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응, 있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연 세이룬이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에 앉은 그가 나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 의아한 얼굴로 보지 마세요. 체사를 대신해서 보고할 것이 있어 온 것이니까요.”
“보고?”
“네, 보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가져간 그가 문득 시선을 돌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스레인을 바라봤다.
세이룬의 시선을 받은 스레인의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렸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내게 소리치듯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제가 시간이 없네요! 당장 오늘 내로 중앙 기사단 단원들의 스케치를 마무리해야겠어요!”
“음, 그래, 뭐…… 원한다면.”
“네! 감사합니다!”
스레인은 내 허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나는 흐린 눈으로 황급히 멀어져 가는 스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반역을 일으켜서 같이 죽기 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이라도 실컷 그리다가 죽자는 마음가짐인가…….’
물론 세이룬의 시선을 받자마자 도망쳤으니 자리를 일찍 뜬 것은 세이룬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본능적으로 내뱉은 변명이 ‘시간이 없다’라니. 뭔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저기요. 안 죽게 한다니까요. 당신 시간 많아요…….
그렇게 잠시 아련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불현듯, 언제 가져갔는지 모를 내 손바닥 위로 세이룬이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여린 곳에 닿은 말캉한 감각에 흠칫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가련하게 눈을 내리뜨고는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에리카의 손도, 이름도 공공재이지 않습니까.”
“으, 응?”
“당신의 관심마저도 공공재로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절 연인으로서 사랑한다고 하셨으니, 당신의 관심은 마땅히 저의 것이지 않습니까. 그가 투정 부리듯 덧붙이며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이, 이런 요망한 짓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아무리 그와 진도를 뺐다고 할지라도,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이런 감각이 익숙해질 리 없었다.
깜짝 놀라서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세이룬은 내 손을 놓치기는커녕 오히려 끌어당겨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 때문에 이대로는 정말로 심장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사태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일단 외쳤다.
“보고! 나한테 보고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에리카는 말을 티 나지 않게 돌리는 법을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투덜거리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티 나지 않게 말 돌리는 법은 개뿔이, 숨이나 놓아주고 그런 말을 하던가. 아주 양심이 없다.
내가 속으로 꿍얼거리는 것을 모를 게 분명한 세이룬은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체사 녀석이 말하기로, 베이센 소공작이 셀루리아 영애 시절의 에리카에 대한 S등급과 A등급 정보를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넘기지는 않았다고 하고요.”
“아아, 그런 일이 있었…… 잠깐만. 체사 씨가 그걸 나한테 보고하려 했었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룬을 바라봤다.
처음, 나는 체사에게 나에 대한 S등급과 A등급의 정보는 필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비공개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킬리언과 바네사, 사피엔에게만 그 정보를 허용한 다음에는 바빠서 잊고 있었기도 하고, 그 이외의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내가 뿌려 댄 떡밥에 대해 꽤 많은 금액을 써 가면서까지 깊은 관심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계속 놔두고 있었던 실정이었는데.
‘그런데 내가 뭔가를 요청하거나 물어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는 체사 씨가, 물어보지도 않은 걸 먼저 말해 준다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세이룬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와 눈을 맞췄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세이룬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나는 더 첨언하지 않고 그저 생긋 웃기만 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굳이 귀찮게 이유까지 알아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어쨌든 베이센 소공작이 내 과거사가 궁금해서 녹셰에 정보를 요청했다는 거지?”
지난 성혼식 연회에서 세이룬에게 소공작이 셀루리아 영애 시절의 나에 대해 물어봤다는 걸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녹셰에 손을 뻗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이룬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했다.
“네, 맞습니다.”
“음, 계속 정보 제공을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으니까 일단 소공작에게는 정보를 제공하라고 해야겠다.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모두에게 해당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허용하면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아직은 에스로타에게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제 구교파의 중심 귀족 중 한 명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일 진행이 빨라지겠네.’
영문 모를 호의와 관심이 다소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그게 악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유를 알아낼 필요가 없기는 아까와 매한가지였다.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나는 방긋 웃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바로 킬리언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킬리언?”
불현듯, 옆에서 세이룬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앗, 신아가 하도 우리 킬리언, 우리 킬리언 해 대서 나도 모르게 그만…….’
말실수를 깨달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흑흑, 오늘만 말을 두 번이나 돌리는군…….
“내, 내가 아까 중앙 기사단의 집단 초상화를 스레인 화백에게 의뢰했잖아. 세이룬도 같이 참여하는 게 어때? 명색이 단장님인데!”
티가 나는 말 돌림에,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세이룬은 이내 한숨을 폭 내쉬고는 ‘저는 대인배이니 이번만 넘어가 드리겠습니다’라고 쓰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은 에인시아나 세사르에 걸릴 그림이지 않습니까.”
“맞아.”
애초에 초상화를 의뢰하려는 이유가 대공가의 군력을 전시함으로써 구교파에게는 불안감을, 신교파에게는 군권에 대한 신뢰감을 얻으려는 목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정치·경제적 담화가 오가기도 하는 에인시아와 세사르는 이런 면의 홍보 장소로 제격이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룬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는 그 그림에 그려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음, 아쉽네…….”
나는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저 찬란한 미모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도 세상 사람 모두에게 찬양받도록 하질 못한다니, 안타깝도다.
‘……근데 잠깐만. 대공성에는 역대 대공 부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잖아?’
심지어, 그 그림 가운데 걸려 있던 어린 세이룬의 초상화는 직접 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 말인즉, 그림에 그려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개되는’ 그림에 그려지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왜지? ……설마, 그 이유가 용의 수명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용의 수명이 너무나도 길어서?
순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의문을 떠올렸다.
일전에 세이룬에게서 듣기로, 드레인 가문은 실제로는 용족의 가문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그저 고대 용의 피가 섞여 있을 뿐인 평범한 인간의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경계가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한 얼굴로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자가 대중에게 공개될 그림에 그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모두에게 얼굴이 알려진 자가?
“…….”
불현듯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죽고 나서 수많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세이룬도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나한테는 평생이지만, 세이룬한테는 찰나일 테니까.
지금껏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던 그와 나의 차이가, 갑자기 무척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에리카?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세이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뺨을 감쌌다.
사실대로 말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세이룬은 눈치가 빠른 편이니, 아무리 내가 표정을 숨긴다고 해도 바로 눈치채겠지.
그래서,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보채듯 중얼거렸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 다 됐잖아. 나 배고파.”
“배가 고프십니까.”
세이룬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은 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가 고파 힘이 없으신 듯하니, 제가 직접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가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애교 부리듯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는데, 그 모양새가 꼭 사랑받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커다란 댕댕이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럼 부탁할게, 샤샤.”
“네, 저만 믿으세요.”
자신을 써먹어 줘서 행복한 세이룬이 뿌듯하게 말했다.
나는 “응”하고 중얼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은, 굳이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 * *
킬리언과 바네사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에이리트의 중앙 광장이었다.
그러니까, 남주가 나를 여주로 착각해서 잘못 붙들었다가 빚을 지게 된 그곳 말이다.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광장을 둘러보던 나는 아련한 회상에 젖어서 입을 열었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난다. 나 이셀트 12구역에 집 샀을 때 너 데리고 여기 왔었잖아.”
“그리고 소공작을 질투하냐며 저를 놀리셨죠.”
세이룬이 새침하게 말하며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건 샤샤가 너무 귀여웠던 탓이야.”
“……그런 거라면, 특별히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작게 뺨을 붉힌 세이룬이 나와 맞잡아진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어?’
내 시야 사이로,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의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내 고개가 그 뒷모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물론 그 사람도 나와 세이룬처럼 후드로 모습을 꼼꼼히 가린 채였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그리움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깊게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저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아.”
멍하니 입술이 달싹였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세이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에리카?”
“이신아……!”
세이룬의 말에 대답할 여유도 없이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놓고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무작정 손을 뻗어서 그 사람을 돌려세운 순간, 갑자기 몸이 돌아간 반동으로 인해 상대방의 은홍빛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상대를 꽉 붙잡고 있던 내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아…….”
문득, 다리에서도 힘이 풀렸다. 나는 금방이라도 휘청거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여기에 갑자기 신아가 있을 리 없잖아.’
실례를 범했다.
나는 힘없이 손을 거둬 가며 상대방에게 사과했다.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
“잠시만요.”
갑자기, 완전히 떨어지려는 손을 상대방이 다급히 붙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후드 속에 가려진 상대방의 은빛 눈동자가 옅은 동요를 머금은 채로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나요?”