
그것을 느낀 바네사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어졌다.
“지금 보니 대공 전하께서는 상당한 징징이시로군요. 다 큰 성인이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리는 모습, 상당히 보기 안 좋습니다.”
“그대가 날치기처럼 내 부인님의 첫 오페라를 가져가지만 않았어도, 그대가 말하는 보기 안 좋은 것을 보는 일은 없었겠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은빛 눈동자와 차갑게 얼어붙은 금빛 은빛 눈동자가 치열하게 서로를 노려봤다.
‘아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나는 그저, 앞으로의 복수를 위해서 협력자들과 미팅 좀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심신이 지친 얼굴을 한 나는 박스석 한쪽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 있는 킬리언을 돌아봤다.
“……소공작,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내 말에, 바네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킬리언이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의 청명한 푸른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네?”
“바네사가 드디어 마음에 들어 하는 동성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군요.”
“……네?”
나는 어벙한 얼굴로 ‘네?’하고 되묻는 말만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뭔 남주가 저렇게 관대해……?’
보통 로판 남주라고 하면, 여주의 동성 친구에게조차도 질투심을 느끼는 좀생이의 대명사로 유명한 존재 아닌가?
‘물론, 신아가 본인의 이상형은 자신의 동성 친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동성 친구와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주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기쁘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어쨌든, 내 첫 오페라를 두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그냥 이대로 두었다가는 협력자와의 미팅은커녕 앙금만 커져서 오늘은 아군이었던 상대가 다음번에는 적이 되어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바네사를 방관하는 킬리언을 내버려 두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성년자 여러분! 착한 성인은 싸우는 거 아니랍니다!”
두 사람의 신경을 환기시키기 위해 손뼉을 짝 치며 말하자, 내 바람대로 살벌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꽂혔다.
나를 향한 두 쌍의 눈동자가 곧바로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비전하, 괜찮아요. 저는 착하지 않으니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별로 착하지 않습니다, 부인님.”
그러니 싸우는 거 맞답니다.
마치 그런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이 사람들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